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 2014-09-18 12:18:00 |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 미술분과 편찬위원인 미술평론가
최열 선생이 신화가 된 이중섭을 방대한 자료에 근거해 정밀하게 추적한 『이중섭 평전』을 펴냈다.
이번 평전은 실체는 사라지고 환상만 남은 이중섭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철저한 사료 비판을 거쳐 실록으로 재구성한 역작이라는
호평을 받고 있다.
그간 미술사학자로서 연이어 주목 받는 저서를 내온 최열 선생의 논쟁적 화제작 『이중섭 평전』을
소개한다.
-편집자
※ 참고기사
[책과 삶]“신화와 전설이 된 이중섭은
이중섭이 아니다”
ㆍ5년 만에 ‘이중섭
평전’ 펴낸 미술평론가 최열 씨
미술평론가이자 근대미술사학자 최열씨(58)가 전체 932쪽, 주석만 70여쪽에 달하는 <이중섭 평전>(돌베개)을 내놨다. ‘신화가
된 화가, 그 진실을 찾아서’란 부제를 달고 있는 책은 천재화가, 불행한 삶을 살다간 고독한 예술가, 애절한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으로
회자되면서 어느 정도 왜곡되고 앞뒤가 맞지 않는 이중섭(1916~1956)의 삶을 철저한 고증으로 재조명했다. 또 한 번 취한 그림의 소재를 삶 전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그러면서도
새롭게 작품 속에 등장시킨 그의 예술세계를 조망한다.
▲미술평론가 최열씨는 5년여에
걸쳐 500여종의 문헌을 참고하며 932쪽에 달하는 역작 <이중섭 평전>을 내놨다.
| 권호욱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최씨는 “이중섭이
세상을 떠난 다음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이 만들어낸 이중섭 신화는 이중섭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가령 이중섭이 오산고보에 진학한 것은 민족정신을 추구하는 오산고보의 이념과 맞았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중섭은 평양 제2고등보통학교에 두 차례 연이어 낙방하고
난 뒤 외할아버지 이진태와 오산고보 설립자인 이승훈의 인연으로 오산고보에 진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도쿄 유학 시절 도쿄미술학교가 아닌 제국미술학교로, 뒤이어 문화학원으로 옮긴 까닭은 그가 민족정신이
투철하거나 관학파를 싫어하고 재야파를 선호하는 자유로운 기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유학을 갈 시기에
도쿄미술대학의 입학 규정이 까다로워져 상대적으로 입학이 쉬운 제국미술학교로 갔고, 부진한 성적으로 정학
처분을 받아 문화학원으로 옮긴 것이다.
“이중섭과 그의 그림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 미술작품을 꼽을 때마다 예외없이 앞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이중섭에
관한 숱한 이야기들이 얼마나 그의 실체에 닿아 있을까, 신화 속 주인공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이중섭의
삶은 어떤 것일까라는 물음표에서 이 평전을 쓰게 됐습니다.”
2010년 평전 작업에 착수한 뒤 그가 본 이중섭에 관한 주요 문헌은
500여종에 이른다. 문헌고증사학을 해온 그는 철저하게 자료를 병치해 보여주는 방식을 택했다. 고은, 구상, 그 외에
이중섭을 아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중섭에 대해 ‘그렇다’고
말해온 것들, 그 기록과 증언들을 최대한 노출시켰다. 같은
시기 이중섭에 대한 기록을 병치한 것이다. 그래서 평전은 실록에 가까워졌다. 책의 띠지에는 “이중섭 실록의 완성, 그것이 나의 목표다”라고 적혀 있다. 그는 “실록이라는 것은 왕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의 말을 기록하는
것”이라며 “독자들은 여러 말들을 비교하면서 판단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이중섭에 대해 기록하던 5년 동안 그에 관한 새로운 자료들이 ‘소포처럼’ 찾아왔다. 1953년 7월
부산에 머물 때 가까이 지낸 화가 문우식의 딸인 문소연은 이중섭에 관한 몇 가지 사실들을 저자에게 알려왔고
1953년 통영으로 이중섭을 초청한 공예가 유강렬의 유족들은 그가 유강렬에게 보낸 편지를 비롯해 귀중한 사진 자료가 있다는 것을 알려왔다. 저자는 “5년 사이에 이런 자료들이 눈에 띄었다는 것은 이중섭 선생이
알려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5년여의 작업 끝에 평전을 완성한 저자는 이중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서문에 적었다. “전쟁으로 상처받은 이들에게 필요한 건 황폐한 시절을 견뎌낼 만큼 순결한 영혼이었고 그 기준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이중섭이었다. 폭발하는 천재이자 맑은 영혼의 모습으로 부활한 이중섭은 순수의 상징이 되었다. 실상과 허상이 엉켜서 전설이 되고, 빛과 어둠이 섞여 신화가 되듯이
저 이중섭의 생애는 전설이 되었고 작품은 신화가 되었다.”
최열씨는 1972년
고등학교 1학년 때 현대화랑과 당시 덕수궁에 있었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연달아 이중섭의 작품 ‘소’를 봤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 “느낌이 매우 강했다. 젊은 시절에는 이중섭 같은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다. 물론 그때부터 이중섭의 평전을 쓰려 했던
것은 아니다. 작가가 아니라 미술평론가, 미술사학자의 길을
걷게 된 최씨는 50대 이후 권진규, 김환기, 박수근의 평전을 차례로 썼다. 이어 이중섭에 대한 집필을 시작했다.
그는 “이중섭
선생에 대해 쓰다보니 다른 작가들은 상대적으로 쉽게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이중섭만큼 논란이 많은 작가가 드물기 때문이다. 대중들은 높이 평가하지만 연구자들에게는 저평가된 작가, 1970년대부터
작품 진위 등 다양한 논란에 휩싸인 작가. 그는 “이중섭에
대한 논쟁은 학술 논쟁으로 이어지지 않고 법정으로 간다”며 “이는
전형적인 후진국 현상”이라고 말했다.
마침 책이 출간된 직후인 지난 6일은 이중섭이 사망한 날이고 16일은 이중섭이 태어난 날이다. 최씨는 평전을 들고 이중섭이 잠든 망우리 묘지에 다녀왔다. 무덤에
술 한 잔을 올린 그는 “하늘에서나마 행복을 누리시리라 믿는다고, 살아생전
문득문득 들르겠노라고 약속하고 왔다”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내 책의 오류가 많이 발견되길 바란다”며 “그러면서 이중섭의 실제와 더 가까워지고 그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2014-09-12>
경향신문
☞기사원문: [책과
삶]“신화와 전설이 된 이중섭은 이중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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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중섭, 그 민낯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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