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비망록 70]

평식원(平式院) 혹은 상공과 용산분실 자리의 공간 내력
일본의 기준과 합치되도록 만든 것이 근대 도량형법(度量衡法)

이순우 책임연구원

지난 2006년 12월 4일에 산업자원부 기술표준원의 관리유물인 「국가표준 근대도량형기」(154건, 331점)가 문화재청 고시 제2006-103호를 통해 등록문화재 제320호로 등록고시되었다. 이와관련하여 문화재청에서는 2006년 11월 8일자로 「근대기(1902~1945) ‘국가표준 도량형기’ 문화재로 등록예고, 대한제국 법률 제1호로 탄생된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냈는데, 그 가운데 이러한 구절이 보인다.

대한제국 시기에 공포된 「도량형법」의 제정 및 개정 내용을 담고 있는 1905년 3월 29일자(오른쪽)와 1909년 9월 21일자(왼쪽)의 1면 모습이다. 1909년의 개정 내용을 보면 종전의 ‘척량법(尺兩法)’은 일본식 ‘척관법(尺貫法)’을 기본으로 하는 형태로 바뀌었고, 더구나 척(尺), 승(升), 관(貫)은 ‘일본 도량형법이 정한 바와 같다’는 구절을 노골적으로 담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 그러나 과거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도량형이 지역마다 달랐다.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도량형을 정리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개항 이후 근대적인 도량형을 도입하기 위하여 1902년(광무 6년)에 평식원(平式院)이라는 담당 관청을 설립하여 서양식 도량형제(미터법)를 일부 채택하고 1905년(광무 9년) 3월 21일에 이것을 바탕으로 대한제국 최초의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정하였다. 이처럼 당시 고종은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제정할 정도로 이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으나 새로운 도량형이 정착되기까지는 그 후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미돌법(米突法)을 아시나요?」라는 별도의 첨부자료를 통해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다.

 

…… 이러한 당시 사회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에서는 1905년(광무 9년) 3월에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정하고 농상공부에서 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 법은 1902년에 발표되었던 도량형법과 내용은 같으나 법률 제1호로 공표할 정도로 도량형 개정에 대하여 당시 정부가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살펴보면 근대적 도량형 제도의 도입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데 있어서, 도량형법이 당시 법률 제1호였다는 사실에 기대어 그 의의를 더욱 확대해석하고 있는 부분이 확연히 눈에 띈다. 그런데 도량형법(度量衡法)을 일컬어 대한제국 최초의 법률이었다는 맥락과 결부시키는 것은 명백한 착오이다. 그 시절에는 지금의 법률이나 대통령령처럼 일련번호가 축차적으로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해당 연도별로 제1호부터 번호를 새로 붙여나가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량형법이 법률 제1호인 것은 맞으나, 이건 광무 9년 즉, 1905년 바로 그해에 만들어진 첫 번째 법률이라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 아닌 게 아니라,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출범한 것이 1897년인데 무려 8년이나 지나서야 겨우 법률 제1호가 제정되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이를 테면, 법률 제1호가 해마다 하나씩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므로 이들 법률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통상 당해연도의 연호(年號)를 앞쪽에 덧붙여 표기하는 것이 적절한 용법이라고 하겠다.

도량형 관련 법률 제정 연혁

통감부 통감관방에서 펴낸 (1908), 264~265쪽을 보면, 근대시기 도량형 제도의 도입 연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한 대목이 남아 있다.

제19호(1907년 1월 1일)에 수록된 도량형제조소 기사인 일본인 이노우에 요시후미(井上宜文)의 인물사진과 그 시절에 사용되던 도량형 원기(度量衡 原器)의 모습이다.

 

본디 한국의 도량형제도는 매우 불규율(不規律), 불완전(不完全)하여 거의 계량(計量)의 표준(標準)으로 삼기에 충분한 것이 없어서 명치 35년(1902년) 궁내부(宮內府)에 평식원(平式院)을 설치하고 도량형 개정의 사무를 관장하는 동시에 도량형기 전매(度量衡器 專賣)의 목적으로 동원중(同院中)에 도량형기제조소(度量衡器製造所)를 세워 일본인 이노우에 요시후미(井上宜文)로 하여금 제조검정(製造檢定)의 일을 전담시켰으며 또한 도량형규칙(度量衡規則)을 제정 공포하였으나 신제(新制)의 실시(實施)가 전국(全國)에 미칠 수 없었고 가까스로 경성(京城)과 인천(仁川) 등의 일부에 다소간 신도량형기(新度量衡器)의 판출(販出)이 있었을 뿐 곧이어 평식원을 폐지하고 농상공부(農商工部)에 도량형과(度量衡課)를 설치하였다가 명치 40년(1907년)에 다시 관제(官制)를 개정하여 도량형사무국(度量衡事務局)으로 하고 이노우에 요시후미의 관리(管理)를 해제하였으며, 동년말(同年末)의 관제개정에 따라 재차 이를 농상공부의 일과(一課)로 복귀시켰다. 법규(法規)에 관해서도 그 후 다소 개정(改訂)한 바가 있었지만 불비(不備)의 점(點)이 여전히 적지 않으므로 목하(目下) 법률을 개정(改正)하여 제도를 확정(確定)할 필요를 인식하고 있으나 그 실시의 곤란을 염려하여 아직 수행(遂行)에 이르지 못하였다.

