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2014-10-31 16:00:15


전봉준, 혁명의 기록


이이화 지음/생각정원·1만4000원

 

동학농민전쟁과 일본


나카쓰카 아키라·이노우에 가쓰오·박맹수 지음


모시는사람들·1만3000원

오늘 우리에게 120년 전의 전봉준과 동학농민혁명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육십갑자를 두번 돌아 다시 제자리에 돌아온 건 아닐까. 주변 열강들은 새삼 제국주의적 마각을 드러내고 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남북으로 갈리고 동서로 나뉘어 서로 물어뜯기에 여념 없다. 위정자들은 가진 자들 편에 붙어 제 잇속 차리기 바쁘고, 국가안보를 외세의 힘으로 해결하려 하며, 내부 분열을 부추겨 정권 연장을 꾀한다.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구한말 당시와 비슷하다는 걱정이 많은 요즘, 전봉준과 동학혁명을 되새기는 책 두권이 나왔다.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이 쓴 <전봉준, 혁명의 기록>은 수십년에 걸친 현장 답사와 자료 조사 끝에 ‘증류’한 맑은 액체 같은 책이다. 수식을 배제한 담백한 문장으로 전봉준의 생애를 되살려낸 평전이자, 동학혁명의 처음과 끝을 기록한 역사서다. 역적으로 몰려 금기시된 전봉준과 동학혁명은 신화로 구전되며 윤색이 더해진 터였다. 지은이는 주민들의 증언이나 동학군이 남긴 자료뿐 아니라 조선 관군 및 일본군의 기록을 뒤져 사실을 좇았다. 사실에 관한한 보수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철저하다. 지금까지 나온 동학혁명을 다룬 책 가운데 가장 사실에 가까운 책이라고 감히 평할 수 있겠다.



전봉준의 생전 모습을 보여주는 이 유일한 사진은 전북 순창에서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일본 사진가 무라카미 덴신이 일본 영사의 허락을 받아 찍은 것이다. 생각정원 제공

지은이는 전봉준이 “싸움패인 줄만 알았더니 (…) 근본으로는 아주 따뜻하고 부드러운 평화주의자였”다고 말한다. “부자에게 재물을 울려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적에도 윽박지르지 않고 설득을 펴서 동의를 구했으며 (…) 부정한 높은 벼슬아치와 수령들에게 칼을 들어 내리치기보다 백성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꾸짖었”다. 남원 일대에서 활동했던 농민군 지도자 김개남의 부하들이 양반들의 씨를 말리자며 “불알을 까고”, 양반집 처녀와 늑혼(강제로 맺는 혼인)을 하는 등 과격했던 것과 달랐다. 전봉준은 민가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 개와 닭고기를 먹지 못하게 했으며, 밥을 얻어먹으면 꼭 사례를 했다.

농민군이 전봉준을 신처럼 떠받들게 된 것은 전봉준 자신이 신비화 전략을 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리 총알을 손에 쥐고 있다가 빈총을 쏘게 한 뒤 재빨리 잡는 시늉을 해서 손을 펴 보여주는 식으로 불사신 행세를 했다. 자신을 믿게 해 농민군의 사기를 올리려는 의도였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원통한 대목은 역시 마지막이 된 공주 전투다. 조선 관군이 일본군의 지휘를 받아 자국 백성인 농민군에게 총질을 해대는 장면은 다시 봐도 아프다. 공주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전봉준은 충청감사 박제순에게 간곡한 편지를 보낸다. “일본의 도둑들이 군대를 움직여 우리 임금을 핍박하고 우리 백성을 걱정스럽게 하니 어찌 참는단 말인가. 임진왜란의 원수를 초야에 있는 필부나 어린애까지도 그 울분을 참지 못하고 기억하고 있는데 하물며 각하는 조정의 녹을 먹는 충신이니 우리 무지렁이들보다 몇 배 더 하지 않겠는가.”

