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2015-01-28 22:47:43



친일파들의 공적을 찬양하는 공덕비가 전국에 수백여개 있습니다.


이 공덕비를 철거하거나, 철거하지는 않더라도 비석 주인공의 친일행각을 기록한 이른바 ‘단죄비’를 그 공덕비 옆에 세우는 움직임이 7~8년 전부터 시작됐습니다.


아직까지 10여건 정도 밖에 하지는 못했는데요, 충복 보은 속리산에서 철거 촉구 캠페인이 열린다고 해서 다녀왔습니다.

조아라 피디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친일파 방인혁의 공덕비입니다.

대표적인 친일파 기업인 방인혁은 일찍이 일제와 가깝게 지내며 특히 충북지역에 막강한 영향력을 휘둘렀습니다.

충북 청주군 축산조합장이던 1919년 당시, 3.1운동 확산 저지 운동을 하는가 하면 친일 공로를 인정받아 1921년 서울의 조선총독부 관료로 발탁됐습니다.

방인혁은 1921년 총독부 기관지 <조선>에 “조선의 제도는 병합 이전은 논의할 가지가 없다”는 글을 게재하기도 했습니다.

방인혁은 1920년대 속리산 법주사안에 있는 암자 수정암 건립에 자금을 보탰고, 그 공로를 기리는 의미로 비석이 세워졌습니다.

지난해 6월부터 민족문제연구소 충북지부는 충북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에 있는 방인혁 공덕비 철거운동을 벌여왔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어제 법주사 앞에서 이 공덕비를 철거하라는 시위를 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법주사가 지난달 비석을 비공개로 철거했다는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바로 이곳이 공덕비가 있던 자리입니다. 지금 보시는데로 이미 철거된 상태입니다.

[박한용 /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
“(친일파 공덕비가) 사회적 의제가 된 것이 최근의 일입니다. 1997~8년도부터 지역의 연구소 회원들이 지역의 공덕비를 보고 ‘문제가 있지 않느냐?’라는 제기가 있어서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무조건 철폐주의는 아닙니다.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들이 어떤 식으로 주입됐는가? 하나의 존경의 대상으로, 역사의 아픈 현장, 그런 점에서 때로는 보존돼야 할 필요도 있다고 봅니다."

1904년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통역관으로 일제와 인연을 맺고, 일제 시대에는 조선총독부 고위관료를 지내며 항일운동 저지하는 등 일제에 충성했던 이범익은 1929년부터 1935년까지 강원도지사를 지냈습니다.

이범익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는 강원도 춘천과 정선에는 이범익의 친일 행각을 알리는 단죄비가 각각 설치돼 있습니다(춘천 2013년 8월 15일 정선 2013.3.1일).

애국 계몽활동으로 투옥됐다가 (105인 사건) 친일 전향을 조건으로 석방돼 (1915년) 일제 침약과 식민 통치의 당위를 앞장서 주장한 대표적인 친일파 윤치호.

전북 진안의 부귀초등학교에 있던 윤치호 공덕비는 2009년에 철거됐고 2013년 8월 그의 친일행적을 알리는 안내현판이 설치됐습니다.

친일파 공덕비 중 철거됐거나, 철거되지는 않았더라도 이른바 ‘단죄비’가 설치된 경우는 전국에 약 10여개로, 전체 공덕비 수에 비하면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박한용 /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대상자들이나 또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지 않더라도 유보되거나 보류된 사람들이 있어요. 다시 추가로 (친일 행적이) 드러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을 포함하면 아마 최소한 500여건은 되지 않겠는가? 추정치입니다."

법주사 인근의 청주시만 보더라도 주차장 앞과 학교에서 친일파를 기리는 비석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박한용 / 민족문제연구소 교육홍보실장]
“심각한 침해행위가 있단 말이죠. 친일행적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한민국에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드는 거잖아요. 이것은 뭐냐면 또 한번의 역사 왜곡, 다른 말로 하면 역사 범죄의 재구성이에요.

과거 행적을 은폐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을 미래의 한국 사회 모범으로서 재교육시킨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범죄라는 것이죠. 범죄의 재구성이니까 이런 것은 막아야 하지 않느냐."

국민TV 뉴스 조아라입니다.

<2015-01-27> 국민TV뉴스

기사원문: 속리산 ‘친일파 공덕비’, 철거운동 시작되자 슬그머니 사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