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광장에서 성유보 선생 민주사회장 치러져
성유보 동아투위 위원 11일 ‘모란공원’에 안장

   

“자네와 나는 입학하자마자 조그만 학생서클에서 시작해서 우리들의 풋풋한 꿈을 그려왔네. 그러나 그런 꿈은 박정희 전두환 그리고 이 나라의 못된 정치가들에게는 용납해 줄 수 없는 꿈이었네. 우리는 꿈을 접을 수 없었고, 그것은 저들의 탄압과 고문으로 나타났지만, 우리는 그치지 않았다. 자네 역시 이 한반도에 한 많은 뜻있는 선비처럼, 일하는 사람처럼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네. 자네가 걸어온 참 언론의 일, 민주 평등 평화의 길. 이제 자네가 사랑하는 후배들이 이어받는 것을 지난 몇 일간의 장례에서 지켜봤네. 언제나 줄선 바지 하나 입은 것 보지 못했네. 빛이 나는 구두 신은거 보지 못했다. 행동은 어눌한 듯 말도 느릿했지만 지혜를 담고 있는 자네의 눈은 언제나 시대의 흐름을 보고 있었네” (이부영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회장)

   

민주 통일 이룰태림, 참언론인 故 성유보 선생 민주사회장이 11일 치러졌다. 성유보 선생(72)은 지난 8일 오후 6시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전태일, 이소선 등 민주열사들이 있는 모란공원에 묻혔다.

성유보 선생은 박정희 정권 때인 74년 동아일보에서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에 동참했고, 75년 강제 해직돼 이후 동아자유언론투쟁위원회(http://www.donga1024.or.kr) 위원으로 활동했다. 84년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초대 사무국장, 86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을 맡아 사회 · 언론 운동을 이어갔다. 또 88년 한겨레 신문 초대 편집위원장을 지냈고, 93년 사회평론사 대표이사를 지냈다. 98년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이사장과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를 맡았고, 2000년 선거보도감시연대회의 대표, 국가보안법 폐지 국민연대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2003년 방송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일했고, 2007년 대통령선거 선거방송심의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013년 희망래일 이사장, 2014년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이사장으로 일했다.

동아일보 동기였던 이부영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회장은 성유보 선생에 대해 길모퉁이 어디선가 마주쳤을 동네 아저씨의 얼굴을 가졌으며 삼국지의 ‘방통’을 닮았다고 전했다. 전태일 열사의 동생인 전태삼씨는 “한진 중공업 투쟁에서 비를 맞으며 최강서 열사를 부르며 오열하던 성유보 선생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이부영 회장은 “성 위원은 내년 해방 70주년에는 광화문 일대에 난장판 축제를 벌이고 한 일주일 해방의 거리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말했다”며 “이제 후배들이 그것을 준비하겠지. 믿어 주시게”라고 전했다.

시인 김정환씨는 조시 ‘미소’에서 “언론민주화 운동도, 정치 민주화 운동도 했지만 어디서나 기척이 없었다. 미소만 남겼다”라고 적었다.

   

서울광장에서 치러진 영결식에는 함세웅 신부,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 최민희 국회의원, 권오훈 언론노조 KBS본부장이 조사를 했다.

김종철 동아투위 위원은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빛나는 정신과 민주통일에 대한 열망은 함께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은 이어 “성유보 선생은 박근혜 정권이 민주주의와 겨레의 통일과 정반대로 치닫고 있는 지금 우리는 6월 항쟁 당시의 굳센 투지와 단결로 새로운 유신체제를 무너뜨리고 진정한 민주 정부를 세우는 싸움을 치열하게 벌여야 한다고 강조했었다”며 “당시 성유보 선생은 지병으로 얼굴이 황달로 노랬고, 고통을 겪고 있었다”고 전했다.

최민희 의원은 “당신은 너무도 소탈해서 이웃집 아저씨와 같았지만, 민주주의자로 원칙을 지킬 때 누구보다 단호했다”며 “백골단에게 쌓여 가지 못하고 있을 때 당신은 우리들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모두가 농민가를 불렀고, 그 순간 당신은 우리의 가슴 속에 꽃으로 피어났다”고 전했다.

권오훈 KBS본부장은 “이제 우리 모두 성유보가 되겠습니다. 참언론인의 길을 조금만 더 밝혀주시길 바랬지만, 하늘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며 “거악과 불의에 맞서 오로지 진실을 말하는 용기. 아래로 아래로 끝없이 자세를 낮추는 겸손을 몸소 보여주신 참언론인 성유보 선생은 그렇게 떠나갔습니다”라고 안타까워 했다.

   

권오훈 본부장은 이어 “이제 후배 언론인들이 성유보 선생에게 진 빚을 갚겠다”며 “다시 언론자유, 민주언론 깃발을 들겠다. 자유언론수호, 민주언론 쟁취 못다 이룬 꿈 저희가 이루겠다”고 재차 말했다.

   

유가족 인사로 성덕무씨는 “제가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견뎠는데 박근혜 시대 못 견디겠느냐고 말하시곤 했다”고 전했다.

   

성덕무 씨는 “3박4일 동안 상을 치르면서 언론인 성유보도 보고, 민주주의 사상가 성유보도, 평화통일 운동가 성유보도 보게 됐다. 그리고 각자 여러분은 여러분의 성유보를 보셨을 것”이라며 “어제 입관식을 하면서 후회된 것은 아버지를 뜨겁게 안아 들이지 못했던 것으로 여러분들이 뜨겁게 안아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

   

11시 30분 동아일보사 앞에서 열린 노제에서 정동익 동아투위 위원은 1975년 동아일보에서 강제 해직된 상황을 전했다. 정동익 위원은 “당시 2층 공무국을 걸어 잠그고 닷새간 단식농성을 하던 성유보가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정 위원은 이어 최근 동아일보의 세월호 참사에 대한 보도 행태를 지적하며 “이런 신문이 언론이 맞는가!”라고 호령했다.

강성남 언론노조 위원장은 “꼭 보셔야 할 일이 남아있는데 왜 이리 빨리 떠나셨는가”라며 “자유언론실천 의지를 짓밟은 동아일보의 사과를 받아야 하지 않는가. 자유언론이 춤추는 세상을 보셔야 하지 않는가. 민족의 통일도 보셔야 하지 않는가”라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강 위원장은 이어 “평생을 바친 선생님의 자유언론의 진군은 이제 후배들이 이어 받겠다”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북한 민족화해협의회는 11일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에 조전을 보내왔다. 북한 민족화해협의회는 “성유보 선생은 한 생을 언론인의 깨끗한 양심과 지조를 지켜 정의의 붓대. 불의에 맞서 왔으며 우리 민족이 하나되는 통일의 그날을 위해 헌신을 바쳐왔다. 그처럼 사회 민주화와 그날의 통일을 위해 투신해온 선생을 잃은 것은 우리 모두에게 커다란 아픔”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