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민간인 학살 유족 증언록


사진 진주시 명석면 명석고개 진주지역 유해 임시 안치소.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1주년이다. 전쟁과정에서 남북한에 걸쳐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학살과 함께 인민군과 좌익에 의한 학살도 자행되었다. 진주에서는 명석면과 용산면에서 국민보도연맹 가입자를 중심으로 많은 민간인학살이 있었다.

단디뉴스는 민간인학살 유해 공동발굴단에서 제1차~11차까지 자원봉사자로 활동한 김영희님의 글을 통해 전국각지 유해발굴 현장의 기록과 발굴을 둘러싼 사연, 증언록에 실린 생생하고 가슴 아픈 증언, 남겨진 과제 등을 15회에 걸쳐 연재할 계획이다. 연재가 한국전쟁의 기억을 되새기고 화해와 치유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 편집자 주 –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 연재 계획.

▲ 진주국민보도연맹 사건 배경

한국전쟁 기간 동안 진주지역은 왜 다른 지역보다 유달리 ‘보도연맹(保導聯盟)’ 가입자와 민간인 희생자가 많았을까? 이러한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진주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사회-문화사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진주는 물산이 풍부한 지역으로 고려시대부터 중요한 거점 행정단위인 ‘목(牧)’이 설치되었다.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정 3품에 해당하는 목사(牧使)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00년 이후부터 세도정치의 발호로 인해 국가 기강이 무너지면서 각종 수탈과 빈부격차가 커지면서 진주는 이 지역만의 사회-문화사적인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진주지역이 갖는 독특한 특징을 규정 지울 수 있는 역사적 사건 세 가지가 최초로 발발하였다.

이러한 세 가지 큰 사건들은 진주지역을 상당히 진보적인 성향을 나타내주는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결국 한국전쟁 기간에 민간이 대학살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후기 임술년(1862년)에 진주민 유계춘의 주동으로 수만 명이 삼정의 문란과 탐관오리의 세금 착취에 저항한 임술농민항쟁(壬戌農民抗爭)이 최초로 진주에서 발발한다. 이 저항은 진주민의 사회의식의 성장에 기폭제가 되었다.

둘째, 1923년부터 일어난 백정들의 신분해방운동인 형평운동(衡平運動)이다. 진주에서 이학찬, 장지필 등 백정 출신과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등 양반 출신이 합심하여 조직을 결성한다. 당시 백정이라는 신분은 법제상으로는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차별이 지속되어 결국 차별 해소를 요구했는데, 이에 개화 양반들도 참여하는 등 많은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이 사건은 진주라는 지역이 상당한 진보적인 성향을 갖게 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셋째, 조선에서 맨 처음으로 소년운동의 깃을 든 곳이 바로 진주이다. 강영호(姜英鎬,1896~1950) 선생은 진주 출신 소년 운동가로 동경대학에서 문학 공부를 하였다. 당시 일본 유학 시절에 한국 학생들과 함께 처음으로 어린이 운동단체를 만들고자 했다. 1923년 방정환 선생을 비롯해 강영호, 고경인, 박춘성 등 뜻이 맞는 사람들과 어린이 문화 운동단체 ‘색동회’를 조직한다. 당시 일제강점기 시대 속 민족계몽 정신을 아이들에게 심어주고자 하였고, 처음으로 어린이날 행사를 시작한다. 그리하여 1920년 진주소년운동으로 시작되는 아동문학운동이 진주 문학의 싹이 되기도 했다. (주1)


사진 2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풀만 무성한 강상호 선생 묘지

또한 진주사범학교 등 중등학교가 4개나 있어 교육받은 인력이 많이 배출되어 진보적인 환경이 조성되었고, 이러한 인적자원을 바탕으로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처럼 사회운동의 기반이 되어 진주지역 보도연맹은 가입자도 많았고 희생자도 많았다. 진주지역에서 해방 후 정치적 갈등은 1946년 ‘대구10월사건’이(주2) 발생하면서 본격화되었다. 10월 7일에 경남으로 파급되면서, 진주와 마산에서 가장 격렬했다. 진주지역에서는 봉기가 일어나 진양군 정촌지서, 대평지서, 명석지서 등이 시위자들에게 점거되었다.

