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저균을 주한 미군기지에 잘못 보냈다. 이번 한 번뿐이지만 사과드린다.” 애시턴 카터 미국 국방장관은 5월30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제12차 아시아안보포럼에서 한민구 국방부 장관을 만나 이렇게 말했다. 최근 발생한 오산 미군기지 탄저균 실험 사태에 대한 사과였다. 하루 앞선 5월29일 한국 질병관리본부는 오산 미군기지에 탄저균이 잘못 배달됐다는 내용의 ‘탄저균 배달 사고’ 보도자료를 냈다.
그런데 이번 탄저균 배달이 과연 ‘단 한 번’ 일어난 ‘배달 사고’가 맞을까? 미국의 일방적 발표를 믿고 안도해도 되는 것일까?
ⓒ연합뉴스
6월1일 시민단체 회원들이 주한 미군 오산 공군기지 앞에서 ‘탄저균 배달’과 관련해 철저한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
지금까지의 상황으로만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우선 미국 국방부의 실험용 세균 관리 시스템 자체가 매우 부실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주한 미군은 지난 4월 말, 실험 목적의 탄저균 샘플을 미국 국방부에서 반입했다. 이른바 통합위협인식프로그램(ITRP)의 일환이었다. 주한 미군은 반입된 탄저균 샘플을 불활화(不活化), 즉 독성과 감염력을 잃은, 사실상 ‘죽은 세균’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오산 공군기지의 세균 실험실에서는 지난 5월21일부터 이 탄저균 샘플로 관련 작업을 진행했다. 그런데 실험에 돌입한 지 6일 만인 5월27일 미국 국방부에서 돌연 해당 샘플이 ‘살아 있는 탄저균’일 수 있으니 폐기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실험실 관계자들이 탄저균에 이미 노출된 뒤였다. 주한 미군 당국은 즉시 이들에게 탄저균 백신을 접종하고 격리했다고 밝혔다. 미국 측 발표에 따르면 주한 미군 소속 연구자 22명이 탄저균에 노출됐다.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살아 있는 탄저균’을 ‘불활화된 탄저균’이라며 제3국의 미군기지로 보낼 만큼 미국 국방부의 세균 관리 시스템이 부실하다는 방증이다.
더욱이 미국 국방부의 관련 발표에 대한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미국 국방부는 당초 탄저균 배달 사고 지역을 한국의 오산기지 등 10곳이라고 주장했다가 추가 조사를 마친 6월3일에는 51곳으로 수정 발표했다. 당초 사건을 축소하려 했거나 사고 내역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이런데도 ‘단 한 번 일어난 배달 사고’라는 미국 국방장관의 주장을 신뢰할 수 있겠는가. <시사IN>이 몇 가지 의문점을 짚어보았다.
1. 단순 ‘배달 사고’인가
충격적이면서도 어이없는 사실은, 미국 국방부가 해외 주요 군사시설에 탄저균 샘플을 보낸 방법이다. 민간 택배회사(페덱스)를 통해 배송했다. 미국 하원 국토안보위의 피터 킹 의원은 “미국 전역과 한국에까지 탄저균을 페덱스 편으로 보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라며 국방부를 질타했다.
<시사IN>이 입수한 ‘주피터 프로젝트’ 관련 문서에 따르면, 한국에는 세균 실험을 주도하는 연구소가 3곳 있다. |
국내 한 군사 전문가는 “백보 양보해서 민간 세균연구소라면 택배업체를 통해 샘플을 배송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 국방부가 그렇게 했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민간 택배회사가 1급 병원체 표본을 군 시설에 배달하는 것은 미국에서도 법으로 금지된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문제의 탄저균 샘플은 어떤 경로를 거쳐 오산기지로 반입된 것일까? 샘플의 탄저균이 ‘살아 있다’는 것은 어떻게 발견되었을까? 최초의 배양처는 미국 국방부 산하의 ‘더그웨이 생물화학병기 실험실’이다. 이 실험실은 미국 서부 유타 주 사막지대에 위치한 미군 생물화학무기 연구의 본산으로, 탄저균 등 각종 독성 세균 샘플을 배양해 군사 목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주된 임무다.
