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의 발자국] 59. 서울 문래근린 공원 : ‘역사전쟁의 현장’ 5‧16쿠데타의 발상지

“자, 이제 작전을 시작합시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위치한 6관구 지하벙커에는 별 두 개가 달린 모자를 쓴, 한 마른 군인이 날카로운 눈매로 앞에 모인 장교들에게 결연한 어투로 말했다. 한국현대사를 근본적으로 바꾼 5‧16쿠데타가 시작된 것이다.

5‧16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는 당시 제2군 부사령관이었지만, 쿠데타 1년 전까지 서울을 방어하는 이곳 6관구(이후 수도경비사령부로 변함) 사령관으로 근무해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이곳이 서울중심부에서 가장 가까운 부대라는 점을 고려해 박정희는 이곳을 5‧16쿠데타 지휘본부로 선택했다.


▲ 1961년 5월 16일 새벽 6관구를 출발해 중앙청에 도착한 박정희 소장

사전에 모의한대로, 이날 새벽 출동한 김포의 해병대와 공수특전단 등 2500여 명의 군인들은 한강대교애서 가벼운 총격전을 한 뒤 한강을 건너 육군본부와 서울의 주요시설을 장악했다. 4‧19혁명이라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피로 얻어낸 민주주의가 1년 만에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 역사적인 장소는 1985년 6관구의 후신인 수도경비시령부가 이전하면서 문래근린공원으로 변했다. 이 공원은 지하철 2호선 문래역에서 내려 5분정도 걸어가면 만나는,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많은 지역 시민들이 산책을 나오는 이곳이 깊은 역사적 의미를 가진 곳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서울시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지역주민들 중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 역시 고등학생 시절 이 근처에 살았었지만, 전혀 이 같은 사실을 몰랐다.


▲ 5.16 쿠데타의 지휘본부였던 6관구 지하벙커가 이제는 서울 문래근린공원에 방치돼 있다. ⓒ손호철

특히 이 지하벙커는 공원 제일 구석에 위치해 있고 굳게 닫힌 그 입구에는 아무런 표시조차 없이 운동기구들로 둘러싸여 있어 사람들로부터 잊혀 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이 벙커 앞에 서자 이곳이 한국현대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비극의 현장이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숙연해졌다.

지하벙커에서 조금 가면 낯익은 얼굴이, 낯익지 않는 복장으로 우리를 맞는다. 별 두개 달린 군모를 쓰고 군복을 입는 박정희의 흉상이다. 5‧16쿠데타 당시의 박정희를 형상화한 동상으로, 그 밑에는 ‘5‧16혁명발상지’라는 한자어가 우리를 맞는다. 5‧16쿠데타가 아니라 ‘5‧16혁명’이라고? 오른쪽에는 초록색 새마을기가, 왼쪽에는 태극기가 펄럭이는 동상의 뒷면에는 오랜 세월동안 마모되어 읽기가 쉽지 않은 글씨들이 나타난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아니 흔들리나니
차마 부정불의무능의 천지를 볼 수 없었던
나라를 구하려는 일편단심 침착 용단 과감
결연히 이곳에 칼을 뽑아
창공을 향하여 성화를 높이 들다
1966년 7월 7일’


▲ 박정희 흉상 밑에는 ‘5.16혁명발상지’라는 글씨가 쓰여있다. ⓒ손호철

5‧16쿠데타 5년 뒤인 1966년, 즉 55년 전에 만든 동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동상을 올려다 보고 있자, 몇 년 전 처음으로 위내시경 검사를 받은 경험이 생각났다. 수면내시경이라 주사를 맞자마자 잠들고 말았는데 잠에서 깨자 검사가 끝나 있었다. 헌데 근 20년간 몸이 아플 때면 찾아가 잘 아는 동네의사의 얼굴이 심상치가 않았다. ‘아 암이구나.’ 나는 최대한 동요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물었다. “그래 몇 기에요?” 의사의 답이 황당했다. “몇 기가 아니라, 교수님 왜 박정희 욕을 그리 하세요?” ‘아니 이게 무슨 황당한 이야기?’ 알고 보니 마취주사로 수면을 시키자 갑자기 “박정희 개XX”하며 계속 욕을 하더라는 것이다. 어린 대학시절 잡혀가 고문을 당하고 감옥도 가고 대학도 잘렸지만, 그렇다고 수십 년이 지난 현재까지 깊은 잠재의식 속에 박정희에 대한 증오가 남아있다니. 나 역시 놀랐고 ‘내 자신이 수양이 덜 됐구나’ 부끄러워 한 적이 있다.