이후 시위자들이 경찰이 발포하여 16명이 사살되었고, 시위자 100여 명이 체포되었다. 당시 주모자로 체포된 인민위원장 강대창 등 6명이 미군정 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았다. 이때부터 진주형무소에는 좌익사범들이 넘쳐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진주는 빨치산의 근거지였던 지리산 인근에 위치하여 지리산에 은거하던 빨치산이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진주형무소를 자주 습격하였다. 1949년 10월 말경에 빨치산이 진주형무소, 진주시청, 진양군청을 습격하기도 한다.

이후 진주보도연맹은 1949년 12월 8일 진주극장에서 자수자와 전향자 등 천여명이 참여하고 진주경찰서장(이정용)이 이사장을 맡고 진주인민당 위원장(박진환)이 간사장을 맡아 결성된다.(주3)


좌(사진 3 형평운동 기념탑 칠암동 경남문화예술회관 건너편), 우(사진 4 신현수 선생 頌公碑(송공비) 망진산 봉수대 아래).

▲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희생 경위

1945년 9월 초순 남한의 형무소 재소자는 모두 2,600명이었다.(주4) 그러나 1926년 7월에는 17,000여 명으로, 1948년 봄에는 22,000여 명으로 늘었다.(주5) 그 후에도 전국 19개 형무소 재소자 수는 계속 늘어나 1950년 1월에는 48,000여 명에 이르렀다. 진주형무소는 한국전쟁 당시 직원이 120명이며 재소자는 1,000여 명이 수용되어 있었다.(주6) 재소자 중 가장 많이 수감되어 있었던 재소자들은 정치범들이었다. 진주 형무소에는 진주지청 산하 진주, 사천, 하동, 의령, 합천, 산청 등지에서 온 좌익사범들이 수용되어 있었다.

그 후 정부는 1950년 2월 11일 국회본회의에서 좌익인사들의 보도연맹 강제 가입을 종용하여 협박하면서 한 개 군에 일만 명 가입시킬 것을 지시한다. 1950년 6월 25일 내무부 치안국은 「전국요시찰인 단속 및 전국 형무소 경비의 건」(城署査 제 1799호) 제목의 비상 통첩으로 전달하고 1950년 6월 29일 ‘불순분자 구속의 건’, 6월 30일 ‘불순분자 구속처리건’과 석방금지령을 지시한다. 7월 11일 ‘불순분자 검거의 건’을 하달하고 전국 보도연맹원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 가두어 놓는 일)을 단행하라 지시한다.

당시 진주경찰서는 1950년 7월 15일 진주시와 진양군 관내 지서 별로 보도연맹원을 예비검속하여 지서에 소집하고 진주경찰서로 구금한다. 구금 기간이 7일~10일 정도인데 그 기간 중 심사를 거쳐 갑, 을, 병으로 분류되었다. 일부는 진주형무소로 이송되었고, 진주형무소에는 산청, 진주, 삼천포, 하동, 의령, 진양군, 사천 등지에서 끌려온 사람도 있었다. 그리고 1950년 7월 하순부터 진주는 하동에서 진격해오는 인민군 제6사단(사단장 방호산)과 함양으로 진격해오는 인민군 제4사단(사단장 이권무)에 의해 점령 위기에 처하면서(주7) CIC(특무부대), 헌병, 경찰이 7월27일부터 후퇴하기 시작했다.(주8)

진주형무소 재소자와 진주지역 보도연맹원들은 그 직전에 집중적으로 학살되었다. 진주경찰서 구금자 중 ‘갑’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7월 21일경 학살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7월 26일까지 몇 차례에 걸쳐 학살되었다. 그리고 진주형무소에 구금된 보도연맹원과 재소자들도 7월 22일부터 7월 26일 사이에 명석면 관지리, 우수리, 용산리, 문산 상문리, 마산 여양리 등에서 모두 학살되었다.