녹두장군 신화와 윤색 걷어내고


따뜻한 평화주의자 모습 오롯이


일본 제국주의 맞선 2차 봉기 등

학혁명 사실에 가장 가깝게 담아


역사 부인하는 이들이여 똑똑히 보라

하지만 박제순은 충신이 아니었다. 나중에 을사오적의 하나로 오명을 남긴 박제순은 자신을 부하처럼 부리는 일본공사 이노우에의 지시를 충실히 따라 농민군 타도에 앞장선다. 농민군은 1만명이 넘었으나 압도적인 화력을 앞세운 일본군과 관군에게 통한의 패배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지은이는 전봉준이 전북 순창에서 옛 부하의 배신으로 붙잡히는 과정과, 친일의 앞잡이로 활용하려는 일본의 회유를 물리치고 당당히 죽음을 택하는 마지막 모습을 차분한 어조로 전한다.



<오사카매일신문>은 전봉준의 생전 모습을 보여주는 유일한 사진을 토대로 삽화를 그려 ‘압송당하는 전봉준 장군’이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실었다. 생각정원 제공

오늘의 눈으로 동학혁명을 보면, 신분제 철폐 등을 주장했던 1차 봉기보다 항일투쟁을 선언했던 2차 봉기에 더 눈길이 간다. 농민군의 1차 봉기에 겁을 먹은 민씨 정권의 실권자 민영준은 청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했고, 청나라의 개입을 확인한 일본은 한쪽이 조선에 진출하면 일본 군대도 함께 진출한다는 톈진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파견한다. 일본군은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경복궁을 점령해 고종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군사지휘권을 접수해 사실상 식민지로 만든다. 이어 먼저 와 있던 청나라군을 선제 공격해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일본이 겉으로 내세운 명분은 (청나라로부터) 조선의 자주화였지만, 속내는 조선 침략이었음은 물론이다.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인 나카쓰카 아키라 나라여자대학 명예교수 등이 쓴 <동학농민전쟁과 일본>은 당시 일본의 내밀한 전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나카쓰카 교수는 이 책에서 일본군이 청나라와 전쟁을 한다면서 처음 무력공격한 대상이 청나라 군대가 아니라 조선 왕궁이었다는 점이 일본의 조선 침략 의도를 잘 말해준다고 폭로한다.

일본 대본영 참모였던 도조 히데노리 육군소좌(1941년 태평양전쟁 개전 당시 수상이었던 도조 히데키의 아버지)는 청일전쟁사 <정청용병 격벽청담>이라는 책에서 “조선정부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곤혼스럽고 어려운 질문으로 추궁하고, 그 대답할 기간을 짧게 주고 확답을 재차 요구해서, 불만족스러운 답신을 보내거나 혹은 대답하지 못하면 무력으로 협박해서 실행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했는데, 이 모략은 그대로 실행됐다. 이틀의 기한을 주고 “조선은 독립국이냐”고 물은 것이다. 조선은 고심 끝에 “조선은 자주 국가다”라고 답했는데, 일본은 이를 빌미로 조선에 청나라 군대의 격퇴를 요구했고, 조선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며 왕궁을 포위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국의 뉴라이트 학자들은 일본의 식민지배로 우리나라 경제가 발전했다는둥 교묘한 논리를 개발해 교과서에 싣는 등 이적행위를 자행하고 있다. 이들에게 전봉준의 육성을 들려주면 양심이 돌아올까. “기실은 조선끼리 서로 싸우자 하는 바 아니거늘 이와 같이 골육이 서로 싸우니 어찌 애달프지 아니하리오. (…) 일변 생각건대 조선 사람끼리도 도는 다르나 척왜와 척화의 뜻은 같은지라, 두어 글자로 의혹을 풀어 알게 하노니 각기 들어보고 충군 우국의 마음이 있거든 곧 의리로 돌아오면 상의해 같이 척왜·척화해, 조선이 왜국이 되지 아니케 하고 같은 마음으로 힘을 합해서 대사를 이루게 하올세라.” 공주에서 후퇴한 뒤 경군(서울 주둔 군사)과 영병(감영 소속 군사), 이교(하급 벼슬아치) 따위에게 애국심을 호소한 글이다.

