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Covid-19 시대와 근대문명

코로나 시대의 삶이 어느덧 일상이 되어가며, 뉴노멀로 지칭된 새로운 사회 규범이 만들어지고 있다. 낯설게 경험하는 현상들 가운데 무엇에 주목하는지에 따라 뉴노멀의 내용과 방향도 설정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비대면’(untact) 상황에 주목할 경우 새로운 ‘행위규범’으로서의 뉴노멀에 관심하게 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의 위계’에 주목할 경우 ‘체제구상’으로서의 뉴노멀을 상상하게 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새로운 행위규범 못지않게, 근대문명의 청산을 기획하는 체제구상의 뉴노멀도 절실하다.

하지만 요청된 변혁이 근본적일수록 이루기 힘들다는 비관이 앞선다. 인류는 오랫동안 자연을 약탈해온 근대 자본주의 소비 문명이 언젠가는 삶 자체를 파괴하는 지점에 이를 것이라는 불안을 안고 살아왔다. 지구온난화를 가속해온 산업문명이 환경의 역습으로 전환될 것이라는 경고, 사회적 갈등의 뿌리에는 양극화된 빈부격차와 새로운 신분제도를 도입한 자본의 악습이 있다는 인식은 이제 낯설지 않다. 우리 시대 고통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단지 자본의 재배치에 그치지 않으려면, 문명 전환을 겨냥한 상상이 구현될 수 있는 길을 내야 한다.

철학자 에롤 E. 해리스는 근대문명이 파국으로 귀결된 본질적인 원인을 근대과학의 사유방식에서 찾고, 인류의 과제를 낡은 정신적 편견을 떨쳐내는 것으로 봤다. 여기서 낡은 편견이란 뉴턴이 완성한 근대적 사유 패러다임에 담긴 특징들, 즉 물질주의와 기계론, 원자론과 개체주의, 외적(external) 관계방식과 환원주의, 선입견과 주관적 가치가 배제된 과학, 목적론적 설명에 대한 거부, 물질과 정신의 분리 등이다. 이러한 뉴턴 패러다임이 과학만이 아니라 인식과 실천의 전 영역에 만연하여 근대문명의 병폐가 깊어 파멸에 이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회의적 태도를 보인다고 그는 말한다.

근대문명이 세계를 이해할 때 ‘실체’(substance)에 착안하여, ‘자기 존재를 위해 다른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개체적 존재에 관한 관념 위에 문명을 축조할 때부터 그 행로는 정해졌을지도 모른다. 물론 개인의 존엄과 가치를 중시한 근대정신이 중세적 억압으로부터의 해방과 인도주의적 가치를 높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각 유기체가 자신의 환경과 맺는 참된 관계를 무시”하고 “그 환경의 고유한 가치를 무시하는 습관”도 기르게 했다. 이렇게 상호연관 감각을 잃은 근대정신은 타인을 단지 ‘도구적’ 가치를 지닌 존재로 간주하고, “인간의 형제애에 유의하기보다는 부적격자를 근절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결국 인도주의적 이상은 공동선(common good)을 향한 전체적 비전을 구성하기보다는 “소득, 여가, 그리고 안전이 더는 향상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일에 봉사하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자연과 노동에 대한 약탈로 구성된 신자유주의 시대의 정점에서 터진 코로나 사태에서 우리는 길을 잃은 근대문명의 현실을 보는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 대부분 종교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성공한 중산층을 위해 진화해 왔기 때문에 문명 전환의 이정표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개신교와 같이 한국 현대사회에서 급부상한 종교일수록 코로나 사태를 맞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한편 코로나 사태가 소위 ‘탈진리 시대’(post-truth era)로 불리는 상황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가짜뉴스마저 취향이 되어버린 탈진리 시대 환경에서, 윤리는 당위성에 대한 성찰보다는 심리적 취향이나 사회적 효용성에 함몰되어가며, 사회적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이 좀체 구성되지 않고 있다.

고통에 잠긴 삶을 구원으로 인도할 신성한(sacred) 무엇은 과연 있을까? 고통의 삶에는 혼돈과 신비가 교차한다. 아니 고통은 그저 혼돈일 뿐, 신비란 말은 어쩌면 실재의 깊이에 대한 암시라기보다는 현실을 은폐하는 현혹일지 모른다. 하지만 만일 고통의 심연에서 해방의 문을 여는 열쇠를 얻을 수만 있다면, 적자생존의 삶으로 얼룩진 근대문명의 ‘힘의 철학’과 ‘번영의 복음’을 넘어서는 상상도 가능할 것이다. 코로나 시대 삶의 불안정성과 사회적 비탄 속에서 인류 공동체에 관한 새로운 감각, 약탈적 체제의 종식과 생태적인 삶에 관한 갈망이 거세게 일어나, 위기 속에서 새로운 인간이 태어나기를 기대한다.

