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선기의 섬이야기

영화 해적의 본거지, 세토내해 섬

 

홍선기(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교수, 생태학)

일본의 다도해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세토내해(瀬戸内海)에는 약 700여개의 유·무인도가 있다. 세토내해는 서쪽으로부터 규슈(九州), 그리고 시코쿠(四國), 혼슈(本州)의 오사카만까지 이어지는 일본 최대의 도서 연안 지역이다.

조선시대 조선통신사 사절단이 일본에 들어갈 때 이 세토내해를 이용하여 오사카에 도착, 육로로 이동하였다. 좁은 수로에 섬이 많다 보니 물살이 빠르고 거칠어서 웬만큼 물길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세토내해를 항해할 수 없었기에 내해의 중간 거점 섬에 머물며 물길을 잡고, 안내인에 안내에 의하여 수로를 왕래하였다.

[caption id="attachment_217377" align="aligncenter" width="650"] 일본 세토내해 구루시마(來島)에서 바라 본 섬과 수로. ©홍선기[/caption]

그러나, 한때 이곳은 일본 무라카미(村上) 해적(일본에서는 수군水軍으로 인정하고 있음)의 근거지로서 히로시마현(廣島縣), 카가와현(香川縣), 에히메현(愛媛縣)에 포함된 섬들이 대표적인 곳이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 영화 에 출연했던 일본 해적 구루시마(來島)도 실제로는 인물이라기보다 해적의 본거지 구루시마(來島) 섬을 의미한다. 그러나 일본 지역 사료에 의하면, 구루시마 무라카미(來島村上)라는 인명으로 표기되어 기록되어 있다. 이들 해적 세력은 1400년대부터 당선(唐船, 일본에서 건조되어 중국 무역에 사용된 선박들. 배 형태가 중국배의 모형을 따서 당선이라고 칭함) 보호를 통하여 해상 세력이 되었고, 이후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크게 활동력을 넓혔지만, 임진왜란 당시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것으로 확인된다. 일본 정부는 2016년 일본유산 제2기 19개 지역을 발표하면서 이 일대를 「일본 최대 해적의 본거지: 게이요우 제도(芸予諸島) - 소생하는 무라카미해적의 기억-」으로 지정하였다. 무라카미수군(村上水軍)이 활약했던 세토내해 해적 본거지 섬 42개가 포함된다.

필자는 세토내해 섬을 수년간 여러 차례 조사하면서 해적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세토내해 해적들은 수로를 통과하는 데 일종의 통행료를 받으면서 해운의 안전을 보장하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섬 주민들도 본인들이 해적 출신의 집안이라는 사실을 서슴없이 밝히고 있어서 족보에 의한 계급 사회 문화를 중요시하는 우리나라와는 인식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근현대에 들어오면서 연안 도시가 형성되고, 그 도시 확장에 따라 주변 섬들이 행정적으로 도시에 편입되고 개발되어 과거의 역사 흔적은 찾을 수 없으나 간혹 박물관이나 오래된 마을을 찾다 보면 그 유적을 볼 수 있다. 히로시마현(廣島縣) 구레시(吳市)에 포함된 오사키시모지마(大崎下島)에는 16세기 형성되어 크게 번성했던 미타라이(御手洗) 포구가 있다. 지금은 한적한 포구 마을이지만, 에도시대에는 세토내해에서 수확한 멸치, 다시마 등의 해산물과 쌀의 집하장이 설치되어 오사카에 납품하는 중계 무역을 했던 물류와 문화의 중심 포구였고, 대규모 유곽(遊廓)이 형성되었다.

[caption id="attachment_217378" align="aligncenter" width="650"] 오사키시모지마(大崎下島)의 미타라이(御手洗) 포구 전경. 에도시대의 포구 마을경관이 잘 보전되고 있다. ©홍선기[/caption]

미타라이(御手洗)는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그리고 독일의 의사이자 생물학자였던 지볼트(Philipp Franz Balthasar von Siebold) 등 메이지(明治) 시대를 열어 일본 근대화를 앞당기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사람들이 머물렀던 유서 깊은 포구이다. 섬 주민들에 의하면 조선통신사 일행이 오사카로 들어가기 이전에 수로를 지나면서 머물렀던 섬 중에 하나였다고 하니 당시 섬의 사회 경제적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유난히 번창했던 미타라이(御手洗)의 유곽(遊廓)에서 활동했던 여성(遊女)들의 스토리는 이곳을 찾은 학자, 사상가, 작가들의 여러 문학 작품에서 묘사되고 있다. 특히 일본의 대표적인 섬 민속학자인 미야모토 쯔네이치(宮本常一)의 저서 (1959년, 국내미번역) 뿐 아니라 여러 영화에서도 밝혀지고 있다. 지금도 당시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고, 그 마을의 역사 스토리를 엮어서 영화나 관광의 콘텐츠로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 연륙연도와 도시와의 통합 이후 인구 감소와 산업 쇠퇴 등으로 그 번영의 흔적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caption id="attachment_217379" align="aligncenter" width="650"] 오사키시모지마(大崎下島)의 미타라이(御手洗) 포구의 에도시대 마을 전경. 1994년 일본 중요전통 건조물군 보존지구(重要傳統的建造物群保存地區)로 지정되었다. ©홍선기[/caption]

고가(古家)의 재건, 미술관 건립, 예술가 마을 조성 등 예술로 아픈 섬 역사를 덮고 미화하는 카가와현 나오시마(直島, 중공업 공장에서 나온 중금속 폐기물로 죽어가던 황무지가 '예술 섬'으로 거듭났다고 화제가 되는 곳이다. 인구 3000명 섬에 현대미술관이 3개나 되고, 모네, 제임스 터렐, 잭슨 폴록, 데이비드 호크니 등 거작(巨作)이 전시되어있다. 코로나19 발생 이전에는 한 해 100만 명이 찾는 명소였다)를 벤치마킹하는 우리나라 섬들도 있지만, 오히려 해적 본거지의 정체성을 드러내어 차별화시키는 구루시마를 비롯한 다른 세토내해 섬 주민의 활동을 보면서 무엇이 진정 섬 살리기인가를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