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랖 농부, 나일농 농부의 꿈


                                                                                                            안철환(81/물리)



고등학교 때 남들처럼 공부하느라 코피 흘리는 게 소원이었던 적은 있었어도 풀 매느라 코피 쏟기는 상상불허였다. 남들이 들으면 무진장 열심히 농사짓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겠지만 천만에 말씀이다.


요즘 도시에 농사바람이 불어 남들 농사 참견하러 다니느라 정작 내 밭에는 풀 천지가 되어버렸다. 와이프(김영채, 수학 83)가 방학을  해서 이 때가 기회다 했지만 오랜만에 쉬려고 하는 사람을 억지로 밭에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이래저래 핑계 대고 늦잠을 잤더니 밭에 가는 시간이 9시 넘어서였다. 한 여름 아침 9시면 해가 중천이다. 본격적인 하루의 무더위가 시작되는 때라 남들은 새벽에 나갔다가 일 다 보고 들어올 시간에 우리는 중무장을 하고 밭에 풀을 매러 나갔다. 그렇게 이틀을 일했더니 바로 탈이 난 것이다. 그것도 어느 회의 자리에서였다. 처음엔 코 구멍에서 물기가 흐르기에 웬 콧물이지 하고 손으로 닦았더니 코피가 아닌가. 그리고는 피가 멈추지 않고 줄줄 흐르는데 참으로 곤혹스러웠다. 내가 말할 차례가 왔는데도 말할 엄두도 못내고 남들 눈치 보며 손수건으로 코구멍을 틀어막는데도 피가 금방 멈추질 않았다. 옆 사람이 놀라 물어보기에 며칠 풀 맨 것 땜에 그런 것 같다고 얘긴 했지만 뙤약볕에 했다는 얘긴 못했다. 요즘 말로 쪽 팔리는 일이라...아무튼 그 일이 있고 나서 집사람을 살살 달래며 새벽에 밭엘 가기로 했다. 처음엔 피곤해 하는 마누라 몰래 갔다. 풀 매는 새벽의 공기는 참으로 환상이었다. 게다가 아침에는 모기도 없어 일하기가 완전히 베스트였다는 것을 썰(設)을 푸니 영채가 바로 마음이 동해 다음 날부터는 새벽에 함께 풀 매러 밭에 갔다. 그렇게 한 삼일을 가고 이 글을 쓰는 것 같은데 아직도 싱그런 아침 기운이 마음을 떠나질 않는다.