 

여기에 등장하는 이노우에 요시후미(井上宜文, 1868~?)라는 일본인은 일본 교토 출신의 철도차량 기술자이며, 일찍이 1899년 4월에 한국으로 들어와 전차 차량의 납품에 관여했고 1900년 3월에는 경부철도 철도위원의 한 사람으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그 이후에 평식원 도량형제조소의 기사 및 도량형제조검정소(度量衡製造檢定所)의 관리책임자로 일한 경력을 거쳐 일제강점기로 접어든 이후에는 합자회사 이노우에 기스도(合資會社井上宜壽堂, 1911년 12월 10일 설립)를 만들어 이곳에서 소독약이나 제약, 약품판매, 약종무역(藥種貿易), 비누제조 등의 사업을 전개한 바 있다.
그러한 그에게 도량형기 제조와 관련한 제반 설법(設法), 설비(設費), 용빙(傭聘)에 관한 사항을 위임(委任)하기 위해 평식원의 도량형기 제조기술자로 채용한다는 계약서가 성립한 것은 1902년 8월 26일의 일이었다. 16권에 수록되어 있는 관련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담긴 것으로 확인된다.

 

일(一), 평식원(平式院)은 이노우에 요시후미의 입안(立案)에 계(係)한 도량형법(度量衡法)을 채용시행(用施行)하고 기(其) 제조사업(製造事業)을 일체위임(一切委任)하되 제반사무(諸般事務)를 총무과장(總務課長; 한상룡)과 협의(協議)하여 타판(辦)할 사(事).
이(二), 도량형기제조장(度量衡器製造場) 설비(設備)는 별지(別紙) 설계품목서(設計品目書)에 유(由)하여 기(其) 경비수소용지발(經費隨用支撥)할 사(事). 단(但), 해설비(該設備)의 부족(不足) 급() 부득이(不得已) 증가(增加)하는 경비(經費)는 이노우에 요시후미에게 차용(借用)하여 지급(支給)할 사(事).
삼(三), 제작기계(製作機械) 재료(材料) 급(及) 공급품(供給品) 등(等)의 가격임기(價格臨機)하여 정(定)할 사(事).
사(四), 평식원(式院)은 이노우에 요시후미의 입안(立案)에 계(係)한 도량형법(度量衡法)을 의용(依用)하되 장래(將來) 무단(無端)히 내외인(內外人)에게 해제조권(該製造權)을 이허(移許)치 아니할 사(事).

 

이러한 사정에 비춰보면 1902년에 제정된 「도량형규칙(1903.7.1. 시행)」도 이노우에의 의중이 전적으로 반영된 결과인 듯하다. 그는 이곳에서 도량형 관련 법제를 정비하는 일은 물론이고 도량형기의 제작 및 수입과 검증 등 일련의 과정을 독식하다시피 하였고, 그의 이러한 지위는 농상공부 도량형사무국이 신설되는 1907년 2월의 시점까지 지속되었다.
그리고 1905년 3월에 이르러 ‘척량법(尺兩法)’을 기본으로 한 「광무 9년 법률 제1호 도량형법(1905.11.1. 시행)」이 새로 제정된 것도 알고 보니, 기존의 「도량형규칙」에서 도형기(度衡器)는 일본의 것과 동일하게 되어 있었으나 양기(量器, 되의 크기)는 서로 달랐기 때문에 이것마저도 일본의 단위에 통일시키려는 의도에 따른 조치였던 것이다.
그 이후에 다시 1909년 9월에 이르러 ‘척관법(尺貫法)’을 기본으로 삼아 새로 개정된 「융희 3년 법률 제26호 도량형법」에서는 아예 드러내고 도량형의 단위를 일본의 그것과 그대로 일치시키고 있었다. 가령, 정(町, 60칸)이니 평(坪, 6척 평방)이니 돈(匁, 1천분의 1관)이니 하는 일본식 계량단위가 법률조문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도 이때의 일이었다. 실제로 이 법률의 조문에는 이러한 구절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확인된다.

제23호(1926년 3월호)에 포함되어 배포된 ‘미터법 환산 조견표’이다. 「대정 15년 제령 제6호 조선도량형령」의 제정에 따라 외견상으로는 미터법이 전면 시행되긴 했으나, 실제로는 여전히 돈(匁)이라든가 관(貫)이라든가 하는 일본식 계량단위를 그대로 미터단위로 대입하여 사용하는 방식이 유지되었다.

