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2015-07-21 10:21:57



지금, 너무도 소중한 영화, <암살>


강성률 _ 영화평론가, 광운대 교수


이상한 일이다.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계는 분명 전성기를 맞고 있지만, 신기하게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다룬 영화는 거의 제작되지 않고 있다. 이것이 이상한 것은 한반도의 숨 막히는 근대사, 현대사를 수많은 감독들이 영화화해 역사적 해석을 새롭게 하고 영화적 흥행도 갱신했기 때문이다. 액션 영화로, 첩보 영화로, 멜로드라마로, 심지어 코미디로 재해석된 한국의 근현대사들. 그런데 이 리스트에 유독 독립운동을 다룬 이야기는 빠져 있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국제시장> 등 천만 이상을 동원한 영화들은 대부분 한국전쟁이나 한국전쟁이 불러온 대립에 주목하고 있다. 액션과 멜로의 결합, 또는 신파적 멜로의 노골적인 전시, 그리고 이것이 불러온 엄청난 흥행. 이뿐 아니다. <공동경비구역 JSA> <쉬리> <웰컴 투 동막골> <고지전>처럼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성공한 영화들도 꾸준히 만들어지고, 심지어 양민학살을 다룬 <작은 연못>처럼 독립영화 진영의 영화도 만들어졌다. 단언컨대 한국전쟁과 그 이후를 다룬 영화를 나열하는 것만으로도 이 지면을 다 채울 수 있다. 

그렇다면 독립운동을 다룬 영화는 어떤가?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아나키스트> <모던 보이>. 더 이상 기억하기 어렵다. <도마 안중근>을 이 리스트에 더 올려놓으면 정말 더 이상 채울 영화가 생각나지 않는다(<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독립운동을 다루었다고 보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안 다루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 애매한 위치가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이상하게도 이 4편의 영화는 흥행에도 성공하지 못했고 비평에서도 실패했다. 이 극단적 대립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한국전쟁과 분단, 이념의 대립을 다룬 영화는 지금도 꾸준히 만들어지고 있는데(현재 <연평해전>은 승승장구 하고 있지 않은가) 왜 독립운동을 다룬 영화는 이토록 냉대를 받고 있는 것일까? 이 현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먼저 독립운동을 다룬 영화를 개별적으로 살펴보자.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를 영화화한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다룬 영화가 아니라 가상 미래를 다룬 SF영화이다. 최고의 스타가 출연했지만, 영화적 긴장감은 높지 않았고 특수 효과도 그리 뛰어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현실감이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래서 기대가 높았던 작품이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의열단을 다룬 <아나키스트>는, 가혹하게 말하면, 독립운동을 하는 독립군을 마치 패션쇼의 스타처럼 그려 현실감을 스스로 지워버렸다. 1930년대 경성의 유행과 패션, 문화를 그리다가 독립운동으로 급격하게 선회한 <모던 보이>도 극적 긴장감이 높지 않고 개연성도 떨어져 실패하고 말았다. <도마 안중근>에 대해서는 굳이 이 지면에서까지 평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경향이 이상한 것은 해방 직후 만들어진 영화의 많은 흐름은 광복영화였기 때문이다. 일제의 모진 탄압과 해방의 기쁨, 새로운 조국 건설의 희망 등을 그린 이 영화들은 확실하게 주류 흐름을 형성했었다. 1960년대 한국영화가 충무로에 안착해 전성기를 누릴 때에도 독립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는 숱하게 만들어졌다. 심지어 만주의 황금을 둘러싼 이야기를 독립군과 연계해 재현한 만주웨스턴이 하나의 서브 장르로 규정될 정도였으니, 그외 다른 장르를 새삼 말해 무엇하랴? 이 시기 독립운동을 다룬 영화는 사극, 액션영화, 첩보물, 서부극, 멜로드라마 등 숱한 장르로 변용되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독립운동을 다룬 영화들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제강점기가 이미 오래된 과거이니 흥미를 읽은 것일까? 그렇다면 여전히 강세를 유지하고 있는 ‘사극 열풍’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 일제강점기라는 특정 시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예전 같지 않은 것은 분명 아니지만(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강한 반일정서를 여전히 지니고 있는가?), 영화로 재현되지 않는 이 기이한 현상. 1960년대의 장르적 변용과 해석은 완전하게 한국 전쟁과 냉전의 시대로 넘어갔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2000년대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보다는 한국전쟁의 냉전과 분단에 관심이 더 많았다고. 적어도 영화에는 그렇다. 한국전쟁의 냉전과 분단이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여전히 현재형으로 유효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들어 영화의 검열이 없어지고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었을 때, 분단의 벽을 넘으려는 숱한 영화가 등장해 실제 현실의 벽을 넘으려 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다룬 영화보다 더 시급한 현실의 문제를 다루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물어야 한다. 독립운동을 다루는 영화가 더 이상 우리에게 의미가 없는 것이냐고? 해방 직후나 1960년대에 독립운동을 다룬 영화가 필요했던 것은 시대적 의미였지만, 이제 그런 시대적 요구가 사라진 것일까? 정말 그런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일제강점기를 피할 수 없고 그 안에 꿋꿋이 싸워온 독립운동은 더더욱 외면할 수 없다. 일제강점기는 오래된 과거가 아니라 ‘익숙한 미래’라는 것을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확인하고 있지 않은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이 없다면 결단코 지금 우리는 없다.

최동훈 감독의 <암살>을 보면서 무엇보다 반가웠던 것은 이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정면에서 그리고 있었던 것. 그것도 김구와 김원봉의 합작을 그리고 있다. 1960년대 영화처럼 전쟁 스펙터클도 등장하고, 첩보물처럼 긴박감이 넘치며, (약하지만) 멜로적 코드를 통해 감정적 동화도 선사한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조화롭게 얽히고설켜 커다란 울림을 선사한다. 친일과 독립의 이분법적 갈등에만 매몰되지 않고 드라마에 살을 찌웠다. 전지현, 하정우, 이정재, 조진웅, 오달수, 이경영, 조승우 등 스타들이 총출동한다. 

이 영화의 진정한 묘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해방 후 반민특위도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범죄의 재구성> <타짜> <전우치> <도둑들> 등 만드는 족족 흥행만 했던 최동훈이 자신의 특기를 십분 발휘해 우아하고 진중한, 멋진 영화 한 편을 만들었다. 이 영화를 본 날, 참으로 기뻤다.


▲ 7월 22일 개봉예정인 암살(2015) 서브 포스터 "1933년 친일파 암살작전, 그들의 선택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