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2014-10-27 15:00:47

ㆍ친일파 청산 ‘반민특위’… 끈질기게 방해하는 이승만… 의원 테러 모의까지

■ 남한 정부의 수립과 일제잔재 청산 문제


일제에서 해방된 우리 민족 앞에 다가온 가장 절실한 과제는 일제 잔재의 청산이었다. 그러기에 ‘민족정기’와 ‘친일파 민족반역자 처단’이란 외침이 각계에서 분출되었다. 실제로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에서 친일파 숙청법 문제가 거론되었고, 미군정 당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입법의원은 1947년 7월2일 친일파 숙청법(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을 통과시킨 바도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의 인준 거부로 그 시행을 보지 못한 채 남한 정부의 출범을 맞게 된다.


모스크바 3상 회의 결정에 따라 설치된 미소공동위원회가 조선에서의 임시(단일)정부 수립 등 현안 해결에 실패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으로 가져간다. 그에 따라 유엔 총회는 1947년 11월14일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미국 안을 통과시킨다. 당시 반대론도 만만치 않았다. 즉, 그런 결정은 전후처리 문제에 대한 관여를 금지한 유엔헌장 107조 및 내정 불간섭을 명시한 위 헌장 제7조에 위반된다는 것이었다.

이어서 유엔임시한국위원단이 서울에 들어와(1948년 1월8일) 입북을 시도하였으나 북조선인민위원회와 소련군 당국이 이에 반대한다. 그러자 미국은 유엔소총회에서 ‘가능한 지역 내에서의 선거’를 한다는 결의를 이끌어낸 다음, 남한만의 국회의원 선거(소위 ‘5·10 선거’)에 이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를 출범시킨다.


일러스트 | 박건웅

■ 방해와 저항을 무릅쓴 ‘반민족행위처벌법’

국회는 대한민국 헌법에 친일파 처단 입법의 근거조항을 마련해 놓았다. 즉 헌법 제101조에는 ‘단기 4278년(1945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명문이 있었다. 하지만 1948년 9월 국회에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의결, 통과될 때까지는 적지 않은 난관을 거쳐야 했다. 국회에서 김웅진 의원이 “8·15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행위자를 처벌함으로써 친일분자들이 신생 한국의 공직에까지 진입하는 것을 막아야 된다”는 취지로 ‘반민족행위처벌법 기초 특별위원회 구성안’ 통과의 시급성을 역설했을 때도 일부 의원은 안정과 경제 타령을 앞세워 반대론을 폈다.


여러 이견에도 불구하고 국회는 압도적 다수 의원의 찬성으로 위 김 의원의 동의안을 통과시키고 특위를 구성, 법안의 기초작업에 들어갔다. 그러자 지난날의 친일세력과 이에 동조하는 자들은 반민법 제정에 적극적인 의원들을 공산당으로 몰아붙이고 친일파를 소급법으로 처단하는 것은 공산당을 즐겁게 하는 처사라는 등의 용공론도 내세웠다. 여러 곡절 끝에 그해 9월7일 국회 본회의는 재석 141, 가 103, 부 6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통과시켰다.

위 반민법은 친일 반민족행위에 해당하는 범죄의 정의와 유형과 그에 따른 형벌을 정하고, 특별조사위원회와 특별검찰부 그리고 특별재판부의 구성과 직무에 관해 규정하는 등 총 29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특조위원장에는 김상덕 의원, 특검부장에는 권승렬 법무장관, 특재부장에는 김병노 대법원장이 임명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시기상조론과 훈련된 인재의 필요 등을 이유로 한때 이 법을 비토할 기미를 보였고 실제로 국무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거부 의결까지 했으나 당시 정부 측의 중요 정책이 걸린 법안의 부결을 염려해 뒤늦게 마음 내키지 않는 공포를 하였다.


■ 이승만의 끈질긴 방해, 경찰의 소장파 의원 암살 기도


그래놓고도 정부는 반민법 반대 집회를 후원하였다. 반민법 공포 직후 서울운동장에서는 ‘반공구국총궐기대회’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반민법 반대 집회가 열렸는데 이범석 국무총리가 나와서 축사까지 했다. “이런 민족 분열의 법률을 만든 것은 국회 안에 있는 공산당 프락치의 소행이다”라는 삐라가 살포되기도 했다. 거기에다 그해 10월의 여수·순천반란사건, 국회 보수세력과 소장파 의원들 사이의 입장 대립 등으로 반민특위의 활동은 초반부터 순조롭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이승만 대통령은 특위 활동을 방해하다 못해 ‘특위가 사람을 마음대로 잡아다 고문을 못하게’ 반민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담화까지 발표했다. 이에 대해 국회와 반민특위가 강하게 반발하는 가운데 정부는 심지어 친일파 중 악질행위자만 처벌 대상으로 한정하고, 특별검찰부를 대검찰청 소속으로 하며, 특별재판관과 특별검찰관 등의 임명권을 대통령이 갖는다는 등의 반민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국회는 물론 이 개정안을 단숨에 부결시켜 버린다.


