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친일파 김경승이 조각, 만주군 출신 박정희 대통령 건립기념글 그대로 있어


▲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김경승이 제작해 남산에 자리한 동상들. ⓒ 김종훈

▲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김경승이 제작해 남산에 자리한 동상들. ⓒ 김종훈

▲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파 김경승이 제작해 남산에 자리한 동상들. ⓒ 김종훈

‘조각 김경승 민복진 / 1969년 8월 23일 /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세움’

서울 남산공원에 세워진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 뒤쪽에 붙은 머릿돌 내용 중 일부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는 대표적 친일 작가 김경승이 조각했다고 새겨졌다. 그리고 백범 동상 우측 하단부에는 김경승과 마찬가지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만주군 출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건립기념글도 새겨져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친필로 새겨진 건립기념글에는 “위국성충은 일월과 같이 천추만대에 기리 빛나리”라는 글과 함께 “서울 백범김구선생동상건립에 즈음하여 일천구백육십구년 팔월 대통령 박정희”라고 적혔다.

잘 알려졌듯 백범 김구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제에 항거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1919년 3.1운동 후 만들어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끈 인물이다. 무엇보다 1940년 오늘(9월 17일), 중국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이 창설될 수 있도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자 한국광복군창설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주도적인 역할했다.

실제로 1940년 9월 15일 백범은 자신의 명의로 한국광복군선언문을 발표하는데, 선언문에는 “중화민국 영토 내에서 광복군은 중화민국 국민과 합작하여 우리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타도하기 위하여 연합국의 일원으로 항전을 계속한다”라고 적혔다. 그리고 이틀 뒤인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 창군행사가 중국 충칭 가릉빈관에서 열린다.

남산 백범 동상 뒤쪽 우측에 새겨진 백범 김구 선생 약전에도 “1940년에 임시정부를 중경(충칭)으로 옮기고 한국광복군을 조직해 (1941년)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1943년 11월) 카이로회담에서도 독립보장을 받았다”라고 강조됐다.

한 마디로 백범을 필두로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노력으로 일제에 맞서기 위해 한국광복군이 창설됐다는 뜻. 그러나 해방 후 백범이 1949년 안두희의 흉탄에 서거한 뒤 백범을 둘러싼 상황은 아이러니 그 자체가 된다.

백범은 1962년 우리 정부로부터 1급 훈장은 대한민국장을 받았지만 7년 뒤인 1969년 박정희 정권은 친일파 김경승이 조각한 백범 동상을 현재의 자리인 남산 자락에 세운다. 만주군 출신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백범동상 아래쪽에 직접 건립기념글을 썼다.

이후 90년대 문민정부를 거치며 남산에 위치한 백범 동상을 포함해 친일민족 반역자의 작품을 철거하고 국민들의 뜻을 모아 작품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 요구가 이어졌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친일파 김경승이 만든 백범 동상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는 상태다.

한국광복군 창립일을 이틀 앞둔 지난 15일, 광복회는 성명을 통해 “친일작가 김경승이 만든 남산 백범동상을 철거하고 민족의 정기를 되살리는 작품을 제작 설치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친일파 김경승, 어떤 길 걸었나?


▲ 일제강점기 도쿄미술대학교를 재학하며 에 등재된 바 있는 친일 조각가 김경승씨. ⓒ

김경승, 1915년에 태어나 1992년 사망했다. 우리 현대미술사에서 손꼽히는 유명 조각가다. 해방 후 친일행위가 문제돼 미술가들의 단체인 ‘조선미술건설본부’에 참가하지 못했지만 이후 경성사범학교, 경성정신여학교, 풍문여자중학교 교사를 거쳐 서울시 문화위원회 및 국전 창설위원 등으로 참여했다. 이후 홍익대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이승만 정권 당시인 1958년 서울시문화상 미술부문상을 받았고, 박정희 정권 때인 1969년 3·1문화상 예술본상, 대한민국예술원 공로상을 받았다. 전두환 정권 당시인 1982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김경승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일제에 충성했던 인물이다. 일본 유학 후 국민총력조선연맹 산하 조선미술가협회의 평의원과 조각분과 역원으로 참여했다. 1944년 경성일보사가 주최하고 조선총독부와 국민총력조선연맹 등이 후원한 ‘결전 미술전람회’의 심사위원도 맡았다.

또 ‘대동아 건설의 소리’라는 일제를 찬양하는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친일미술단체에 소속돼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이어가면서 전시회로 벌어들인 돈을 국방헌금으로 내는 등 일제강점기 후반부 작가로서 협력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백미는 김경승이 1942년에 만든 ‘여명’이라는 작품. 1942년 제21회 조선미전에 출품한 것으로 젊은 노동자가 망치를 어깨에 메고 노동현장에 가는 모습을 표현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으로 김경승은 그해 총독상을 수상한다. 1942년 6월 3일 자 인터뷰에서 김경승은 “일본인의 의기와 신념을 표현하는데 새 생명을 개척하는 대동아전쟁하에 조각계의 새길을 개척하려 했다. 나는 이같은 중대한 사명을 위해 미력이나마 보답하겠다”라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김경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1944년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미전 마지막 대회에 이라는 작품을 선보여 다시 한번 수상의 영광을 차지한다. 이 작품은 상체를 드러낸 여성 노동자가 작업도구를 어깨에 메는 모습으로 표현돼 당시 일제 수탈의 상징이었던 여성 근로정신대를 형상화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철거되는 김경승 작품… 서울시 “철거 관련법 없다”


▲ 서울 강북구 4.19국립묘지에 설치된 4월 학생 혁명 기념탑 안쪽 화신상. 작가 김경승(1910~2001). ⓒ 권우성

이런 가운데 지난 13일 정북 정읍시는 김경승이 1987년에 제작한 황토현 전적지 전봉준 장군 동상을 철거했다. 학계와 시민사회는 지속적으로 김경승의 작품을 철거해야 한다고 요구했고 정읍시는 국가지정문화재 구역에 있는 전봉준 동상을 지난 4월 문화재청의 현상변경허가 승인을 받아 철거를 결정했다. 그 자리에는 동학농민군 행렬을 형상화한 작품이 들어선다.

앞서 김경승이 1959년 제작해 남산 일대에 세워졌던 안중근 의사 동상은 지난 2010년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새로이 건립되면서 새 작품으로 교체됐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내에 있던 김경승 제작 이순신 장군 동상 역시 김경승의 친일행적 등을 이유로 지난 2015년 교체된 바 있다.

이와 관련해 서울시 관계자는 와의 통화에서 “(친일파 기념물 철거 등 문제는) 지자체의 의지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며 “기준을 마련할 확실한 법안이 필요하다. 법안에 맞춰 제도적으로 관련 사안을 풀어나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가 확인한 결과 김경승이 제작한 동상은 현재 서울 남산 백범 김구 동상을 비롯해 서울 신사동 도산공원에 위치한 안창호 선생 동상, 서울 종묘광장 이상재 선생 동상, 서울 강북구 국립4.19민주묘지에 자리한 4.19혁명기념탑,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 앞 세종대왕상, 서울 양화대교 정몽주 동상, 경남 통영 남망산 정상에 위치한 이순신 동상 그리고 서울 남산 백범 동상 아래쪽에 위치한 김유신 동상 등이 있다. 다수 작품이 이승만, 박정희 정권 때 김경승 손으로 제작됐다.

오마이뉴스

☞기사원문: 광복군 창립일, 광복군 창설 이끈 남산 김구 동상 직접 가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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