사진 5 진주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과 진주국민보도연맹 사건 발생장소

▲ 제노사이드(집단학살범죄)는 무엇일까?

세계적으로 제노사이드는 고의로 혹은 제도적으로 어떤 민족, 종족, 인종, 종교, 이념 집단의 전체나 일부를 파괴하는 집단학살을 말한다. 권력을 가진 지배자 혹은 특정 집단이 어느 한 집단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소위 씨를 말리는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주9) 이와 유사한 용어가 ‘홀로코스트’가 있다. 홀로코스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대학살을 지칭하는 고유명사로 사용한다. 전쟁에서 군인은 적국의 군대와 싸운다.

그러나 제노사이드는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지배자 혹은 특정 집단이 어느 한 집단을 영원히 제거하기 위해 소위 씨를 말리는 전쟁을 벌인다. 가해자들은 희생자들의 문화와 역사를 포함한 모든 흔적을 지우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우리나라에서도 집단학살범죄가 자행되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국민보도연맹원들의 학살은 대다수가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에게 한국군 작전지휘권을 넘긴 1950년 7월 14일 이후부터 9월 하순 집단학살 금지령이 내려질 때까지 계속됐다. 당시 국민보도연맹원이 몇 명 학살당했는지 정확한 통계는 없다. 다만 보도연맹원 가입자 수가 30만 명 내지 35만 명이었다는 통계가 있고, 서울의 보도연맹원 수가 1만 9,800여 명이었다는 기록(동아일보 50년 5월 5일 자)이 있고 학살된 보도연맹원들이 최소한 15만 내지 20만 여명으로 추산된다.(주10) 세계적으로 자행되었던 제노사이드의 대표적 사례(민족, 종족, 인종, 종교, 이념)는 다음과 같다.

민족 청소’의 사례로 ‘옛 유고슬라비아의 민족 청소’가 있다. 1991년 세르비아가 크로아티아를 침공함으로써 4년에 걸친 전쟁이 시작되었다. 보스니아계 세르비아인들은 피란민 주거지인 스레브레니차에서 일주일 만에 8,000여 명의 보스니아 성인 남자와 소년의 목숨을 빼앗았다.

종족 청소’의 사례로는 아프리카 르완다의 제노사이드를 들 수 있다. 르완드를 식민지 지배한 벨기에는 소수 투치족을 활용하여 다수의 후투족을 지배했다. 종족간의 갈등이 누적된 결과 독립 후 후투족은 투치족을 100일 만에 대략 80만 명을 학살했다.

홀로코스트’, 악명높은 유대인 대학살은 ‘인종 청소’다. 1933년에 권력을 잡은 히틀러는 독일을 단일 인종인 ‘아리안’의 땅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반유대인법을 만들고 유럽 전역에 강제 수용소를 15,000여 개나 설치했다. 2차 대전 중 유럽의 950만 유대인 중 600만여 명이 나치의 손에 살해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은 ‘이교도(異敎徒) 청소’의 경우다. 이슬람교를 믿는 오스만 제국은 기독교를 믿는 아르메니아인을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대량 학살했다. 1894년부터 1896년까지 10~3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목숨을 잃었다. 제1차세계대전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 100만 명이 살해당했고, 최소 50만 명이 추방되거나 탈출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캄보디아 ‘킬링필드’는 ‘이념 갈등에 따른 집단학살’ 사례다. 냉전 체제하에서 1975년에 집권한 크메르루주는 도시민, 지식인들을 농촌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반대 세력에 대해 숙청, 고문, 학살을 자행했다. 크메르루주 정권 아래 기아, 고문, 처형, 강제노동 등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당시 인구의 4명 가운데 한 명 꼴인 170만∼220만 명으로 추산된다.

세계적으로 발생한 제노사이드의 다섯 가지 사례를 간략히 살펴보았다. 우리나라는 이념적 갈등 속에서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집단학살을 하기 위한 수단으로 법적 근거도 없는 국민보도연맹이란 기구를 결성한 것이다. 국민보도연명이란 도대체 어떤 기구인지 살펴보자.