이재성 기자 [email protected]




역사학자 이이화. 사진 탁기형 선임기자 [email protected]
‘…

혁명의 기록’ 펴낸 역사학자 이이화

“전봉준의 자주와 평등 기치는 오늘도 유효”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다닐 때 나병식이나 윤구병 등 <뿌리깊은 나무> 사람들을 만나면 ‘응 정신병원 다니는구만’ 뭐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전두환이 와서 거드름 피우는 것도 보기 싫었고. 그래서 그만두고 혼자 글을 썼죠.”

역사학자 이이화(사진) 선생은 혼자 글을 쓰다 시간만 되면 가방을 싸들고 동학농민혁명 현장을 답사했다고 말했다. 문학을 접고 역사공부로 방향을 튼 뒤 만난 전봉준에게 자꾸 마음이 끌렸다. 전봉준의 고향인 전북 고창군 덕정면 죽림리 당촌마을의 전씨 집성촌은 흔적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다 1994년 ‘동학농민전쟁 100주년 기념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006년 <녹두장군 전봉준>이란 이름으로 책을 냈는데, 출판사가 망해버려 금세 절판됐다. 이번에 낸 <전봉준, 혁명의 기록>은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맞아 그 책을 “대폭 개정”한 것이다.

그는 동학혁명이 일어난 1894년이 한국 현대사의 뿌리라고 말했다. 농민군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인 갑오경장의 해이자, 일제 야욕의 신호탄인 청일전쟁의 해이며, 무엇보다 분단의 원흉이 된 식민지화의 원년이기 때문이다.

이 선생은 동학혁명을 ‘평등과 자주’로 함축했다. 신분제 철폐와 농지개혁 등이 평등의 좌표라면, 척양척왜는 자주의 구호다. 평등과 자주라는 동학군의 기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동학혁명 당시 지주제가 있었다면 지금은 재벌을 비롯한 상위 10%가 소득의 절반을 차지해요. 요즘 은행장들 연봉이 몇십억원입니다. 비정규직 월급은 100만원밖에 안 돼요. 격차가 엄청납니다. 그런데도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자고 하면 경영이 어쩌고 딴소리를 합니다.”

부자 감세를 유지하는 바람에 텅 빈 곳간을 서민들의 호주머니를 터는 담뱃값·주민세 인상으로 채우려는 박근혜 정부의 행위는 구한말 조선 조정의 가렴주구와 다를 바 없다고 그는 일갈했다. 전시작전권 전환을 포기하고 미국에 조국의 운명을 맡겨버린 행위는 청나라 군대를 불러들였던 민씨 정권과 닮았다.

그는 요즘 서울 남산에 전봉준 동상을 세우려 동분서주하고 있다. 그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게 절실하다는 판단에서다. “허균의 개혁사상이 정약용을 비롯한 실학사상으로 이어졌어요. 정약용은 신분제를 철폐하기 위해 모두 양반이 되는 사회를 만들자고 했고, 박지원은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할 정도였죠. 그 정신을 잇는 게 바로 전봉준입니다.”

전봉준과 농민군은 1차 봉기에 성공한 뒤 전라감사 김학진과 타협해 집강소를 설치하고 이 지역에서 군대와 세금을 관장하는 실질적인 통치를 했다. 외국 군대를 불러들이지 않고 농민군의 요구대로 개혁정부를 세웠다면, 120년 뒤 우리 역사는 어떻게 변했을까.

이재성 기자

<2014-10-31> 한겨레

☞기사원문: 너희는 애국자인가, 전봉준이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