미국 국방부와 미국 언론 보도를 종합하면, 더그웨이 생물화학병기 실험실은 지난 4월30일 미국 동부지역 메릴랜드 주의 애버딘 연구소(육군 세균실험장)로 탄저균을 발송했다. 육군 애버딘 연구소는 탄저균을 방사선으로 처리해 죽인(불활화한) 다음 캘리포니아·텍사스·위스콘신·테네시·버지니아·메릴랜드·델라웨어·뉴욕·뉴저지 등지에 있는 민간 세균실험실에 탁송업체를 통해 샘플을 보냈다. 그런데 메릴랜드 주의 민간 연구소 측이 배송받은 샘플에 살아 있는 탄저균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발견(연구진 4명 노출)하고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신고했다. CDC는 샘플의 발송처를 거슬러 올라가는 조사를 통해 탄저균 샘플의 최초 배양처가 미군 더그웨이 실험실이라는 점을 파악하고 미국 국방부에 통보했다. 이후 미국 국방부가 ‘탄저균 오배송 사고’를 공식 발표한 것이다.
이 때문에 오산기지에 반입된 샘플에도 ‘살아 있는 탄저균’이 섞여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이 일었다. 미국 육군 애버딘 연구소에서 방사선 처리를 한 탄저균을 받은 민간 연구소에서 살아 있는 세균이 발견된 터라, 애버딘 연구소를 거치지 않고 더그웨이 실험실에서 직접 배송받은 것으로 알려진 오산의 샘플에는 살아 있는 탄저균이 들어 있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이런 의혹은 미국 언론을 통해 제기되었다.
그러나 주한 미군 측이 한국 질병관리본부에 통보한 내용에 따르면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5월27일 미국 국방부로부터 탄저균 샘플이 생존해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 폐기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래서 ‘탄저균의 생존’ 여부에 대한 진위 확인 없이 무조건 폐기했다.”
ⓒ연합뉴스
탄저균이 배달된 오산 미군기지. |
2. 탄저균 배송은 이번 한 번뿐이다?
<시사IN> 취재에 따르면 ‘단 한 번’이라는 미국 국방부의 주장은 임기응변용 둘러치기일 가능성이 높다. 주한 미군기지에서 세균전과 관련된 각종 실험을 실시할 수 있는 미군의 프로젝트가 일찌감치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군 측의 일명 ‘주피터 프로젝트’에 따르면, 미국은 생물화학전 작전 및 대응 계획에 따라 오래전부터 한국에서 세균 실험을 진행해왔다. 이번 사건 역시 단순한 ‘배송 사고’라기보다 미군 측의 일상적 세균 실험의 일환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오산 미국 공군기지 측은 17년 전인 1998년에 세균실험실을 설치하고 화생방 방호중대를 창설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곳의 세균전 실험 내막은 2013년 처음으로 공개됐다. 미국 육군 연구개발 및 공병사령부 산하 에지우드 화학생물학센터(ECBC)의 ‘주한미군 통합위협인식(주피터)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시사IN>이 군사 전문가를 통해 입수한 ‘주피터 프로젝트’ 관련 문서는 23쪽짜리 파워포인트 자료다.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이미 2007년을 전후해서, 미군 ‘생화학방어합동참모국’을 중심으로 북한의 생물화학 공격 등에 대비해 주한 미군의 방어 능력을 향상시킬 방안을 모색해왔다. 이 프로젝트를 총괄한 ECBC의 피터 이매뉴얼 박사는, 한반도에서 주피터 프로젝트의 핵심은 생물학 분석 능력(BICS)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50개에서 100개에 이르는 병원성 세균 샘플을 가져다 길게는 24시간, 짧게는 4~6시간 내에 그 독소를 분석해내는 것이 핵심 목표다. 북한이 생물화학전을 감행하는 경우, 이를 조기에 감지하고 대응하는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서인 듯하다.
