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문제연구소 | 2015-03-03 18:37:07 |
[유해발굴 현장 설명회] 유해와 유품, 기록과 증언 뒷받침 해
한국전쟁기 대전 산내 민간인 학살현장에 대해 민간차원에서 일주일간 진행하였던 유해발굴이 마무리되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하 조사단)과 '한국전쟁기 대전 산내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 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동대책위)는 3월 1일 오전 11시 30분에 유해 발굴 현장(동구 낭월동 13번지 일대)에서 유해발굴 결과에 대한 현장설명회를 개최했다.
▲ 발굴조사단은 한국전쟁기 대전 산내 민간인 학살현장에 대한 민간차원의 유해발굴을 마무리하고 현장설명회를 개최했다. | |
ⓒ 임재근 |
발굴결과에 대한 현장설명에 나선 박선주 발굴단장(충북대학교 명예교수)은 "대전 산내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은 7000여 명에 달할 것으로 알려졌지만,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규명과 신원을 확인한 희생자 수는 493명에 불과했다"며 "2007년에 있었던 진실화해위원회의 유해발굴에서는 34구의 유해만 발굴했을 뿐, 가장 많은 유해가 매장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발굴을 추진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유해발굴 지역은 1950년 9월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이라는 제목의 보고문과 함께 미육군정보부에 제출된 현장 사진 18장에 보이는 도랑으로 추정되는 곳"이라 소개했다.
▲ 1950년 9월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이라는 제목의 보고문과 함께 미육군정보부에 제출된 현장 사진. 유해 발굴지역은 이와 같은 도랑으로 추정된다. | |
ⓒ 이도영 박사 제공 |
박 단장은 이어 "처음에 조사단은 발굴범위를 7×5m 의 방형으로 정했지만, 이튿날 발굴하고자 하는 퇴적층에서 많은 자갈과 잡석들이 뒤섞여 발굴 진척이 더디어져 현장 상황을 고려하여 발굴장 면적을 1/2로 축소하였다"며 "매장지는 습도와 산성도가 높아 유해 보존상태가 매우 나빴다"고 밝혔다.
이어 "머리뼈는 거의가 부서져 조각으로 남아 있으며 대부분 사지뼈의 몸체만 남아 있으나 습기를 먹고 있고, 많은 유해가 발굴과정에서 부스러져 유해발굴에 애를 먹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짧은 시일 내에 유해를 발굴하지 않으면 대부분 삭아서 없어질 것"며 조속히 대대적으로 유해발굴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유해의 보존상태가 나빠 완전한 사지뼈를 갖춘 유해는 발굴되지 않았지만, 머리뼈 부분 다수, 허벅지뼈 18개, 정강뼈 10개, 위팔뼈 7개, 앞팔뼈 22개 등 15~20명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발굴조사단 총괄 진행을 맡은 김민철 박사(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는 "민간차원에서 이루어진 유해발굴이었지만 자원봉사자들이 헌신적으로 동참했기 때문에 많은 성과가 있었다"며 향후 민간차원에서 진행되는 유해발굴의 좋은 사례가 될 것이라 말했다. 자원봉사에 참여한 인원은 대전지역 시민사회뿐 아니라 영남대, 충북대, 경희대, 고려대, 강릉원주대, KAIST를 비롯해 고등학생까지 매일 25명~30명에 달했다.
▲ 2월 23일부터 일주일간 진행된 유해발굴에 많은 학생과 시민이 참여했다. | |
ⓒ 임재근 |
탄피와 탄두도 발견되었는데, M1 탄피 13점, 카빈 탄피 1점과 M1 탄두 2점, 카빈 탄두 1점이 발견되었다. 박 단장은 "탄피와 탄두가 유해와 같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근접 및 확인사살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며 "고무신 4점, 유리약병 1개, 영화필름 조각 1개도 발굴되었고, 의안으로 추정되는 유품 1점이 출토되었는데, 출토유품 및 증언자의 증언을 종합하면 민간인으로 판정된다"고 보고했다.