반민특위에 대한 저항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일제의 경찰 출신으로 미군정 이래 경찰 고위직에 있는 자들이 반민법 제정 단계부터 강경파로 활약했던 소장파 의원들을 제거하기 위해 백민태라는 테러리스트를 고용한다. 그리고 처단 대상자 15명의 명단을 그에게 넘겨준다. 그런데 백민태는 과거 중국에서 항일 테러활동을 한 적도 있는 사람이어서 지면이 있는 국회의원에게 이와 같은 테러음모를 제보했다. 이에 따라 수도경찰청 전 수사과장 노덕술, 당시 수사과장 최란수, 사찰과 부과장 홍택희 3인이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반민특위 특별 재판부 모습.

■ 검거된 반민자의 면면과 법정 태도


런 악조건 속에서도 반민특위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특위는 여러 자료와 신고 투서 등을 통해 7000여명에 달하는 친일부역자의 죄상을 파악했고, 특경대가 주요 인물의 검거에 나섰다. 1949년 1월8일 화신재벌의 총수 박흥식의 검거를 시발로 관동군 촉탁 이종영, 일본군에 비행기를 헌납한 방의석, 3·1운동 때 33인의 한 사람이던 최린, 창씨개명에 앞장선 친일 변호사 이승우, 일경 경시 출신으로 도지사를 지낸 이성근, 중추원 부의장까지 역임한 거물 박중양 등이 연달아 체포되었다. 이어서 중추원 참의와 만주국 명예총영사를 지낸 사업가 김연수, 일제 고등계 형사로서 충견 노릇을 한 노덕술, 친일 변호사 임창화 등이 검거되었다. 이 밖에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 소설가 이광수,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이자 밀정이던 배정자, 황국신민서사를 지은 뒤 도지사를 지낸 김대우 등의 이름도 등장한다. 국외로 도피해 체포를 면한 자도 있었다.


특별조사위원회가 조사한 피의자는 모두 688명으로 집계되었으나 그중 제대로 처벌을 받은 자는 뒤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재판에 회부된 자 중 지명도가 있는 몇 사람의 사례를 잠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특경대의 검거 제1호가 된 박흥식은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이사를 지내면서 친일을 한 자로, 그에 대한 특검의 조사기록은 무려 6000쪽에 달했으며 기소장도 매우 장문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재판에서 그는 사실을 적당히 흐리고 넘어가는 수법을 썼다.

- 미나미 일본 총독이 조선에서 돌아갈 때 ‘잊지 못할 자부(慈父)’라고 그를 찬양한 담화가 신문에 실려 있는데?


“이 역시 책임을 지겠으나 기자가 적당히 만든 담화이다.”


비행기회사 설립에 대해서도 “공장은 완성되어 가고 있었으나 생산된 비행기는 시작기 1대뿐이었다”고 답변하고, “나는 친일을 하기는커녕 나대로 소신껏 조선인의 긍지를 지키며 내 일에 열중해 왔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자 특검 검찰부 전원이 사의 표명을 하는 파문이 일었다. 더구나 그는 뒤에서 보듯이 반민특위가 와해될 무렵 ‘증거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도산 안창호를 도와준 사실이 유리하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돌았다.

■ 참회형과 반발형, 모두 병보석

최린은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데 무슨 영문으로 반민법의 심판을 받는 법정에 서게 되었을까. 젊은 시절 민족운동에 참여했던 그는 3·1운동 때 체포되어 3년 동안이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런 그가 훗날 중추원 참의, 매일신보 사장 등의 자리에 있으면서 총독정치에 협력하고 천도교 명의로 비행기 1대를 헌납하는 등 적극적인 부일 협력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법정에서 “나의 과거 행동은 진정 잘못된 줄 통감하며 민족 앞에 무릎을 꿇는다”며 참회의 빛을 보였다. 재판부는 그를 병보석으로 풀어주었으며 나아가 검찰관의 공소 취하로 재판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반성은커녕 재판장에게 대든 피고인도 있었다. 3·1운동에 연관되었다가 일본 경찰의 정보원으로 훼절해 일제에 적극 협력한 이종영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일본 관동군토공군사령부 고문으로 일본군에 협력한 그는 해방 후 대한일보 사장으로 있으면서 ‘반민법은 망민법’이라는 사설을 실었는가 하면, 서울운동장에서 ‘반공대회’를 열고 반민특위를 공격하기도 했다. 재판장이 “검찰관이 기소한 내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그는 “사실심리가 무엇이냐? 기소사실 내용부터 부당하다”고 반항했으며, “묻는 말에만 순서대로 답변하라”고 하자 “순서대로라니, 공산당을 토벌하였다고 재판하는 이 법정에서는 나는 재판을 못 받겠다”며 대들었다. 그 역시 병보석으로 석방됐고 처벌받은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국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추상같지 못하고 뒤가 물렀던 반민법 재판이 의아스럽게도 보인다.

<2014-10-26>경향신문

기사원문: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3) 반민특위 사건 (上)

※관련기사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2) 여운형 암살사건 (下)

[의혹과 진실 - 한승헌의 재판으로 본 현대사](1) 여운형 암살사건 (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