이매뉴얼 박사의 발표 자료에 따르면, 한국에는 탄저균 등 세균 실험을 주도하는 연구소가 모두 3곳 있다. 서울 용산의 제65의무연대와 경기도 오산의 51의무지원대, 그리고 지명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은 미국 육군공중보건국 산하 환경실험실(지도상 군산 미군기지 추정) 등이다.
피터 박사는 2013년 6월4일 미국 방산산업협회가 주최한 ‘화학생물학 방어계획 포럼’에서, 한국인으로서는 큰 충격을 느낄 수밖에 없는 내용을 발표했다. 주피터 프로젝트의 ‘독소 분석 1단계 실험 대상’이 “탄저균과 보툴리눔 에이(A)형 독소”라는 것이다. 보툴리눔은 ‘공포의 세균’인 탄저균보다 10만 배 이상의 파괴력을 지닌 독성 병원균이다.
미국 육군 연구개발 및 공병사령부 산하 에지우드 화학생물학센터가 2014년 3월7일자로 자체 웹사이트에 올린 또 다른 자료에 따르면 “2013년 여름부터 2015년 여름까지 2년 동안 오산 공군기지에 전문 인력을 주기적으로 파견해 주한 미군 병사를 위한 개별적인 세균전 대응 훈련을 진행해오고 있으며, 이를 위해 신형 생물정찰장비를 보내주었다”라고 기재돼 있다.
이미 최신 장비가 도입되어 있는 한국 미군기지에서 관련 병사들이 해당 샘플을 가장 빠른 시간 안에 분석해 대응하는 것이 주피터 프로젝트의 핵심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프로젝트가 가능하려면 당연히 많은 맹독성 병원균 샘플들이 한국으로 보내져야 한다. 그동안 한국 정부나 국민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탄저균을 비롯한 수많은 생물화학 샘플들이 주한 미군 측에 전달되었으리라는 의혹이 이는 대목이다.
ⓒ연합뉴스
5월21일 부산에서 보호복을 착용한 요원들이 탄저균 오염을 가정해 제독 훈련을 실시했다. |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주한 미군의 ‘주피터 프로젝트’와 세균 실험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묻자 “주한 미군이 기지 내에 실험실을 운영하며 비활성 탄저균 등을 실험한다는 사실은 소문으로 들은 바 있지만 그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또는 한국 정부의 묵인 아래 미군이 유사시 한국인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는 독성 병원균을 국내에 반입해왔다는 의혹이 이는 대목이다.
3. 오산기지 주변은 안전한가
미국 정부 발표에 따르면 이번 사건으로 탄저균에 노출된 사람은 모두 26명이다. 메릴랜드 주 민간 연구소 관계자 4명과 주한 미군 오산기지 실험실 관계자 22명이다. 미군 당국은 “노출된 이들에게 즉시 탄저균 백신과 항생제를 투여한 뒤 격리 조치했는데 아직까지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탄저균은 잠복기가 길게는 60일에 이르기 때문에 속단하기는 이르다. 탄저균에 노출되면 잠복기에는 감기와 유사한 증상이 나타난다. 이어서 폐에 울혈이 생기고, 피부에는 가려움증과 부스럼 등이 나타났다가 악성 고름으로 발전한다. 탄저균의 치사율은 무려 95%다.
이번에 오산기지로 보내진 ‘시베리아 탄저균’은 ‘죽음의 수소폭탄’으로 알려져 있다. 100㎏이 투하되면 3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살상력을 지녔다. 이 균의 포자가 공기 중에 퍼지면 치명적이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 정부기관과 언론사에 테러리스트가 보낸 탄저균이 우편봉투에 담겨 배달되었는데, 이를 호흡한 5명이 목숨을 잃었다.
