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서정우 씨의 강제동원 피해 증언 영상이 나오고 있다. [사진=민족문제연구소 확보 자료]

[일요서울ㅣ김혜진 기자]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올해로 76년째다.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일본의 역사 왜곡은 진행형이다. 지난달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일본이 2015년 하시마(端島·군함도) 탄광 등을 비롯해 메이지시대 산업 시설 23곳을 세계 산업유산으로 등재하는 과정에서 ‘한국인 등이 본인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하에서 강제 노역한 사실’ 등을 명시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결정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아의 많은 이들이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구타를 당하며 탄광, 공장 등에서 강제 노동을 했던 사실은 명백하게 드러났으나 일본 정부는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통한 이행 촉구가 절실해 보이는 이유다. 일요서울은 민족문제연구소가 확보한 피해자 증언 영상 자료를 토대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차마 꺼내지 못했던 생생한 증언을 확인했다.

– 日 강제동원 명시 안 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이행 촉구 조치
– 강제동원 피해자들 “몸 아파서 쉬게 해 달라고 해도 엎드려뻗쳐 시키고 때려”

민족문제연구소는 유네스코 총회가 열린 지난달 16일부터 오는 11월7일까지 식민지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전시회를 진행하고 있다. 전시는 유네스코 일본 산업유산 시설에서 강제동원을 당한 피해자 19명의 생생한 증언 영상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증언 영상은 한국·일본의 시민단체 및 정부기관이 수집, 소장해 온 구술 기록으로 피해자와 관계 기관 등의 동의를 받아 공개됐다.


하시마(端島·군함도) 탄광에 대한 설명 [사진=민족문제연구소 확보 자료]

탄광으로 강제동원
비참했던 실상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식민지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동원된 곳은 ‘탄광’이었다. 기술 훈련이나 안전 교육 등을 받았다는 증언은 드물다. 교육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기쁘게 국가 명령에 복종’하도록 정신 훈련만 받았을 뿐이라고 피해자들은 증언한다.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가능한, 힘든 육체노동이 필요한 곳에 조선인들이 주로 배치됐다. 낯선 환경과 위험한 현장은 조선인 징용자들의 도주율이 높은 이유를 말해준다고 전했다.

일본 ‘오카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평화자료관’이 제공한 고(故) 서정우 씨의 증언 영상은 국내 최초로 공개됐다. 서 씨는 15살 무렵이었던 1943년 4월, 논에서 일을 하다 3명의 남성들에게 붙잡혀 일본 나가사키 하시마 탄광으로 끌려갔다. 이후 나가사키조선소로 전환 배치되기도 했다.

증언 영상 속 그는 “숙소에 돌아와도 몸이 아파서 잠도 못 잤다. 음식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아침에 못 일어나면 ‘일하러 가라’는 사이렌 소리가 울리는데 그래도 몸이 아파서 일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있으면 담당관이 와서 ‘일하러 가라’고 독촉한다. 오늘은 몸이 아파 쉬게 해 달라고 말해도 ‘농땡이 치려 한다’거나 ‘꾀병이다’라는 식으로 말했다. 계속 쉬게 해 달라고 하니 담당관은 사무소로 끌고 가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마구 때렸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일본 후쿠오카현 오무타시 소재 제과점에서 근무하던 중 징용장을 받고 나가사키조선소로 강제동원 됐던 김성수(97) 씨(국가기록원 제공)는 “조선 사람들에게는 심리적으로 괴로움을 줬다. 날마다 왜놈들이 우리가 출근하고 나면 숙소에 와서 소지품을 싹 다 뒤졌다. 그때 한 사람이 태극기를 갖고 있었는데 그 사람을 체포해가서 그 이후로는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 한다”고 했다.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의 ‘2020년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구술채록 사업(민족문제연구소 수행)’을 통해 증언한 손성춘(94) 씨는 마을 내 일거리를 하러 가자는 구장의 말에 속아 따라갔다가 일본 후쿠오카 미이케제련소에 끌려갔다. 손 씨는 “일하다가 허리가 아파 삽을 짚고 서서 쉬니까 ‘이렌까이 이렌까이’라고 빨리 퍼내라고 했다. 허리가 아파서 좀 쉰다고 한국말로 하니까 일본 사람이 뭐라고 하느냐면서 주먹으로 얼굴을 때려버렸다”고 증언했다.