▲ 국민보도연맹(國民保導聯盟)이란 무엇인가?

국민보도연맹은 이승만 정권이 국민의 사상통제를 목적으로 조직한 반공단체다. 1948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른 좌익 전향자를 계몽・지도한다는 취지로 1949년 4월 20일 관변단체인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된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9월20일부터 지방지부 조직에 착수하는데,(주12) 도내 각 경찰서 단위로 하부조직을 설립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주11) 한국전쟁으로 1950년 6월 말부터 9월경까지 수만 명 이상의 국민보도연맹원이 군과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국민보도연맹 경상남도연맹(약칭 경남도연맹)은 1949년 11월 11일 경남 경찰국 무도회관에서 ‘임시발기인대회’를, 13일에는 부산지법 회의실에서 ‘정식발기인대회’를, 15일에는 ‘결성대회 정식 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고, 20일 ‘결성선포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출범하였다. 이후 경상도 산하 각 시•군 연맹과 읍•면 지부가 결성된다. 검•경 당국은 1949년 10월25일부터 1949년 11월30일까지 남로당원 자수 주간을 설정하고 대대적인 자수•전향 작업을 진행한다. 경남도연맹에서 발표한 경남의 자수전향자는 5,548명이었다. (주13)

조직결성 명분은 ‘개선의 여지가 있는 좌익세력에 기회를 준다’ 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재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가족의 생명•재산 등을 보호하여 준다’며 남로당원 자수 주간을 선포하였다. (주14) 그러나 1950년 2월 11일 제11차 국회 본회의에서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면 신분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협박까지 하면서 1개 군에서 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입을 종용하였다. 이로 인해 좌•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까지 가입되어 좌익이라는 낙인이 찍혔다’(주15)

1949년 12월 2일 경상남도 경찰국 발표에 의하면, 집단학살사건은 경남도 내 어느 한 곳도 빼놓지 않고 자행되었는데, 시•군마다 200여 명에 달하는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 진주, 마산, 부산 형무소 수감재소자 및 예비검속자 3,300여 명을 비롯 약 7,000여 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주16)


진주지역의 자수전향자는 259명이었다. (주17) 진주경찰서는 좌익활동 전력자뿐만 아니라, 농민조합 등에 가입했던 사람, 각종 시위나 행사의 단순 가담자, 그들의 친인척, 빨치산에게 식량 등을 제공했던 사람, 또는 국민보도연맹이 어떠한 단체인지도 모르던 농민들까지 여기에 가입하게 했다. 가입한 보도연맹원에게는 통제 목적으로 보도연맹원증을 발급했으며 지서 별로 이들을 훈련, 교육하는 등 조직적으로 관리했다.

국민보도연맹원 가입 당시에는 사상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일반 국민들이 다수 가입되었으며, 배급을 준다거나, 비료를 준다, 아니면 글을 가르쳐 준다는 등으로 회유하였으며, 협박과 강압에 의한 강제 가입까지도 불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이를 입증하는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 권유를 받은 사람의 증언이다.

“나는 보도연맹에는 가입하지 못했제. 순사가 몇 번 찾아와서능 가입하면 글을 배와준다카데, 배급도 주고 가입 하고자프믄 지서로 오먼 된다카더마. 그래 지서에 갈라꼬 뱃가(나루터)에까징 갔제. 그란데 배가 없능기라 그래서 도라왔제. 지금 생각해도 기가 막히는구마. 만일에 내가 그때 배를 타고 갔시모 내도 그때 죽었을기구마”


사진6 국민보도연맹원증

▲ 증언록의 증언자(유족분) 정○○(희생자의 아들) 인터뷰 내용

질문 : ‘아버지가 희생될 당시 살던 곳 주소를 아시나요?’