사실 근대문명의 억압적 요소를 극복하기 위한 사유와 실천은 오래전부터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났다. 그것이 ‘탈근대’라는 이름을 가졌든 그렇지 않든 간에, 근대문명의 폐해를 극복하려는 진보적 주체는 여러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 글은 그것을 세 유형으로 분류하여 저항적 주체, 해체적 주체, 생태적 주체로 부를 것이다. 그들은 진보 담론의 세 가지 패러다임을 대변한다. 저항적 주체는 억압적 체제를 전복하고 역사를 발전시키려는 피억압자의 관심을 대변하며, 해체적 주체는 근대정신의 폭력성을 극복하기 위해 다양성과 관용에 주목한 탈근대적 주체이며, 생태적 주체는 유기체적 관계성을 중시하는 생태 문명을 지향하는 주체를 상징한다.

 

2. 근대문명 극복의 두 시도, 저항적 주체와 해체적 주체

근대문명의 정신적, 제도적 폭력성을 해결하려 한 ‘저항적’ 주체는 근대문명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억압적 체제를 변혁하기 위한 저항적 주체는 세계에 대한 ‘해석’만이 아니라, 세계 자체를 ‘변혁’하는 일에 관심했다. 이들은 공동체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종교와 국가 그리고 자본에 부여된 절대 권위를 전복하려 하였고, 이데올로기적 왜곡과 제도적 억압에 맞선 실천을 철저히 밀고 갔다는 점에서 이후 모든 진보적 양심은 이들에게 빚지고 있다. 이들이 가진 당파적 윤리는 억압당하는 자의 편에서 세계를 해석하고 재편성하려는 해방의 이상을 대변하였기에, 그 역사적 한계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저항적 주체가 추구한 해방 정신의 항구적 교훈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저항적 주체의 대표적인 국가 실험이었던 사회주의 혁명은 지구적인 차원에서는 실패했고, 이제 국지적으로 남았다. 그 이유에 대한 여러 설명 가운데, 저항적 주체가 유기체적 사회의 복잡한 운동과 그 구성원의 포괄적 관심을 담아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는 평가가 있다. 진보에 대한 절대적 낙관과 자기 이상의 당파적 실천이 결국 자기비평을 소홀하게 만들고, 사회라는 유기체 안에서 형성된 다양한 관심사에 대한 포괄적인 고려를 제한했다는 것이다.

사상적인 면에서 보면 저항적 주체의 변증법적 사유에서 갈등과 투쟁이란 보다 고상한 종합의 전조로 이해되기 때문에 역사적 진보에 대한 낙관이 절대적이다. 그러나 ‘변증법적 발전이 역사 속에서 발견될 수 있음’을 부정할 수 없지만, 갈등과 투쟁이 고상한 종합을 ‘필연적으로 발생’시킨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갈등 가운데 하나의 선(善)이 또 다른 선을 위해 파괴되는 것은 고차적인 종합으로서의 지양(aufhebung)이 아닌 항구적 상실로 이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전의 사회를 파괴할수록 더 완벽한 사회가 더 빠르게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가치가 박멸되면 될수록 그것이 회복될 수 없는 위험이 높아질 뿐’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마르크스주의 운동 자체의 ‘오독’도 있었다. 이를테면 ‘소명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와 ‘역사적 상태로서의 노동자 계급’의 혼동을 말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프롤레타리아가 어느 특정한 사회계급인 노동자 계급과 동일시” 되면서 ‘혁명의 소명(klesis)을 망각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유사한 딜레마가 역사에서 되풀이된다. 기독교 교회(ek-klesia)가 자신의 소명을 ‘실행’하기보다는 그것을 ‘소유’한 집단처럼 행세할 때 종교적 추락을 완성하듯이, 부처의 자비도 승가(僧伽)의 소유가 될 수 없고, 진보적 정신 역시 특정 집단의 ‘소유’가 되지 않는다. 소명을 활용하기보다는 그것의 특권적 소유에 집착하는 이들은 반드시 몰락한다.