이곳은 지나간 역사의 한 유물이 아니라 우리의 현대사를 놓고 현재도 진행되고 있는 ‘역사전쟁’의 치열한 현장이다. 2000년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등이 박정희가 ‘한 목숨 다해 충성함’이라는 충성혈서까지 써서 만주국 일본군관학교에 입학했고, 이후 일본군 장교로 복무한 친일 경력에 주목해 이 흉상에 욱일승천기를 씌운 뒤 밧줄로 묶어 쓰러트려 홍익대로 가져가려다가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영등포구청은 동상 철거 과정에서 코 부분이 훼손된 흉상을 다시 설치했고 2006년 ‘박정희 대통령정신문화선양회’가 코를 복원했다. 박근혜 퇴진 촛불항쟁이 거세던 2016년 12월, 조형예술가 최황 씨는 이 흉상에 빨간색 스프레이를 뿌리고 흉상을 받치고 있는 좌대에도 빨간 스프레이로 ‘철거하라’라고 쓰면서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박정희는 일왕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만주군에 합류한 친일군인이었고,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으며, 경제발전을 빌미로 수많은 비민주적인 행위와 법치를 훼손한 인물이다. 또 한국사회에 ‘빨갱이’라는 낙인효과를 만들어낸 악인이다.” 법원은 그에게 이런 방법이 아닌 여론 청원 등 다른 절차를 밟아야 한다며 100만원 벌금형을 선고했고 최 씨는 항소했다.

이 같은 수난의 역사를 잘 증언하는 듯, 이 동상은 넓은 면적을 보호구역으로 만들어 4면을 철제 울타리로 보호하고 있다. 동상 옆에도 ‘경고 : 박정희 대통령 흉상과 지하벙커에 대하여 손괴하는 자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민형사 처벌함을 경고함 – 박정희대통령 흉상 보존회’라는 경고문과 ‘그립습니다, 우리의 영웅이시여. 전국여성구국총연합’이라는 화환이 놓여있었다.


▲ 민주화 세력이 박정희 흉상을 훼손하면서 흉상 주위에 철장을 쳐 보호하고 있다. ⓒ손호철

▲ 박정희 동상이 민주화 이후 여러차례 수난을 당하자 박정희 지지자들이 경고문을 설치해 놓았다. ⓒ손호철

▲ 박정희 지지자들이 보낸 화환 ⓒ손호철

이곳에 서있으면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간다. 박정희는 최 씨와 진보세력의 주장처럼 다른 젊은이들이 광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때 일왕에 충성을 맹세하고 독립군을 때려잡던 친일군인에, 민주정부와 민주세력을 짓밟은 독재자에 불과한가? 그렇다면 그의 동상은 철거해야 하는가? 아니면 부끄러운 역사로 보존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그는 냉전적 보수세력이 신봉하듯이 대한민국을 수천 년의 가난에서 구한 ‘구국의 영웅’인가? 두 극단적 입장 중간에는 박정희가 경제발전에 일정한 공이 있지만 과오가 더 크다는 ‘공3과7론’으로부터 일정하게 과오가 있지만 공이 더 크다는 ‘공7과3론’ 등 다양한 입장이 있을 것이다. 이승만과 함께 박정희는 한국현대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인물임에 분명하다.

결국 이 문제는 1) 우리의 경제발전이 과연 박정희 때문에 가능했던 것인가? 아니면 박정희가 아니었어도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인가? 2) 만일 경제발전이 박정희 때문이라면 그 성과가 박정희가 가져온 많은 부정적 측면을 넘어서는 긍정적인 것이었는가라는 문제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18. 구미 박정희생가, 2021년 4월 16일자 참조). 그러나 그가 확실히 보여준 것이 있다. 그것은 ‘총으로 일어선 자, 총으로 쓰러진다’는 교훈이다. 그는 부인(육영수)을 총으로 잃었고 자신도 최측근의 총에 쓰러졌다.

후기 : 마산의 역사전쟁


▲ 창원시 회원천변에 설치되어 있는 ‘5.16군사혁명기념비’. 이 역시 민주화 이후 시민단체들이 철거해 개천에 버린 것을 주민들이 다시 세웠다. ⓒ임영일 박사 제공

박정희와 5‧16을 둘러싼 ‘역사전쟁’은 문래동 이외에도 여러 곳에서 계속되고 있다. 창원시 마산의 회원2동(회원남로)이 대표적이다. 회원천변에는 임진왜란 이후 우리 역사를 지켜봐온 500년 된 거목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방자한 세력이 재앙을 부르는 것을 우리 군대가 나서서 위무도 당당하게 혁명을 성공시켰다.” 그 밑에는 생뚱맞게도 이 같은 ‘5‧16군사혁명기념비’가 자리 잡고 있다. 5‧16쿠데타 발생 두 달 뒤인 1961년 8월, 쿠데타에 참가한 사단장 집안에서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박정희와 유신체제를 끝장낸 부마항쟁이 20주년 되던 1999년, 열린사회희망연대라는 한 시민단체가 “유신 철폐에 온 몸을 불태웠던 민주의 고장 마산에 아직도 유신의 잔재가 남아 있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며 이 비를 철거해 천변에 버렸다. 하지만 보수적 주민들이 비석을 끌어올려 원래의 자리에 다시 설치했다. 그 옆에는 동민을 대표한 보존회장의 이름으로 이를 다시 설치한 이유를 설명했는데, 이제는 여러 글씨가 없어져 읽기가 쉽지 않다. 남아 있는 글씨들을 복원해보면 ‘(…) 광명의 역사든 오욕의 역사든 (…) 보존하여 역사의 반면교사로 나라발전의 디딤돌로 삼아야 한다는 의미에서 (…) 다시 세운다’고 쓰여 있다.

손호철 서강대학교 명예교수

프레시안

☞기사원문: 철거냐 존치냐, 서울 복판 박정희 흉상을 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