조효제의 인권 오디세이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일러스트레이션 유아영

요즘 인도적 지원이 많이 변하고 있다. 위기 상황 초기부터 인권침해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느슨해진 사회 지지망을 틈타 인간 하이에나들이 모여들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이 인도적 지원 업무의 핵심이 된 것이다

인신매매는 특히 성매매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나타난다. 자발적 성매매를 합법화한 나라에서 예상 밖으로 인신매매와 비자발적 성매매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실증연구가 있다. 인권 논쟁에서 자유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써야 하는 이유를 말해 준다

지난달과 이번달 네팔에서 연거푸 발생한 지진의 결과에 우리는 놀라움과 연민을 감출 수 없다. 어렵고 가난한 나라에서 왜 이렇게 힘든 일이 계속 일어나는가.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 악랄한 인권문제까지 발생하고 있다. 지진 이후 인신매매가 심해진 것이다. 재난을 당한 지역의 여성과 아동들이 카트만두나 해외로 대거 팔려나가고 있다. 네팔 국내 그리고 국제 인권단체들은 상황이 아주 심각하다고 입을 모은다. 재해 한복판에서 왜 이런 인권침해까지 일어나는 것일까.

네팔의 인신매매는 지진 후 갑자기 생긴 문제가 아니다. 오래전부터 매년 만명 이상의 네팔 여성들이 도시나 해외로 팔려나가고 있었다. 동남아 각국으로, 심지어 한국에까지 온다고 한다. 특히 인도는 이런 여성들을 집결시켜 성매매를 산업화하는 중심지 역할을 해 왔다. 그러던 중 재난이 덮쳤고 그 혼란을 틈타 여성과 어린이를 상대로 인간 사냥이 기승을 부리게 된 것이다. 집을 잃고 가족도 흩어진 막막한 상태에서 사람 좋아 보이는 아저씨가 숙식과 일자리를 제공해 주겠다고 할 때 솔깃해하지 않을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게다가 그 아저씨를 잘 안다고 말 보증 서는 동네 사람이 있다면 그 후 벌어질 일은 불문가지이다.

명목상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다는 이들이 나쁜 가해자가 되곤 한다. 예를 들어, 1990년대 보스니아 전쟁 당시 유엔 평화유지군이 현지 여성들을 상대로 대규모 성매매를 했다가 큰 물의를 빚은 적이 있다. 아이티에서 지진이 난 후 해외로 입양된 고아들 중 상당수가 업자들에 의해 팔려나간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최근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프랑스 평화유지군이 돈과 음식을 미끼로 남자아이들을 성추행하고 유엔에서는 그 사건을 쉬쉬하다 오히려 국제적 문제로 비화한 적도 있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요즘 인도적 지원이 많이 변하고 있다. 자연재해나 내전이 발생해 긴급하게 도움을 제공할 때에 단순히 물자지원이나 피해복구만이 전부가 아니게 되었다. 위기 상황 초기부터 인권침해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느슨해진 사회 지지망을 틈타 인간 하이에나들이 모여들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이 인도적 지원 업무의 핵심이 된 것이다. 인도주의 활동과 인권보호 활동이 수렴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현재 노예제도를 공식적으로 유지하는 나라는 지구상 한 군데도 없다. 그러나 세계인권선언에서 금지한 ‘노예 또는 타인에게 예속된 상태’를 초래하는 인신매매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유엔은 세계적으로 약 250만명의 인신매매 피해자가 있다고 추산한다. 인신매매 관련 문헌을 찾아보면 ‘근본 원인’을 찾는 연구가 많다. 인신매매가 인권침해인 건 분명한데 그 원인이 하도 복잡 다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인신매매를 현대판 노예제도라 부르곤 하지만 그것은 인신매매를 묘사하는 하나의 표현일 따름이다.

인신매매는 고용, 이주, 밀수, 마약거래, 성매매, 섹슈얼리티와 자율성 등 여러 차원의 문제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인신매매를 활성화하는 요인도 여럿 된다. 계급, 계층, 차별, 빈곤, 도시화, 생활수준 개선욕구, 남성의 여성 지배 등 다양한 요인이 섞여 나타난다. 인신매매가 한쪽 극단으로는 과거 아프리카 노예처럼 노골적인 지배, 굴종, 소유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쪽 극단에는 느슨한 형태의 외견상 자유계약 관계 비슷한 형태도 있다. 인신매매를 당한 사람이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고생하는 ‘사장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품기도 한다. 인신매매를 하는 측에서도 은혜를 베푼다는 자기정당화나 자기기만에 빠진 경우도 적지 않다. 이처럼 깊은 차원에서 지배와 종속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최근 세계 인권학계에 <인신매매저널>이라는 국제학술지가 창간되었다. 인신매매의 예방, 처벌, 정책을 연구하고 인신매매 관련 국제 정치경제를 연구할 목적이다. 인신매매에 있어 이른바 ‘4R’이라고 불리는 문제들-저항(Resistance), 구조(Rescue), 사회복귀(Rehabilitation), 재통합(Reintegration)-을 다룰 예정으로 있다.