오늘날 저항적 주체는 과거의 ‘계급투쟁’보다 훨씬 미묘하고 복잡한 과제를 맞고 있다. 노동가치이론의 ‘유통기한이 만료’되어 노동의 ‘부정적 존재론’이 널리 퍼져서 진리가 ‘노동의 힘’에 뿌리박혀 있다는 생각을 거의 깨졌으며, 돈이 ‘신비화’되어 이제 노동은 ‘착취’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배제’에 대한 대처를 먼저 해야 하는 시대를 맞았다. 공항노동자들의 정규직화라는 노동의 꿈이 바로 노동자들에 의해 위태로움을 겪었던 것처럼, ‘가난한 자들의 인식론적 특권’은 이제 상실감을 경험한 대중들의 ‘공정성’이라는 명분 앞에서 설득력을 잃었다. 네트워크나 기계에 의해 노동이 대체되는 4차산업혁명과 포스트휴먼(post-human)의 전망 또한 저항적 주체의 진화를 요청하고 있다.

한편 근대문명을 극복하려 한 탈근대성은 두 흐름을 가졌다. 이 글에서는,지난 삼십여 년을 주도한 탈근대적 흐름을 ‘해체적 주체’로 부르고, 그 대안으로서 ‘재구성적’ 특징을 가진 흐름을 가리켜 ‘생태적 주체’로 부르고자 한다. 저항적 주체가 억압적 ‘체제’의 전복에 관심했다면, 해체적 주체는 억압적 ‘정신’의 해체에 주목했다. ‘탈근대성’을 표방한 해체적 주체는 근대사상의 문제점을 ‘전체성에 대한 전쟁’(a war on totality) 또는 ‘거대담론’(meta-narratives)에 대한 회의’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거기에는 분명히 절대적 진리를 표방한 근대 이성의 병폐와 한계들, 즉 객관주의적 과학 이론, 토대주의적 인식론, 보편주의적 도덕과 문화 관념이 억압 기제로 기능하는 체계를 타파하려는 해방의 요소가 있었다. 또한 해체적 주체에게 진보담론을 구사하는 저항적 주체 안에 내장된 폭력성이 근대성의 잔재로 포착되었다.

해체적 주체는 차별에 맞선 연대와 차이에 대한 관용의 미덕을 인간 정신에 심어주었다. 하지만 상대화/파편화되어가는 사회에서 어떻게 담론과 투쟁을 위한 공통의 토대를 구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 어려움에 빠졌다. 여기서 저항적 주체가 ‘하나의 진리를 절대화’하는 극단에 치우쳤다면, 해체적 주체는 ‘모든 진리를 상대화’하는 또 다른 극단에 치우쳤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말하자면, 해체적 주체는 새로운 문명을 향한 ‘동력’을 어떻게 제공할 수 있는지에 관한 질문을 받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자기 관심에 매몰되는 소아병을 극복할 수 있는지, 어떻게 상대성에 대한 인식이 편협성이 되지 않게 할 것인지, 어떻게 지식의 파편화를 방지할 것인지, 어떻게 허무주의를 넘어설 가치를 제공할 것인지.

포스트모던 감각이 진리를 향한 열정보다는 각자의 취향으로 미끄러지는 것은 아닌가? 때로는, 자기주장의 알리바이로 왜소화되어가는 탈-진리 시대의 흔적은 동료 이웃과 자연에 대한 ‘고통 감수성’을 갖는 일마저 버거워 보인다. 진리 자체가 아니라 감정과 자기 신념을 만족하게 하는 것을 진리로 여기는 ‘탈-진리’(post-truth) 시대를 맞은 오늘, 문제는 가짜뉴스를 양산하는 선동적/반동적 존재보다 그 흐름을 제어할 사상적 장치가 없는 데 있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은 다양성의 윤리를 권장해온 탈근대주의가 마주친 최대의 복병으로서, 당위성의 감각이 소실되거나 왜곡된 지점에서 경험하는 사회적 증후군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근대의 이기적 주체 못지않게 탈근대의 해체적 주체도 이해관계나 자기 편견 속으로 잘게 부서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탄식이 생긴다. 해체되어 개인의 ‘취향’으로 미끄러진 진리는 묵시록적인 미래에 대한 순종의 지표처럼 읽히지만, 다행히 존재의 무게에 이끌린 영혼은 어느 시대든 미래의 그루터기로 남는다.

 

3. 생태적 주체와 종교

생태적 주체는 ‘저항과 해체’의 경험을 창조적으로 수렴한 존재로서, 타자와의 연관성을 내재화하여 자기 고립을 극복한 존재이다. 그는 근대문명이 ‘생존 경쟁을 증오의 복음으로 해석’한 사상적 잘못에 깨달은 존재이다. 개인과 공동체의 유기체적 연관을 실재의 본질로 알기에,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도구적 가치가 아닌, 생명의 ‘고유한’(intrinsic) 가치를 만들어가기 위한 요소이자 환경으로 서로 작용하는 것을 이해한다. 이것은 개인의 존엄과 자유를 과장한 개체주의적 편향과 공동체의 질서를 위한다는 명목의 전체주의적 편향을 함께 극복하려는 것이며, 각 생명의 본원적 가치를 키우고 보호하는 ‘공동체적 환경’과 개인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공동체에 대한 헌신’의 가치를 동시에 지지한다.