대답 : 진양군 대평면 대평리 000번지. 그 주소를 계속 가지고 있다가 1997년 남강댐 공사 중에 이주단지로 오면서 바뀌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할머니가 너희 아버지 살아올 수 있으니까 절대 이사 가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내가 세 살때 어머니는 할머니가 저년이 들어서 망했다고 나쁜년이라고 그러고 그러면서 꼭 매일 아침 강에 가서 정화수 떠다놓고(빌었어요). 그 당시에는 강물을 먹었거든요. 할머니가 매일 부엌에다가 싸 한 줌 놓고 기도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할머니 뭐하는 건데?’하니까 ‘혹시 너거 아버지 살아 돌아올지 모르니까 이사 가지마라’하셨어요. 초가집에 물이 들어왔어 지붕개량을 하고 그대로 이사는 끝까지 안가고 거기 살았어요.(본문245쪽)


사진 7 진주시 명석면 용산고개 발굴장 입구

질문: ‘혹시 아버지가 학살당했을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이 시신을 찾으러 가셨나요?’

대답: “삼촌이랑 어머니가 용산리 고개를 갔었대요. 6월 초열흘쯤 됐을 거랍니다. 시신을 찾아가도 된다는 소문을 듣고 가니까, 조그만 둔덕에 시체가 쫙 드러누웠는데 못 찾겠더라 하대요. 총을 맞아가지고 6월이다 보니까 부패가 돼가지고 얼굴 형태도 모르겠고, 그냥 뭐 허리끈이나 옷이나 보고 아는 거지 모르겠더랍니다. 우리 형은 할머니한테 나는 엄마 뱃속에 있었고, 그래 냄새가 나니까 쑥을 뜯어가지고 코를 막고 찾았대요. 그렇게 찾으려고 했는데 도저히 못 찾겠어서 이래 가지고 안 되는 거다. 삼촌이 ‘형수님 갑시다. 이래 안 되는 기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갑시다.’했대요. 딱 한번 찾으로 갔대요”(본문 251쪽)

본인이 죽어 묻힐 구덩이를 손수 파게 한 후 학살을 하고 밀어 넣어버렸다고 한다. 고인 핏물이 구덩이를 넘쳐 계곡에 피가 흘러내렸다고 한다. 제가 발굴차 용산고개 현장에 몇 차례 가봤지만 깊은 계곡은 풀로 뒤덮여 아무 말이 없다.

질문: ‘세 살 때 집을 나간 어머니는 다시 만났을 때 아버지에 대해서 어떤 이야기를 해주셨나요?’

대답: “그래 인자 늦게나마 어머니를 만나니까 어머니가 여기(팔뚝)에 문신을 두 개 탁탁 새겼더라고, 팔에 문신을 새겼어, 어머니가 ‘나는 너거 아버지 찾을 수 있다. 살아오면 찾는다’ 하더라고, 아버지와 문신을 같이 했대요. ‘너거 아버지도 여기 하고 나도 여기 하고 문신이 똑같다. 혹시 내가 죽고 없더라도 너거 아버지 살아오거든 이놈(문신)보고 찾아라’ 하셨어요.(눈물)(본문260쪽)

두 분은 저승에서 만나시어 문신으로 확인하시고 해원(解冤)하시기 바란다.

질문: ‘구수회라는 분은 용산리 학살 장소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있었던 건가요?’

대답: “그 매장지에서 500미터도 안 되는 동네에 살았으니까, 나무하고 소 먹이러 가면서 맨날 ‘요는 머이 묻혔고 머이 묻혔고’하는 말을 어른들한테 들었대요. ‘거기 소나무 밑에 갈비(소나무 낙엽 채취)하지 마라 거기 송장 썩은 거 묻어 놨은께, 거기(시체를 묻어서 그랬는지)는 풀이 잘 자라더래요. 학살 후 그 이듬해 산사태가 나니까 해골이 도랑에 굴러 내려오더랍니다. 그래 이걸 주워가지고 서부시장에 갖다 팔더라 하데요. 왜 파느냐, 그 당시에 영양실조가 많아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천질이라는 하늘이 준 병리라고, 애가 가만 가다가 탁 쓰러져서 거룸 물고 기절했다가 또 살아났다가 또 가고, 아, 간질, 간질병이죠. 간질환자 아니면 나환자가 이 머리뼈를 갈아서 먹으면 낫는다는 소문이 진주시에 엄청 났대요. 그래서 용산고개에서 파 내려오는 사람도 가끔 봤대요. 어린애들이 소 먹이다 오면 나이 많은 영감들이 보자기에 둥그런 걸 싸 내려오더랍니다. 그래 ‘뭐이고?’하니까 ‘너들은 이런거 보년 안 된다.’이러면서 가져 내려오고 하더랍니다. 개울에는 머리가 막 시퍼렇게 곰팡이 피어 갖고 구석에 묻혀있고 그랬대요.(본문264쪽)

