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논산 연산면 송정리 주민들의 오래된 분노… 국토부 “미래의 교통량 증가에 대비”
백제 오천 결사대가 나당연합군과 최후까지 싸운 황산벌. 황산벌의 정확한 위치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통상적으로 충남 논산시 연산면 인근으로 본다. 연산면 작은 마을인 송정리에는 천호산이라는 뒷산이 있다. 천호산의 옛 이름은 다름 아닌 ‘황산’이다.
옛 황산 앞에 자리잡은 송정리는 지난 2015년부터 도로 공사로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 3일 충남 논산시 연산면 송정리 마을 앞. ‘결사반대’ 글귀가 선명한 수십여 장의 현수막이 도로변에 빽빽이 붙어 있다.
‘천년 성산(천호산) 파괴하는 국토부 해체하라.’
‘자연훼손, 주민들만 죽어난다.’
곧바로 권희용 마을 이장을 만났다. 권 이장은 민족문제연구소 충남지부장과 충남교육청 일제잔재청산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지역 역사문화에 대한 관심과 식견도 남달랐다.
7년째 논란 중인 ‘연산~두마 간 국도 우회도로’ 공사 1구간
국토부는 논산시 연산면 송정리와 대전시 유성구 방동을 연결하는 연산~두마 간 국도 우회도로 개설공사를 벌이고 있다. 인근 국방대 이전과 계룡대 3군 본부로 인한 유동인구 증가로 시가지 교통체증에 따른 우회도로를 만드는 공사다. 총연장 8.5km에 공사비는 약 2500억 원이다. 송정리 주민들이 반대하는 구간은 1공구(1구간)의 3.4Km다.
공사 반대 이유를 묻자 권 이장은 대답 대신 마을 앞 도로(대전~논산 간 4차선 국도, 계백로) 건너편으로 안내했다. 마을 전경과 병풍처럼 펼쳐진 마을 뒷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권 이장이 마을 뒷산 중턱을 가리켰다.
“산 중간 한가운데 가로로 움푹 팬 곳이 보이나요?”
자세히 보니 산허리가 군데군데 가로로 잘린 흔적이 뚜렷하다.
“도로가 뚫리는 구간이 저기예요. 지금 한참 공사를 벌이고 있어요.”
마을 앞으로 뻥 뚫린 4차선 국도가 있는데 마을 뒷산 산허리를 싹둑 잘라 우회도로를 만든다고? 기자 또한 도로 공사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게 전부가 아닙니다. (마을 왼쪽 뒷산 봉우리를 가리키며) 우회도로를 연결한다며 마을 수호산 심장부인 주령에 지금 터널을 뚫고 있어요. 산이 엉망입니다. 속이 상하고 안타까워 잠도 제대로 못 자요.”
곧바로 도로 공사 현장으로 향했다. 마을 뒷산 5부 능선께가 누런 속살이 드러난 채 깊이 파여 있다. 양옆으로는 아름드리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뒹굴고 있다. 골짜기마다 임시 설치한 우수관으로 빗물에 씻긴 황토가 쌓여 있다.
공사 현장에서 내려다보니 산 아래가 까마득하다. 서북쪽으로는 계룡산 정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남서쪽으로는 먼발치로 여러 개의 산봉우리가 겹쳐 펼쳐져 있다. 이런 산 중으로 도로를 내야만 하는지 의문이 더 깊어졌다.
옛 이름은 황산, 말 무덤, 궁장골, 시장골, 궁상골, 사실고개…
‘오천결사대’ 관련 지명 수두룩
권 이장이 기자에게 옛 신문 기사를 내밀었다. 1971년 4월 10일 자 기사다. ‘황산벌 백제 오천결사대 합장 무덤 발견’ 제목의 기사에는 “나당연합군과 최후까지 싸우다 전멸한 백제군 오천결사대 병사의 합동 무덤으로 보이는 백제의총이 발견됐다, 논산군 연산면 송정리 시장골(병사들의 시체를 묻은 곳)로부터 동북쪽으로 직선거리 약 150m 떨어진 천호산 중턱이다”고 전하고 있다.
기사는 이어 “천호산 중턱 궁장골(군사들의 활을 묻은 곳) 언덕바지에 있는 무덤 일부가 도굴 흔적을 보인 채 보존돼 있는데 주민들로부터 말 무덤 또는 큰 무덤으로 불려 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홍사준 백제문화연구회장은 무덤 주위에 시장골과 중상골이 있고 인근에 백제 산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천결사대 병사시체의 일부를 묻은 백제의총이 틀림없다”라는 고증을 덧붙였다.
에 등장한 논산 천호산이 우회도로 공사가 한창인 송정리 마을 뒷산이고, 천호산 중턱은 우회도로가 지나는 노선이다. 또 기사와 논산시지에 등장하는 시장골과 중상골, 궁상골이 모두 천호산에 있다. 하지만 말 무덤은 이후 충남도경찰청 의무경찰대가 들어서면서 진입로 공사로 송두리째 사라졌다. 관련 유적지들도 법적인 보호를 받지는 못하고 있다.