역사상 탄저균 실험실에서 유출된 포자로 가장 큰 참극이 일어난 곳은 옛 소련이다. 1979년 모스크바 동남쪽 150㎞ 지점에 자리한 작은 공업도시 스베르들롭스크(현 예카테린부르크) 지역에서 2개월 동안 약 2000명의 주민이 실험실에서 유출된 탄저균 포자로 인해 고열과 기침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사고 직후 소련 당국은 스베르들롭스크 시의 한 도축업자가 탄저병에 걸린 소를 도축해 암시장에 내다 팔면서 사고가 발생해 총 68명이 죽었다고 했지만, 진상은 13년이 지난 뒤인 1992년에야 드러났다. 당시 연구에 참여한 소련 생물화학자 켄 알리백 박사가 미국으로 망명해, 탄저균 실험 중 포자가 공기에 유출돼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바람에 근처 도자기 공장 직원을 포함해 스베르들롭스크 지역 주민 2000여 명이 사망했다고 폭로한 것이다.
이런 경험 때문인지 러시아 질병 전문가인 나탈리아 칼라니나는 한 러시아 언론에 “생물학무기의 세균을 이동시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오산 미군기지는 시베리아 탄저균에 오염됐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밝혔다.
주한 미군 측은 사고 직후 “오산기지 내 생물학 실험실은 잠정 폐쇄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주피터 프로젝트가 살아 있는 한 잠잠해지면 언제든지 실험은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
ⓒAP Photo
현미경으로 본 탄저균. 탄저균의 치사율은 무려 95%에 이른다. |
4. 국제법 위반 아닌가
이번 일을 계기로 미국이 탄저균 등 세균무기와 관련된 국제조약을 위반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미국도 가입한 생물무기금지협약(BWC) 제3조에는 “이 협약의 각 당사국은 제1조에 열거한 미생물과 세균, 독소, 무기, 설비 또는 수송 수단을 수령 대상자 여하를 막론하고 직접 또는 간접으로 양도하지 아니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번에 오산기지에 반입된 탄저균은 BWC가 금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세균무기다. 미국이 제3국인 한국으로 탄저균을 이전한 것은 조약 위반의 여지가 크다.
또 주한 미군은 유사시 북한의 생물화학무기에 대응한 방어용 세균 실험이라고 하지만 생물화학무기의 경우에는 공격용과 방어용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옛 소련에서 생물무기 프로그램을 다룬 바 있는 세르게이 포포프는 “방어용과 공격용 생물무기 프로그램의 최초 연구 단계는 같다”라고 강조한다. 방어용 실험에 사용되는 탄저균 역시 언제든 공격용으로 둔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1969년부터 생물무기 제조를 중단했다고 발표했지만, 그 이후에도 비밀리에 관련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는 의혹이 만연했다. 미국의 <핵과학자 협회보(Bulletin of the Atomic Scientists)>는 2003년 9·10월호에서 부시 행정부가 새로운 세균무기 개발에 착수했다고 보도해 파문을 일으켰다. 이 잡지는 미국이 자체적인 세균전 능력을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인체에 가장 치명적인 탄저균, 페스트균, 보툴리눔균 등을 조종·변형·실험할 수 있는 새로운 연구소를 건설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오산 미군기지도 그중 한 곳이 아닌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이번 사건 직후 많은 언론과 전문가들은 미군이 들여오는 모든 생물화학무기 및 물질에 대한 통제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평화네트워크 정욱식 대표는 “미국이 진정 국제규범을 중시하는 나라라면, 생물화학무기를 모두 폐기하고 비밀 프로그램을 중단하며 어떠한 형태로든 외부 이전을 중지하는 게 바람직하다. 미국 스스로 국제법을 무시하면서 다른 나라에게 강요하는 행태로는 미국의 이중성만 부각될 뿐이다”라고 말했다.
2015.06.12 정희상 전문기자 | [email protected]
(원문출처: 시사in Live 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23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