 

1928년 4월 1일자에 수록된 야마나시 조선총독(山梨 朝鮮總督)의 미터법 전면시행 2주년 기념휘호이다. 여기에는 “적적분명 호리차(的的分明 毫釐差)”라고 적고 있는데, ‘호리’는 아주 작은 길이 단위를 말하는 것이므로, 이는 결국 “미세한 차이까지 뚜렷하게 분간한다”는 정도의 뜻이 된다.

 

제1조(第一條) 매매수수(賣買授受) 우(又)는 증명(證明)에 사용하는 도량형(度量衡)의 명칭(名稱), 명위(命位) 급(及) 도량형기(度量衡器)에 관하여는 본법 소정(本法所定)에 의(依)함.
제2조(第二條) 도량형(度量衡)의 명칭(名稱) 급(及) 명위(命位)는 좌(左)와 여(如)함.…… (중간생략) …… 척(尺), 승(升) 급(及) 관(貫)은 일본 도량형법(日本度量衡法)의 소정(所定)과 동(同)함. 제1항(第一項) 외(外)에 일본 도량형법(日本度量衡法)의 인(認)한 도량형(度量衡)의 명칭(名稱), 명위(命位) 급(及) 비교(比較)는 차(此)를 적법(適法)한 자(者)로 함.

 

애당초 도량형제와 관련한 일제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22권에 수록된 「전원국(典圜局) 건물 및 평식원(平式院) 부지수용에 관한 건(1904년 11월 25일 발신)」 제하의 문건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당시 경의철도의 부설로 인하여 하마터면 평식원 자리가 고스란히 그 안쪽으로 편입되어 사라질 뻔한 일이 전개되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 일을 막아준 사람은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주한일본공사였던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연유는 다음과 같은 사정 때문이었다.

 

…… 앞으로 또 경의선로(京義線路)는 지금까지 평식원(平式院)의 한쪽 옆을 통과하고 있습니다만, 혹은 그 선로를 변경하여 평식원의 중앙부를 재단(裁斷)하는 일이 발생할 것이라고 해원 주관인(該院 主管人)으로부터 신고한 바 있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평식원이라는 것의 설립은 본래 제국정부(帝國政府)의 권고(勸告)에 따라 불규율(不規律)한 한국 전체의 도량형기를 거의 우리(즉, 일본)제도와 동일한 단위(單位) 아래에 두려는 저의(底意)에서 나왔으며, 그 설립에 관해 우리 제일은행(第一銀行)으로부터 차관(借款)을 일으켜 겨우 현재의 건물을 건설하여 경영에 착수한 내력(來歷)에 비춰, 만일 우리 군용철도(軍用鐵)의 필요상(必要上) 선로를 해원 부지내(該院地內)로 변경함에 있어서는 자연히 해건물(該建物)을 다른 곳으로 이전할 필요가 생길 것이므로 이에 상당한 이전료(移轉料), 기타 건축비(建築費) 등을 지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일껏 우리의 권유에 기초한 도량형사업(度量衡事業)을 중도에 좌절(挫折)시킬 염려가 있사오니, 이 점을 이해하시도록 이상의 개략 내용은 와타나베 소좌(渡邊少佐)에게 내화(內話, 비공식 대화)해두었습니다. 공염(共念)하기 위해 고량(考量)을 얻고자 합니다. 명치 37년(1904년) 11월 25일. 임시군용철도감부(臨時軍用鐵道監府) 야마네 소장 각하(山根少將閣下) 친전(親展).

 

결국에 잇따른 도량형 관련 법률의 제정 및 개정은 그 자체가 일본세력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그들에게 익숙한 방식의 도량형 단위 및 제도를 바로 이 땅에 그대로 옮겨놓고자 하는 저의를 바탕에 깔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중에 일제강점기로 접어들어 1926년 2월에 제정된 「대정 15년 제령 제6호 조선도량형령」에 따라 ‘미터법(米突法)’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식 척관법(尺貫法)에다 단지 미터법의 수치를 대입하여 사용하는 관행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그런데 근대시기 도량형제의 도입 및 시행과 관련하여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의 하나는 평식원에 속한 ‘도량형제조소(용산 소재)’였다. 원래 「궁내부 관제(宮內府 官制)」의 개정을 통해 평식원이 처음 설치된 때는 1902년 7월 21일이었는데, 이 당시에는 아직 따로 정해진 공간이 없었으므로 북일영(北一營)이라거나 원동(院洞)의 전군수 이종석 씨가(前郡守 李奭鍾氏家)로 그 위치를 정한다는 신문기사가 몇 차례 등장한 적이 있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도량형제조소의 청사가 마련된 곳이 바로 용산 당현(堂峴, 당고개) 지역이었다.
정확한 시기까지는 가늠하기 어려우나 1903년 9월 9일자에 수록된 「평식실시(平式實施)」 제하의 기사를 보면, 여기에 처음으로 ‘용산방’이라는 지명이 구체적으로 언급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평식원(平式院)에서 도량형척제조사무소(度量衡尺製造事務所)를 용산방(龍山坊)에 설치(設寘)하고 견습생(見生)을 시취(試取)하는데 경성학당(京城學堂) 학원중(學員中)으로 10인(人)을 선택(擇)하였다더라.