황산벌 전투와 관련된 송정리의 지명은 이게 끝이 아니다. 사실고개(백제군이 활을 쏘는 훈련장), 중상(衆傷)골(오천결사대가 신라군과 싸우다 상처를 입고 쓰러진 곳), 대목골(사장골 위에 있는 골짜기), 황산(천호산의 옛 이름) 등 관련 지명과 유래가 이어진다.
천호산 벼랑에 자리한 월은사(마곡사 말사)에서는 지금도 황산벌 오천결사대를 추모하고 있다. 월은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주민들은 백제 말기 계백장군과 오천결사대의 유혼을 달래기 위해 절을 지었다는 유래를 들려준다.
“오천결사대 뿐만이 아닙니다. 천호산은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정복하고 신검의 항복을 받은 산이고, 산기슭에는 개태사는 고려 태조가 왕명으로 창건한 호국사찰이 있어요. 또 마을에는 한학을 익히며 살아가는 한학마을도 있고요. 이런 마을의 성산에 터널을 뚫고, 마구 파헤쳐 두 동강을 내는 게 말이 되냐고요.”
천호산은 고려태조 왕건이 길몽을 꾼 후에 이곳에서 나타난 군사들의 도움으로 후삼국 통일을 이루었다는 전설이 담긴 산이다. 본래 지명은 ‘황산’이었으나 후삼국을 통일한 후 하늘의 보호가 있었다고 해 천호산(天護山)으로 불렸다 유래한다.
국토부 “주민들이 내놓은 대안은 사업 타당성 부족”
권 이장이 더욱 이해하지 못하는 대목은 공사 이유다.
“현재 있는 마을 앞 4차선 도로(국도 4호선, 계백로)도 별로 막히지 않아요. 이후 교통체증이 걱정된다면 이 도로를 확장하면 되거든요. 백번 양보해서 꼭 우회도로를 내야 한다면 천호산 주령을 피해 대전 방향으로 1.5km 이동해 터널을 뚫으면 되니 천호산 주령과 산허리는 손대지 말라고 사정도 했어요. 그렇잖아요. 고작 3~4km 내달리려고 역사 현장이자 마을의 주산을 파괴해서는 안 되잖아요.”
처음 공사계획이 알려진 2015년부터 마을 주민들은 공사 반대 의견을 적극적으로 밝혔다. 500여 명의 주민이 연서명을 해 국토부에 의견도 전달했다. 정부 기관 곳곳에도 민원을 제기했다. 하지만 모든 민원이 대전지방국토관리청으로 이첩됐다. 대전지방국토관리청의 대답은 판박이였다.
우리 청의 계획노선은 기술적 검토, 전문가 자문 등을 종합해 선정한 최적 노선으로, 마을 주민들이 요구하는 노선은 우리 청이 선정한 노선에 비해 우회 효과 등 타당성이 불리한 것으로 검토돼 반영이 곤란한 실정임을 알려드립니다. – 2017년 6월 대전지방국토관리청장 회신
2017년 주민 설명회 자료를 보면 마을주민들의 우려가 쏟아졌다. 주로 ‘천호산 절경을 보호해도 모자란 판에 산자락을 끊어 길을 내는 건 절대 반대’, ‘도로공사 편의만을 위한 공사가 누구를 위한 공사냐’는 의견과 항의였다. 그때마다 대전지방국토관리청은 “교통시스템 효율성 극대화를 위한 공사로 환경 훼손은 불가피하고 환경피해가 최소화하도록 친환경적으로 계획을 수립했다”고 강변했다.
당시에도 여러 주민이 “전국 도시 중 인근 계룡시 도로가 가장 한산하다, 4번 국도 도로 중 일부 신호등 지점에서 정체가 있으나 이는 전국 어느 도로와 별반 다르지 않다, 4번 도로 확장만으로도 교통체증은 충분히 해소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대전지방국토관리청은 “미래 교통량 증가에 대비해 우회도로 건설이 필요한 것으로 검토됐다”며 “우회도로 종점 교차로는 4차선을 6차선으로 확장하도록 협조 요청했다”고 동문서답했다.
주민들은 올해 들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의 문을 두드렸지만, 이마저도 호응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일제히 도로변에 현수막을 내걸고 도로를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마지막 호소를 하고 있다.
“3~4km 단축보다 수만 배 가치 있는 역사 현장 파괴 말라”
취재를 마치고 대전으로 되짚어가는 기자에게 권 이장이 혼잣말처럼 되뇌이며 반문했다.
“2~3분 빨리 가자고 멀쩡한 도로를 두고 수천억 원을 들여 마을의 천년 성산을 파헤치고 주령에 터널을 뚫어야 할까요? 조금 더디 가더라도 황산벌 유적지와 마을의 역사문화를 보전해 달라는 주민들의 요구가 무리한 요구인가요? 선진국이라는 한국 땅에 주민들이 내놓은 대안과 요구를 성의있게 검토하고 답하는 정부 기관, 정치인은 정말 없는 건가요?”
퇴근 시간과 겹쳤지만, 대전 가는 4차선 국도는 한산했다. 도로변에 붙은 송정2리 청년위원회 명의의 현수막 글귀가 도드라져 눈에 띄었다.
“3~4km 단축보다 수만 배 가치 있는 역사 현장 파괴하지 말라.”
심규상(djsim)
오마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