하시마(端島·군함도) 탄광 [사진=민족문제연구소 확보 자료]

‘힘아리’ 없는 밥알
‘콩깻묵밥’ 끼니

1942년 야하타제철소로 끌려간 고(故) 최영배 씨(민족문제연구소 제공)는 “밥을 네 그릇 먹어도 양이 안 차더라”며 “쬐끄만한 공기에다 주는데 두 번 먹으면 (밥이) 없다. 어른이 그거 먹고 살 수 있겠냐”고 말했다. 다카시마탄광에 끌려갔던 고(故) 정복수 씨도 “그때는 식량이 귀한 편이라서 대두박이라고 콩기름을 짜고 만든 것이 나오는데 그것하고 쌀하고 콩하고 섞어서 그걸로 밥을 해줬다. 쌀은 안남미라고 하는 것을 줬다. 물을 좀만 부으면 불어나는데 밥알이 힘이 없고 질척하고 가늘다”라고 했다.

고(故) 최장섭 씨(민족문제연구소 제공)는 “콩깻묵밥에 쌀을 어쩌다 한 알씩 섞어주는데 말할 수도 없다. 그 밥을 나르는데 쥐가 거기에 덤볐다. 쌀겨가 하나씩 (섞여있으니) 쥐도 잘 안 먹는다. 깻묵밥을 먹고 그 기운을 내고 소화를 시킨다니 모든 힘을 쓸 수가 없다”고 설명했다.

일하다 다치는 건 다반사
도망가다 걸리면 ‘초주검’

미이케탄광에 끌려갔던 류기동 씨(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민족문제연구소 제공)는 “천장이 머리 위로 떨어져서 머리에 흉이 네 군데가 있다. 하시라(기둥)를 양쪽에다 세우고 그 밑으로 가다가 잘못해서 (기둥을) 들이받으면 천장이 와르르 무너져버리는데 그럼 그 밑에 가던 사람들은 그냥 다 그걸 얻어 맞아야한다. 많이는 안 다쳤어도 세 번인가는 죽을 뻔했다”며 “와이어 줄로 여기(발목)에 감겨서 끌려가다 다쳤다. 그 흉터가 지금도 있다. 사람이 걸핏하면 하나씩 죽어 나가는 경우도 많았다”고 토로했다.

미이케제련소에 끌려간 이영주(93) 씨(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민족문제연구소 제공)는 “조선인들은 제자리에 놔두면 도망간다고 감시가 많았다. 그래서 허락이 없거나 돈이 없으면 못 나갔다. 감옥살이밖에 될 수가 없었다. 제대로 자유를 주면 다 도망갈 사람들인데, 잡혀 온 놈은 그냥 맞아 죽는다”고 했다.

동원에 응하지 않으면 가족들 배급을 끊는다는 면 공무소의 협박으로 야하타제철소에 끌려간 고(故) 주석봉 씨(민족문제연구소 제공)는 “주로 탄광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도망갔다. 그때 ‘도리시마’라고 있었는데 한국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도망가는 사람들을 붙잡는 역할인데 우리가 열심히 일할 동안 가만히 작대기 들고 슬슬 눈치 보고 다니면서 월급을 받아먹곤 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공장에서 입는 관복이 있는데 그 관복에 ‘조요(징용)’라고 박혀 있었다. 주변 눈도 있으니 그걸 입고 도망가긴 어렵다. 그리고 도망을 가봤자 고향의 식구들이 곤란을 당하는 걸 아니까 도망가지도 못했다”고 토로했다.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피해자의 목소리를 기억하라! 강제동원의 역사를 전시하라!’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김혜진 기자 [email protected]

일요서울

☞기사원문: [광복 76주년]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 “관복에 ‘조요(징용)’ 박힌 옷 입어 도망갈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