인신매매는 특히 성매매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나타난다. 유엔 마약범죄사무소의 2009년 연구에 따르면 인신매매 피해자 중 성인 여성이 66%, 여자 아동이 13%, 남자 아동이 12%, 성인 남성이 12%이다. 인신매매의 목적이 무엇인가. 노동 착취도 있지만 인신매매의 79%가 성적 착취를 목적으로 하며 이것은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현상이다. 결국 오늘날 인신매매는 성매매용으로 인간을 거래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노예제와 현대 인신매매의 결정적 차이점이 여기에 있다.

말이 나온 김에 성매매를 둘러싼 논점을 짚어보자. 성매매 논쟁엔 크게 보아 두 가지 축이 있다. 첫째 축은 자유-강제로 나뉜다. 즉 자발적 성매매와 비자발적(강제적) 성매매의 문제이다. 인신매매에 의한 성매매는 비자발적 성매매에 해당된다. 인신매매와 비자발적 성매매는 국제법상으로 그리고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중대한 인권침해로 간주되고 있다. 특히 어린이·청소년의 인신매매와 비자발적 성매매는 무조건 처벌 대상이라 보면 된다. 국제노동기구는 이것을 최악의 아동노동으로 규정한다. 그렇다면 이른바 ‘자발적’ 성매매는 어떻게 할 것인가. 자유의지와 자유선택을 강조하는 측에서는 자발적 성매매를 정당한 성노동으로 인정하자고 주장한다. 성매매를 정상적 산업으로, 성매매 종사자를 정상적 노동자로 보자는 말이다. 성노동자를 피해자로 보는 시각 자체를 거부한다. 이렇게 되면 성노동자는 보통의 직업인이 되며 노동정책의 규제와 보호를 받으며 존립한다. 뉴질랜드, 독일, 네덜란드가 이런 길을 택한 나라들이다.

이에 반대하는 측에서는 자발적 선택이라는 개념을 상대화해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엔의 ‘인신매매금지협정’은 합의를 했더라도 성매매 착취는 인권침해라고 했고, 특히 여성·아동의 인신매매를 금지한 유엔의 ‘팔레르모 의정서’에서는 위협이나 강제력을 써서 착취해야만 인신매매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규정한다. 성차별이나 빈곤 등 기존의 약점을 이용하는 것만으로도 인신매매가 성립된다고 본다. 대다수 성매매 뒤에는 빈곤, 교육, 고용, 제도화된 젠더 불평등 등의 구조적 문제가 있다. 또한 ‘진정한’ 자발적 성노동이라 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정신적, 심리적, 육체적인 트라우마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성매매를 정상적 노동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자발적 성매매 반대론자들은 흔히 성매매 제도 폐지론에 가깝다.

둘째 축은 성매매의 범죄성과 처벌을 둘러싼 논쟁이다. 위에서 봤듯이 인신매매와 비자발적 성매매는 어차피 중요 인권침해이고 범죄이므로 논의할 필요도 없다. 성매매가 합법적인 나라에서도 인신매매와 비자발적 성매매는 불법이고 범죄이다. 여기서 쟁점은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성매매 관련자들을 어느 선까지 처벌할 것인가이다. 성을 사고, 팔고, 중개하는 사람들 모두가 처벌 대상인 나라도 있다. 그러나 스웨덴, 노르웨이, 아이슬란드와 같은 곳에서는 성매매를 불법화했으면서도 성을 사는 사람과 중개하는 제삼자(포주)는 처벌하되, 성을 직접 파는 사람은 처벌하지 않는다는 이른바 성매매 종사자의 탈범죄화 정책을 시행한다. 공식적으로는 성매매가 불법이지만 성매매에 종사하고자 하는 사람의 현실과 사정을 감안한 일종의 완충지대를 둔 것이다. 성매매를 법적으로 금하되 개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고 성매매가 지하로 음성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종의 틈새를 둔 실용주의적, 인도적 정책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인신매매와 성매매에 관한 논쟁은 복잡한 가치론적 성격을 띠고 있다. 자유의 본질을 둘러싼 철학적 논쟁이기도 하다. 한 가지 기억할 점이 있다. 자발적 성매매를 합법화한 나라에서 예상 밖으로 인신매매와 비자발적 성매매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실증연구가 나와 있다. 현실이 논리적으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고, 인권 논쟁에서 자유라는 말을 조심스럽게 써야 하는 이유를 말해 주는 증거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한겨레 사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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