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호철의 발자국] 54. 서울 명동 : 이승만에 의해 좌절된 친일 청산의 꿈

‘저승사자’. 김근태 의원을 고문을 해서 감옥살이를 했던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별명이다. 하지만 이근안 이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한 악명 높은 고문기술자, 즉 ‘원조 저승사자’가 있다. 그것도 일제를 위해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한 악독한 친일 고문경찰이 있으니, 그 이름은 노덕술이다.

“그는 들어가면 물고문하고 전기고문하고 반쪽 죽여 버리지요.” 1930년대 노동자들의 메이데이 시위에 참석했다가 고문당한 김재학의 조카의 증언이다. 김재학뿐만이 아니라 박일형, 김규직, 유진흥, 문재순, 추학, 차일명. 노덕술이 고문한 독립운동가들의 일부다.

그는 동래경찰서 재직 중인 1928년 동래청년동맹 집행위원장 박일형을 고문했고, 부산 제2상업학교 동맹휴교 배후를 캔다고 김규직, 유진흥을 고문해 김규직은 고문후유증으로 옥사했다. 동래고등보통학교가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자 석방을 위한 동맹휴학을 벌이자 문재순, 추학, 차일명 등을 잡아다가 고문했다. 고문 덕으로 그는 조선인 경찰로는 최고위직에 올랐고 두 번이나 상을 받았다.

“찬성 103명, 반대 6명으로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되었습니다.” 1948년 9월 7일 제헌국회는 역사적인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을 제정했다. 대한민국 국회가 제정한 3번째 법이다. 친일경찰에 의존하고 있는 이승만은 이 법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정부가 제출한 양곡매입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 격으로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법안에 서명했다.

주목할 것은 제헌국회는 조선공산당 등 좌파는 말할 것도 없고 중도좌파적인 여운형, 우파인 김구도 단독정부 수립이 분단을 영속화한다는 이유로 선거에 참가하지 않아 ‘친일지주(친일경찰 정도의 친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들이 다수였던 한민당과 일부 소장파 의원들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조차도 친일 청산은 거부할 수 없는 민족적 과제라고 생각해 반민법을 제정한 것이다.

이 법에 의해 만들어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는 1948년 10월 명동에 사무실을 얻고 활동에 들어갔다. 임정 문화부장 출신으로 국회의원이었던 김상덕이 위원장을 맡은 특위는 조사위원회 이외에도 특별검찰, 특별재판소를 설치했다. 특위는 일본국과 조선총독부에 적극 협력한 자, 일제경찰과 군부대, 헌병대 등에서 첩자 등으로 활동한 자, 위안부와 학도병 강제징용을 권유하거나 찬양한 자 등으로 반민족행위를 정의하고 이에 해당되는 7000명을 파악하여 검거에 들어갔다.


▲ 민족문제연구소가 최근 만든 식민지박물관에는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에 관련된 자료, 반민특위 관련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손호철

▲ 이천민주화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반민특위 위원들 사진 ⓒ손호철

1949년 1월 8일, 제1호로 화신백화점 사장이자 최대 재벌이었던 박흥식이 이승만 정부의 비호 아래 해외로 도피하려다가 체포됐다. 이어 일본밀정이었던 이종형 대동신문 사장, 유명 문인 이광수와 최남선 등이 잡혀왔다. 이들은 자신이 민족지도자들이라 친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변명했다.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모두 황국신민이 됐을 것이다.” 이광수의 변명이다. 말이라도 못하면 덜 미울 텐데,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 독립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광수, 최남선 등 변절한 주요 친일 인사 사진 ⓒ손호철

반민특위는 여자 60명을 포함한 682명을 조사해 모두 305명을 체포했고, 자수 61명, 영장취소 30명, 193명은 도주 등으로 체포하지 못했다. 특히 문제는 악독한 친일경찰을 심판하는 일이었다. 친일경찰의 핵심인 노덕술 등은 반민특위를 와해시키기 위해 반민특위 핵심부와 정부 요인의 암살을 기도했으나 이를 위해 고용한 백인태가 자수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도주하던 노덕술은 결국 체포되어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됐다. 자신의 손발이 잡히자 이승만은 “노덕술은 반공 투사이니 석방하라”고 요구했지만 반민특위는 이를 거절했다. 이승만은 내무부 차관 장경근을 통해 조작이라는 비판을 듣는 ‘국회 프락치 사건’을 터트리고 반민특위를 직접 공격했다. 국회 프락치 사건은 김약수 등 반민특위에 적극적이었던 소장파 ‘진보적’ 의원들이 남로당과 접촉하고 공산당에 협조했다고 구속한 사건이다.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끌려가는 친일파들(이천민주화운동기념관 전시 사진) ⓒ손호철

1949년 6월 6일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날 중 하나다.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경찰 80명이 반민특위 청사를 습격, 조사관들을 폭행하고 조사 서류를 강탈해간 것이다. 이어 9000명의 경찰들이 사실상의 반민특위 해체를 요구하며 집단 사표를 제출했다. 국회는 반민특위의 원상복귀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반민특위 습격이 자신이 직접 지시한 것이라며 거부했다. 국회는 이같이 국회를 무시하는 대통령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의원내각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반민특위 문제에서 1952년 부산정치파동의 단초가 만들어진 것이다(‘손호철의 발자국’ 10. 부산정치파동 , 2021년 3월 29일자 참조).