▲ 1950년 9월 <한국에서의 정치범 처형>이라는 제목의 보고문과 함께 미육군정보부에 제출된 현장 사진. 확인 사살하는 장면(붉은색 원)이 그대로 포착되어 있다. | |
ⓒ 이도영 박사 제공 |
▲ 유골과 출토품이 말한다. 유골 바로 옆에서 탄두와 탄피가 발견(붉은색 원)되어 확인사살이 이루어졌음을 증명해준다. | |
ⓒ 임재근 |
조사단은 설명자료를 통해 "북동·북서 방면의 절단면에서 계속 유해가 나오고 있어, 더 많은 유해가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번 발굴지를 경계로 확장하여 추가 발굴이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또 "유해 매장지의 전체 윤곽과 실태가 파악되면 정부 또는 지방자치단체가 당해 지역을 희생자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공원이나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추가 유해발굴은 단계적으로 추진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며 "우선 지자체에서 추가 발굴을 위해 유해발굴지를 임대 또는 구입하여 개발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대전산내유족회의 요청에 따라 발굴된 유해를 발굴 현장 주변에 적절하게 안치할 수 있는 단기적인 시설을 마련하고, 향후 장기적인 계획을 수립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 유골이 층층이에 걸쳐 발견되었다. 또한 절단면에서 계속 나오고 있어 더 많은 유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 |
ⓒ 임재근 |
▲ 6구정도의 유해가 엉켜 있어, 학살당시의 처참함을 보여준다. | |
ⓒ 임재근 |
공동대책위도 호소문을 통해 대전 산내 민간인 학살현장에 대한 보존대책과 대대적인 유해발굴을 호소했다. 공동대책위는 "65년 동안 땅속에 묻혀있던 유해가 이렇게 세상에 드러났는데도 유해를 다시 묻어야만 하냐?"며 정부가 특별법 제정을 통해 중단된 유해발굴과 진실규명 사업을 재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또 "무관심속에 유해매장지가 훼손되고 있고, 이미 많은 유골들이 유실되었다"며 "더 훼손되고, 유실되기 전에 보전대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특히 동구청에 우선 이번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유해매장지에 영농행위를 못 하게 해 훼손되지 않도록 긴급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했다.
또 공동대책위는 "보존대책을 마련하고, 향후 추가 유해를 발굴할 수 있도록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강구할 것"이라 밝히기도 했다. 공동대책위는 지난 2월 27일, 현장에서 긴급대표자회의를 개최하여 발굴된 유해는 보존처리한 후 현장 컨테이너에 안치하고, 유해 매장 일부 부지에 대해 대전시와 동구청에 현장 보존을 요청하기로 결정한 바 있다. 또한 수습하지 못한 나머지 유해 발굴을 위한 방안 수립을 요구하고, 민간차원에서 추가 시범유해 발굴을 이어가기로 했다.
▲ 발굴된 유해 옆에 유족이 가져놓은 국화가 놓여 있다. 유해 옆에는 함께 발굴된 탄피가 놓여 있다. | |
ⓒ 임재근 |
공동대책위는 대전시와 의회에 추모사업이 진행될 수 있도록 위령제 지원을 위한 조례제정을 촉구했다. 이에 대해 대전시의회 전문학 의원은 "영혼을 위로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고, 현장보존과 유해발굴은 기본이고, 추모공원으로 만들어 평화와 인권교육의 현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국가 차원의 특별법이 필요하겠지만, 우선은 대전시차원에서 현장보존을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올해 안에 조례를 제정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 밝혔다.
▲ 현장설명회에 참석한 대전시 전문학 의원이 “위령제 지원을 위한 조례를 올해 안에 재정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 |
ⓒ 임재근 |
이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이계성씨는 "이번 유해발굴로 문을 열었다"며 "앞으로 대대적인 발굴로 이어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한국전쟁유족회,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족문제연구소, 민주화운동정신계승국민연대, 4·9통일평화재단, 포럼진실과정의, 장준하특별법제정시민행동)과 '한국전쟁기 대전 산내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 공동대책위원회'(대전지역 19개 시민사회단체)는 지난 2월 23일부터 대전 산내 골령골(대전시 동구 낭월동 산 13-1번지)에서 3월 1일까지 7일간 일정으로 유해를 발굴했다.
이곳에서는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3차에 걸쳐 국민보도연맹원과 재소자를 대상으로 대량 학살(1차 : 6월 28~30일 1400명, 2차 : 7월 3~5일 1800명, 3차 : 7월 6~17일 1700~3700명)이 벌어졌다. 당시 희생자들은 충남지구 CIC,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집단 살해됐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통일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5-03-02>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탄피와 탄두가 나란히... '확인 사살'의 증거
※관련기사 ☞오마이뉴스: 땅 속에 묻힌 7천명... 돈 때문에 그냥 둔다는 정부 (03.02) ☞오마이뉴스: "고통스런 표정의 유해"... 발굴 봉사단원도 고개 돌려 (02.26) ☞오마이뉴스: "드러난 유해 다시 묻어야만 합니까" (02.26) ☞오마이뉴스: 뻥 뚫린 두개골 아래엔 M1 탄피... "끔찍해서 못 보겠다" (02.26) ☞오마이뉴스: 고교생까지 합세... 유해발굴 현장 '북적' (02.26) ☞오마이뉴스: "구덩이에 층층이 쌓아"... 살해 증언과 일치한 현장 (02.25) ☞오마이뉴스: 유해공동조사단 "청·장년 일손 절실" 참여 호소 (02.24) ☞오마이뉴스: 64년 만에 드러난 부서진 머리뼈 (02.24) ☞오마이뉴스: 정부 방치 산내 희생자 "시민의 손으로 유해발굴" (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