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인천 6월 항쟁의 중심지인 부평역 광장에는 ‘6월 민주항쟁 30주년 인천조직위원회’가 건립한 기념 표석이 자리 잡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지부장·김재용)는 12일 인천 부평역 일원에서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낸 인천지역 6월 항쟁의 현장을 돌아보는 ‘87년 6월 항쟁 현장 탐방’ 행사를 개최했다.

인천광역시의 지원을 받아 ‘2021년 인천지역 역사현장 시민답사 프로그램’ 첫 번째 순서로 전행된 이날 행사는 안재환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가 해설을 맡았다. 답사단은 오전 10시 부평역을 출발해 백마장 입구-세림병원-부평경찰서-현 산곡역 앞을 거쳐 영아다방 앞까지 3시간 가까이 탐방을 이어갔다.


▲ 안재환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이사가 ‘인천에서 벌어진 87년 6월 항쟁의 진행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6월 항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87년 1월 14일 남영동에서 고문을 받다가 숨진 박종철 열사의 사망 사건이었다. 하지만 인천의 6월 항쟁은 한 해 전인 1986년 인천 전역에서 불꽃처럼 일어난 5.3 항쟁 때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

1년 뒤인 1987년 6월 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최로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에서 개최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와 때를 맞춰 부평역을 중심으로 대학과, 성당, 교회, 동인천역 등 시내 곳곳에서 대규모 가두시위가 전개됐다.

‘민주헌법쟁취 인천지역 공동대책위원회’가 이날 오후 6시 부평역 광장에서 개최한 궐기대회는 ‘장기집권 획책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는 대형 플랜카드를 앞세운 수천 명의 시위대가 광장과 거리를 가득 메웠다. 택시기사들은 경적을 울렸고 거리의 시민들을 박수를 보냈다.

상점 주인들은 빵과 음료수, 휴지를 건네며 너나없이 경찰에 쫓기는 시위대를 숨겨줬다. 경찰은 이날 집회를 빌미로 집회를 준비한 공동대책위 7명을 수배해 그중 안영근(전 국회의원)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집행국장 등 12명을 구속했다.

인천 항쟁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6월 18일 부평구청 앞에서 열린 ‘호헌 철폐와 최루탄 추방을 위한 인천 시민대회’였다. 오후 6시가 되자 불어난 시위행렬은 2만 명을 넘어서 구청 부근과 인근 행복예식장 일대가 시위대로 넘쳐났다.


▲ 이남희 당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투쟁부장이 6월 항쟁 당시 인천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을 소개하고 있다.

엄청난 시위대에 두려움을 느낀 경찰은 ‘부평만행사건’이라고 불릴 정도로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두르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700명이 넘는 시민, 학생, 노동자들을 연행했다. 주변 철마산으로 피신했던 시위대 일부는 청천동과 효성동 파출소를 공격하기도 했다.

전국 37개 도시에서 일제히 ‘범국민대회’가 열린 6월 26일 오후, 부평시장 골목에서 5백여 명의 시위대가 나무십자가를 앞세우고 구호를 외치며 ‘범시민 평화대행진’을 시작했다. 부평우체국과 백마장 사이의 부평로에서는 시민과 노동자, 학생 등 2천여 명이 도로를 점거하여 연좌시위를 벌였다. 가두의 시민들은 “최루탄을 쏘지 마라!”고 외치며 경찰의 무차별 폭력진압에 항의했다. 시위대 일부는 경찰에 연행되는 시민들을 구출할 만큼 놀라운 투쟁의지를 보였다. 안 이사는 “이날 부평역 인근에서부터 백마장 입구까지는 그야말로 ‘해방구’였다”고 회고했다.


▲ ‘6월 항쟁 현장 탐방’ 행사 참가자들이 인천 6월 항쟁 당시 집회 참가자들이 무더기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던 부평경찰서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전두환 정권은 6월 항쟁이 벌어진지 19일 만에 굴복하고 말았다. 노태우는 ‘6·29 민주화 선언’을 통해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한다”고 발표하면서 인천 시민들의 항쟁은 마침내 승리로 마무리됐다.

안 이사는 “인천지역의 6월 항쟁의 가장 큰 특징은 노동자 주도로 이뤄졌다는 점”이라고 밝히고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민주화 발전과 사회운동의 비약적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글·사진 정찬흥 기자 [email protected]

<2021-06-13> 인천일보

☞기사원문: 민족문제연구소 인천지부, ‘인천지역 6월 항쟁 현장 탐방’ 행사 개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