이러한 관계성에 대한 인식은 ‘우주의 본성에 대한 경외심을 일으키는 통찰’에 근거한 것으로서, “불굴의 합리성이 철저하게 깃들어 있는 하나의 세계관을 재창조하고 재가동”함으로써 뒷받침된다. 그럴 때 근대문명의 전제가 되는 실체철학의 개체주의적 관념, 즉 ‘모든 존재는 자기이해관계에만 관심할 뿐이다’는 생각이 실상은 추상적 이데올로기이자 전체 전망을 상실한 부분적 관찰에 기인한 편견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생태적 주체는 진리와 함께 아름다움과 평화의 중요성을 깨달은 존재이다. 해체적 주체가 이미 밝혔듯이, 다양한 생명이 어우러진 세계에서 자신의 진리를 구축하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타자의 진리에 대한 인식이다. 생태적 주체에게 그러한 인식은 상대성의 관념에 머물지 않고, 아름다움의 윤리로 전진한다. 다시 말해서 세계를 설명하고 윤리적 행동을 하는데 진리보다 더 ‘넓고 근본적인’ 의미를 아름다움에서 찾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떠날 때 진리는 선도 악도 아니다. 진리가 없는 아름다움에 중후함이 없다면, 아름다움이 없는 진리는 사소성으로 전락한다. 진리가 중요하게 되는 것은 바로 아름다움 때문이다.”

생태적 주체에게 평화는 궁극적 이상으로서 이상적 관계요, 이상적 상태이며, 이상적 목적이다. 이 평화는 웅대한 관계성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파괴적 격동을 가라앉히고, 문명을 완성하는 조화 중의 조화’이다. 이 평화는 현실의 아픔에 눈감지 않고 ‘비극에 대한 감수성’을 생생하게 간직한 채, ‘무한성의 파악’, 즉 ‘한계를 초월하는 호소’를 듣는다. 화이트헤드는 이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은 “수많은 아름다움과 무수한 영웅적인 행위와 무수한 대담성이 일어나고 지나가는 한복판에서 영원을 직관”하는 영광을 누리게 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평화의 감각을 잃은 진리, 아름다움, 모험, 예술은 ‘무자비하고 딱딱하고 잔인한 것’이 되고 만다.

진보하는 사회는 약탈적 풍요 위에 세워진 안락한 사회가 아니다. 진보하는 사회는 인간의 관심사들이 ‘평화’를 이루기 위해 유혹을 받는 사회요, 그것을 이룰 방식으로 ‘비폭력/설득’의 길을 신뢰하는 사회이다. 역사의 진보란 단지 과학적 기술이나 철학적 신념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예술의 감각과 종교의 전망이나 결단 없이 역사는 도약하지 않는다.

사실 종교가 중요하다. 근대문명의 비극은 종교적 전망을 잃은 과학에 의존한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반대로 과학적 세계관으로부터 분리된 종교 역시 근대문명을 질곡으로 이끈 원인이 되었다. 자신의 낡은 관념을 수정할 용기를 갖지 못한 종교는 과학에 패배하면서 결국 자신의 중요성까지 잃게 되었고 단지 ‘안락한 삶을 장식하는 형식신앙’이 되고 말았다. 평화(shalom)에 대한 비전으로 ‘직접적인 동의’를 불러일으키는 힘을 잃은 종교, 신의 분노에 대한 공포심을 자극하여 정서에 호소하여 연명하는 종교는 결국 외면 받는다. 그런 이유로 종교는 저항적 주체에게는 단지 ‘도구’였고, 해체적 주체에게는 ‘취향’이 되었다. 그러나 눈앞의 이익과 개체적 만족 너머로 뻗어가도록 충동하는 종교적 힘을 잃은 문명은 쇠퇴할 수밖에 없다.

억압과 파괴로 얼룩진 문명을 싸매기 위해서는 생태적 주체가 필요하다. 자기 진리에 대한 충실만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감각과 평화의 이상으로 충동질 당하는 영혼이 역사의 품에서 자라나야 한다. 자비로운 열정과 은혜로운 관계에 대해 겸손한 생태적 주체의 등장을 염원한다.

 

김희헌

향린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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