국회 프락치 사건은 이를 담당했던 대표적인 공안검사인 오제도 검사가 후에 “사실은 무죄였다”고 밝히는 등 논쟁이 많은 사건이다. 설사 국회 프락치 사건이 조작이 아니고 사실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민특위를 해체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국민 다수가 절대적으로 지지했고 바랐던 친일파 처벌이 북한의 지시에 의한 것이었나? 북한보다 더 강하게 친일파를 청산하는 것이, 남한은 친일정부라는 오명을 벗고 북한과 정통성에서 떳떳하게 경쟁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나?

이승만은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에서 교포들이 보내준 돈으로 ‘편안하게’ ‘호화생활’을 하며 외교를 통해 독립운동을 한 만큼 그 의미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을 수는 있지만, 친일파라고는 할 수 없는 ‘독립운동가’로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된 사람이다(나중에 탄핵을 당했지만). 문제는 그런 그가 왜 여론의 압도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민특위를 공격하고 노덕술 같은 사람을 구해 중책에 맡겼느냐는 것이다.

그 답은 해방정국의 구조적 상황에 있다. 해방정국은 일제 강점기에 좌파가 독립운동을 주도했고 미군정의 여론조사에서도 국민의 77%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바라는 등 기본적으로 좌파가 절대적으로 우세한 분위기여서, 그 같은 친일경찰이 아니면 그의 수족으로 움직일 수 있는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거기에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있다.

모두 잘 아는 이야기지만, 이승만의 반민특위 공격 후 친일파는 해방 후 현대사의 승자로 승승장구해 왔다. 임종국의 선구적인 친일문학연구와 이를 이어받은 민족문제연구소의 노력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된 뒤 60년이 지난 2009년 뒤늦게 5207명(중복자 포함)의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명단을 실은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됐다.

정부 차원에서도 노무현 정부 들어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를 구성해 조사활동을 벌여 제1차 106명, 제2차 195명, 제3차 705명의 친일파 명단을 발표했다(이 명단에는 일왕에서 혈서로 충성을 맹세하고 일본 육사로 입학해 일본군으로 근무한 박정희가 빠져 논란이 됐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너무 늦었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이들 중 노덕술 등 225명은 정부에서 훈장 등 서훈을 받았는데, 2019년 현재 25명에 대한 서훈이 취소됐고 노덕술 등 200명에 대한 서훈은 친일 판정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지되고 있다.

친일 청산의 실패는 해방 후 건국 과정에서 민족정기를 바로 잡는데 실패했을 뿐 아니라 지금도 한국 정치의 발전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한국 정치의 기본 프레임은 미래의 비전을 가지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우파는 민주당과 같은 ‘자유주의(리버럴)’ 세력을 ‘친북좌파’라고 공격하고, 자유주의 세력은 우파를 ‘친일’이라고 공격하는, ‘친북 대 친일’이라는 낡은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일부 민주당지지 세력이 보수 우파에 대해 행하는 가장 쉬운 공격수단이 ‘토착왜구’라고 이름 붙이고 ‘죽창가’ 운운 하는 것이다. 21세기 들어서도, 이 같은 시대착오적인 프레임이 계속되고 있는 것은 반민특위의 실패로 친일파 청산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 곳은 민족말살에 앞장섰던 친일파들을 조사, 처벌하던 반민족행위자처벌위원회 본부가 있던 곳임.” 명동에 가면 롯데백화점 건너편 쪽에 옛 KB국민은행 명동본점 건물이 있다. 반민특위가 있던 곳으로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신영복 선생이 글씨를 쓴 이 같은 표시석을 만들어 1층 화단에 설치했다. 그러나 어느 날 그곳에 가보니 표시석은 보이지 않았다. 알아보니, 잘 보이지 않도록 주차장 옆으로 옮긴 것이다. 표시석은 반민특위처럼 이렇게 찬밥 대접을 받았다.

표시석의 수난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 건물이 팔려 호텔 건설이 시작되자 일본 관광객을 우려한 호텔 측은 표시석의 철거를 요구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결국 이 표시판을 철거해,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연구소가 새로 만든 식민지역사박물관(청파로 소재) 문 앞에 세워 놓았다.


▲ 1999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들어 반민특위 터에 설치했던 표시석. 최근 그 터에 호텔이 건설되면서 철거해 식민지박물관 입구에 설치했다. ⓒ손호철

이제는 일본 관광객들을 비롯한 외국인들을 위한 고급 호텔 공사가 한창인 반민특위의 역사적 현장에 서자, 50년 전에 이승만의 개인적인 욕심에 의해 비극적으로 끝난 반민특위의 슬픈 운명에 너무 가슴이 아팠다. 나아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결국 식민지역사박물관 문 앞에 세워진 표시판의 처량한 신세가 잘 보여주듯이, 이를 기억하기 위한 추모 사업 역시 반민특위의 역사만큼 고난에 가득차고 안타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 명동에 있었던 반민특위 터는 몇 년 전 매각되어 고급 호텔을 짓고 있다. ⓒ손호철

프레시안

☞ 기사원문: 수난의 반민특위, 표시석도 찬밥 신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