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지도자’로 둔갑한 조선총독부의 모범생
– 김성수(金性洙) 장례식 풍경

강동민 자료팀장

동아일보에 실린 인촌 김성수 부고와 장례 안내

해방공간을 거세게 휘몰아치던 ‘친일파 청산’ 구호는 친일세력과 손잡은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와해시키자 서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친일파는 오히려 ‘건국의 주역’, ‘반공투사’로 둔갑하여 한국 사회의 지배층으로 견고하게 자리 잡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일제 부역
언론인 동아일보의 사주, 김성수다.
김성수는 중일전쟁(1937년) 직후 전국시국강연회의 강사로 나선 것을 시작으로, 각종 친일단체의 간부로 활동하면서 전쟁협력을 독려하는 수많은 기고문과 연설을 남겼다. 심지어 제자들에게 ‘순국의 길이 열렸다’면서 ‘천황’을 위해 전쟁터로 나가라고 몰아세웠다. 그의 친일활동은 전시체제기 내내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해방 후, 미군정청 한국교육위원회 위원과 한국인고문단 의장으로 활동하고 동아일보 사장, 보성전문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1951년 6월에 대한민국 부통령이 되었다.

 


김성수는 1955년 2월 18일 오후 5시 25분에 사망했다(①). 빈소는 서울시 계동 132번지 김성수자택에 마련되었는데(②) 김성수가 전시물자 부족현상을 메꾸기 위한 ‘금속회수운동’에 적극 동참하기 위해 자택 철문 등 약 2백관(750kg)을 떼어 해군무관부에 헌납한 바로 그 집이다(③). 김성수 사망 바로 다음 날인 2월 19일 오전, 빈소에 이승만이 방문(④)하고 이날 국무회의에서 김성수의 장례가 ‘국민장’으로 결정되었다. 동아일보는 2월 20일자 지면을 통해 ‘일생을 국가, 민족을 위해 바친 인촌 선생이 「펭끼」(페인트)조차 벗겨진 초라한 자택에서 만민의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났다.’고 김성수의 사망 소식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육당 최남선은 김성수를 애도하는 시를 동아일보에 게재하였다(⑤).

2월 24일 오전 8시에 명동성당에서 연미사(위령미사) 거행(⑥)후 서울운동장에서 장례식을 진행하였는데(⑦) 이때 김성수의 약력보고를 이화여대 총장인 김활란이 맡았다(⑧). 서울운동장에서 장례식 후 장의 행렬은 동아일보 사옥을 지나(⑨) 이화여대 부속병원 앞을 통해서(⑩) 장지인 안암동의 고려대 뒷산에 도착하여 하관하였다(⑪). 김성수의 묘는 1987년 남양주로 이장하였다.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거두 김성수는 이렇게 땅에 묻혔다. 그러나 그의 후손과 추종자들은 무덤에서 그를 살려냈다. 식민지조선의 청년 학생들을 침략전쟁으로 내몰아 처단해야 할 친일파로 세간에 이름이 오르내리기까지 하던 김성수가 반공을 내세운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민족지도자’로 둔갑한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