 

1929년 4월 1일자에 수록된 미터법 시행 3주년 특집기사에는 상공과 용산분실의 모습도 함께 소개되어 있다. 대문의 기둥에는 ‘조선총독부 식산국 상공과분실’과 ‘조선미터협회’의 간판이 나란히 걸려 있고, 사진 아래의 설명문에는 이곳이 “미터법의 참모본부”라는 수식어가 포함되어 있다.

(1929)에 나타난 총독부 식산국 상공과 용산분실(원정1정목 25번지 구역)의 표시 위치이다. 이곳의 전면 도로변에는 용산경찰서(龍山警察署)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은 지금의 원효로와 백범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해당하며, 흔히 1978년 이후 30년 가량 용산구청이 있었던 곳으로도 기억되는 공간이다.

상공과 용산분실의 구내 배치 상황이 담겨 있는 「용산 상공과분실 창고 기타 부지평면도」이다. 각종 창고와 검정실 및 사무소의 위치가 잘 묘사되어 있으며, 왼쪽 아래에는 도로면에 접한 곳에 자리한 용산경찰서(龍山警察署)의 구역도 함께 표시되어 있다. (ⓒ국가기록원)

(1937)에 수록된 용산경찰서의 전경이다. 용산경찰서가 상공과 용산분실 바로 앞쪽에 처음 터를 잡은 것은 1911년 4월의 일이며, 중간에 용산헌병분견소로 전환된 시절이 있긴 했으나 그 이후 1977년 7월 2일에 도로확장 때문에 철거되어 시립남부병원 자리(원효로 1가 12번지)로 청사를 옮길 때까지 줄곧 이곳에 머물렀다.

용산꿈나무종합타운(2017.12.1일 개관)으로 변신한 옛 용산구청 청사의 모습이다. 현재 이 구역 안에는 원효지구대, 용산경찰서 방법순찰대, 용산경찰서 교통센터 등의 시설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데, 이것은 옛날 용산경찰서 시절의 흔적인 동시에 여전히 토지의 지분 일부가 경찰서의 몫으로 남아 있기 때문으로 알려진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이 주로 ‘상공과 용산분실(商工課 龍山分室)’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었고, 한때 ‘도량형소(度量衡所)’라고 불렀던 시절도 있었다. 해방 이후의 시기에도 이곳은 역시 ‘도량형소’라거나 ‘중앙계량국(中央計量局)’이라는 이름을 달고 예나 다를 바 없는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으로 남았다. 이 구역은 일제강점기의 지번상으로 “원정 1정목(元町 一丁目, 지금의 원효로 1가) 25번지(면적 2,702평)”에 해당하며, 그 전면의 도로변에는 일찍이 1911년 4월 이후 용산경찰서(龍山警察署, 용산헌병분견소 시절 포함)가 줄곧 자리했던 곳으로도 기억되는 공간이다.
이 자리는 특히 용산구청(龍山區廳, 1978.4.18~2010.4.8)이 30년 가까이 터를 잡고 있었던 사실을 떠올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듯하다. 용산구청이 들어서기 직전에는 이곳이 ‘통일연수소(統一硏修所)’로 사용되었던 흔적도 확인되는데, 정작 1970년대 초반까지는 확실하게 남아 있던 중앙계량국이 정확하게 언제 이곳에서 사라진 것인지는 아쉽게도 관련자료가 확인되지 않는다.
2010년 4월에 용산구청이 이태원 쪽에 신청사를 건립하여 그곳으로 옮겨간 이후 원효로에 남은 옛 청사는 용산꿈나무종합타운(2017.12.1일 개관)으로 바뀌었고, 지금 이 구역 안에는 용산구 보건분소, 원효지구대, 용산경찰서 방범순찰대와 교통센터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는 상태이다. 그 옛날 평리원 도량형제조소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곳에 도량형 또는 계량관련 시설이 자리했던 기간을 통틀어 합쳐보면, 세월이 무려 70년도 더 된 것으로 나타난다.
비록 근대시기 도량형제도의 도입과 시행과정이란 것이 다분히 일제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물이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 오랜 세월에 걸쳐 이곳이 도량형 제도의 본거지였다는 점에서 그러한 내력을 나타내는 작은 표석 하나쯤은 남겨두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