증언록을 읽으면서 이러한 제노사이드(집단학살범죄)는 왜 반복될까? 제노사이드는 다른 가치나 이념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파시즘적 범죄이다. 국가나 집단의 경우 자신의 범죄행위를 솔직히 드러내고 반성하기보다는 미화하고 사실 자체를 왜곡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제노사이드는 우리와는 관계없는 먼 옛날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제노사이드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서 과거의 잘못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나라는 식민지 시대와 민족 분단의 한국 현대사의 굴절 속에서 집단학살의 아픈 역사가 자리잡고 있다. 2008년 1월 24일에 참여정부 노무현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과거 정부의 공권력에 의한 불법적인 양민학살 행위’로 인정하여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희생된 유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위로와 사과의 뜻을 밝혔다. 아울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약칭 진화위)를 발족하여 전체 유족들의 15% 정도의 배상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은 조사가 전면 중단되었다가 문재인 정부에서 진화위 2기(2020년 12월 10일)가 출범되어 보•배상 미신청자 유족들의 재신청 및 전 지역을 조사 중이다. 국가에 의해 집단 학살된 보도연맹 사건을 은폐하고 금기시할 것이 아니라, 감시와 차별을 받아온 유족들의 아픈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주고 배•보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주⟧

(주1) 진주관광 sns 기자단, “진주에서 시작된 소년운동의 역사”, 2020년 12월 29일.
(주2) 대구 10•1 사건은 1946년 10월 1일에 미군정하의 대구에서 발발한 영남 지역의 사건으로 이후 남한 전역으로 확산된다. 식량부족, 친일경찰에 대한 반감, 독립국가 수립이 지연되는 현실에 대한 불만이 결합해서 폭발한 사건이다.
(주3) 남조선민보, 1949년 12월 10일자. 《제4차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 자료집》, 2017, 19쪽(주4) 법무부, 『한국 교정사』, 1987, 448쪽.
(주5) 최정기, 「해방 이후 한국전쟁까지의 형무소 실태연구-행형제도와 수형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한국제노사이드연구회, 『제노사이드 연구』 제2호, 2007, 20~21쪽.
(주6) 법무부, 『한국 교정사』, 1987, 535쪽.
(주7) 명석면사편찬위원회, 『명석면사』, 늘함께, 2000, 225쪽.
(주8) 신경득, 『조선종군실화로 본 민간인 학살』, 살림터, 2002, 189쪽.
(주9) 마크 프리드먼/한진여 옮김/홍순권 감수, 『제노사이드 집단학살은 왜 반복될까?』, 내인생의책, 2015, 17쪽.(주10) 한국전쟁전후 진주민간인 희생자유족회, 《백골의 귀향》, 2014년 2월 19일
(주11) 자유민보, 1949년 11월 20일자.
(주12) 동아일보 1949년 4월 23일자.
(주13) 민주중보, 1949년 12월 3일자.
(주14) 동아일보, 1949년 10월 30일자.
(주15) 제6회 국회속기록 제28호, 598~602쪽, 1950년 2월 11일.
(주16) 한국전쟁후 진주민간인희생자유족회, 《백골의 귀향》, 2014년 2월19일, 32쪽
(주17) 민주중보, 1949년 12월 3일자.

김영희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자원봉사자

고등학교 역사교사를 지냈고, 현재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회원이다. 발굴 1차부터 10-1차까지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유해발굴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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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원문: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⓶ ‘진주국민보도연맹 대학살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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