1998년 즈음인가 IMF 때 직장을 그만두고 이리저리 방황하다 우연히 낮술을 먹고 주변에 있던 주말농장에 들어가 호기심에 심었던 배추가 싹이 난 것을 보고 환장해버렸다. 3일만에 싹이 난 배추를 보는데 그게 얼마나 신기하고 놀랐던지 이 사건을 나는 무당 신들린 경험과 갔다고 뻥을 쳤다. 씨를 심으니 싹이 나는 것이야 생물 시간에 배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건만 나는 막상 배추 싹이 난 것을 보고는 씨 안에 누군가 있었구나 했다. 그 때 얻은 밭이 세 평이었는데 매일 밭에 가 살았다. 영채는 “드디어 저 인간이 맛이 갔구나” 하는 눈빛을 쏘아댔건만 나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그리고 드디어 내 손으로 일군 최초의 유기농 배추를 수확하러 갔더니 주말농장 사장님 말씀 하시길 “자네 몸도 불편해 내가 제초제도 뿌려주고 화학비료도 주었네,”하는데 그 마음이 고맙기 그지 없건만 속으로는 얼마나 황당했던지 참으로 난감해 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래도 나는 농사에 완전히 미쳐 버렸다. 이듬해 나는 세평에 성이 차지 않아 800평을 얻었다. 물론 나 혼자 다 할 수가 없어 아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100평씩 나눠 농사짓기 시작했다. 그 때는 얼마나 열심히 농사를 지었는지 꺼떡하면 해 뜨기도 전에 밭에 가서 여명 뜨는 거 보며 하루 농사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열심히 농사에 미쳐 세월이 가는 줄 모르고 지내는데 친구 한 놈이 놀러 와서 하는 말이 “너, 위장취농이지?” 하는 게 아닌가. 농담으로 던진 얘기지만 나에게는 적지않이 고민을 남겨주는 문제 제기였다. 내가 하는 짓이 남들에게 진정성이 없어 보였구나 하는 것에서부터 혁명을 꿈꿨던 놈이 하찮은 농사일에 미쳐서 시간을 허비하는 것은 아닌지, 이게 진정 위장취농이면 나는 뭘 목표로 하는 건지, 내가 농사일로 행복하면 세상이 행복해지는 건지 등등 별로 즐겁지 않은 고민을 안겨다 주었다. 그렇지만 내 천성이 원래 별 득이 되지 않는 고민에는 집착하지 않는 성격 때문에 그냥 재밌는 농사일에 집중했다. 그리고 영채를 꼬셔 지금의 밭을 돈 주고 샀다. 양가 집안 어른들이 반대가 심했다. 네가 그 몸으로 무슨 농사를 짓겠다고 전세 사는 주제에 농사를 짓겠다고 밭을 사는 거냐? 등등. 재밌는 것은 영채가 아파트 사려고 모은 돈을 아무 미련 없이 밭 사는 데 투자하기로 했다는 사실이다. 내가 취직할 생각은 하지 않고 같지않은 세평에 미쳐 다닐 때 한심하다는 눈빛을 여과없이 쏘아대던 집사람이 아껴가며 모아두었던 돈으로 밭 사는데 투자한다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나도 궁금해 나중에 물어보니 직장 다닐 때는 항상 피곤하고 짜증이 많던 사람이 농사를 짓고부터는 늘 웃고 재밌는 얘기를 많이 해주는 것을 보고 농사가 뭐기에 사람을 저렇게 바꿔놓았나 신기해 맘을 먹게 되었다고 했다. 아무튼 그렇게 지금의 밭을 2000년부터 농사짓고 있는데 이른바 도시농업 운동을 하기 전인 2004년까지는 나 혼자 미친 듯이 밭을 기어다니며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도 사람 좋아하는 본성은 못 속이는지 그 넓은 밭에서 혼자 농사지으면 갑자기 적적한 마음이 밀려들어 밭 입구를 쳐다보면서 “심심한 놈 안 놀러 오나?” 하고 사람을 그리워하곤 했다. 그러다 도시에 농사바람이 불더니 밭에 있는 시간보다 돌아다니는 시간이 훨씬 많아졌다. 그것도 전국구다.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전주 등 광역도시를 비롯해 전국을 그야말로 쏘다니고 있다. 2011년 불의의 사고로 쓰지 못하던 다리마저 동강 뼈가 부러져 큰 수술을 받고 부터는 휠체어 타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돌아다니는 오지랖은 버리지 못하고 있다. 물론 밭에선 목발짚고 밭 일을 하지만 조금만 먼 길을 걸으려면 옛날처럼 목발로는 도저히 걸어가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는데도 본성은 어디 가지 않는다.


 



2012년은 내 인생에 최고로 바쁜 해였던 것 같다. 조직을 두 개나 만들었으니.... ‘텃밭보급소’라는 전문 도시농업 단체를 시작으로 전국의 도시농업 단체들 협의체인 ‘도시농업시민협의회’를 창립했다. 물론 처음부터 계획적인 것은 아니었다. 어찌 하다 보니 그리 되었다. 그리고 그 단체들에서 맡은 내 직책 임기가 올해로 끝이다. 세상에 내가 제일 바쁜 사람일 것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았던 20대 때보다 나이 50살 넘어 더 바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을만큼 요즘은 틈도 없이 살고 있다. 웃기는 코피까지 흘리며....이런 상황에서 이런 글을 써달라고 하니 사실 황당했다. 사는 얘길 해달라니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단지 내가 좋아하는 사무국장님이라 마다하지 못하고는, 이리저리 머리 굴리다 마감 시간 지난 이 시간에 주저리 주접스런 글을 쓰고 있다. 아무튼 내년부터 시간이 나서 다시 농사에 집중할 것을 생각하면 괜히 피식 웃으며 기분 좋은 바쁜 날을 보내고 있다. 도시사람들이 농사에 열광하는 것은 흙냄새를 맡고자하는 몸부림이라 평가한다. 나는 그것을 생존의 몸부림이라 본다. 대학 때 즐겨 불렀던 타박네야의 “우리 엄마 젖 먹으러 무덤가에 기어간다”의 엄마 젖은 분명 흙냄새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흙냄새를 맡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 없어 기어가면서까지 맡으러 가는 것이다.


우리가 젊을 때 꿈꿨던 혁명의 모습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팍팍한 사회주의 이론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런 엄마 젖냄새, 흙냄새, 사람냄새, 생명냄새를 물씬 맡아가며 살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아니었을까?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혁명 이전의 한 노동자가 매일 나사를 끼우는 일을 했는데 혁명이 성공한 이후에도 그 사람은 변함없이 매일 나사를 끼우고 있다면 혁명이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1987년 이후 우리는 민주주의를 이뤘고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다. 권력을 잡지 못해서일까? 그만 주접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원고 분량을 다 채운 것 같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