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환경운동연합 창립20주년 기념 굴업도 생태기행
굴업도를 생태섬으로~
2014. 10. 18 ~ 19
창립 20주년을 맞아 생태기행을 어디로 갈지 고민했는데 모두 한결같이 굴업도를 추천했다. 굴업도는 인천환경운동연합 역사에 큰자리를 차지하는 섬이다. 인천환경운동연합은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이 한창이던 1994년 12월 4일 창립했다.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투쟁부터 굴업도 골프장 철회운동까지 인천환경운동연합은 굴업도를 지키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애써왔다.
그래서인지 이번 기행은 남달랐다. 이십년간 인천환경운동연합이 함께 했던 굴업도가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한 채 아름다운 풍광과 생태로 맞이해주고 있음에 감사했다.
1994년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 투쟁...
10월 18일, 첫째날 개머리군락을 올랐다. 여느 때보다 키가 작아진 수크령 군락지와 드넓은 초지는 가을바람과 함께 우리를 반겼다. 굴업도가 알려지면서 곳곳에 세워진 야영 텐트들의 모습만이 변화일 뿐이다. 유난히 맑은 가을 하늘과 드넓은 푸른 바다 위로 옅은 안개에 가린 선갑도와 백아도, 문갑도의 모습은 여전히 한 폭의 그림이다.
최근 사람들을 만날 때면 그 때 굴업도 핵폐기장을 막아내길 잘했다는 말을 듣는다. 몇해전 후쿠시마 사건이 터지면서 한국 사회에 핵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1994년 서해 앞 바다 굴업도에 핵폐기물 처리장을 지을 것이란 보도가 나왔지만 당시엔 핵폐기물과 핵발전소의 위험성에 대한 인식은 현저히 낮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 안면도 핵폐기장 반대 투쟁에 이은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 투쟁은 덕적도 주민들의 모진 투쟁과 함께 인천시민사회에서 핵대협을 구성하며 불길처럼 일어났고 결국 정부가 활성단층 발견이란 변명을 대며 철회하게 만든다. 당시 폭력적인 진압과 부상 사태, 주민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집회와 시위 그리고 전경과 최루탄에 맞서 주민들은 처절한 싸움을 계속했다.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 투쟁의 승리에 환경운동연합은 중심에 있었다. 반핵운동의 기치를 내걸었던 환경운동연합은 덕적도 주민들과 인천사회에 핵폐기물의 위험성을 알리는 단초 역할을 했고, 정부 발표에 앞서 굴업도 지질조사에서 활성단층이 발견됐음을 알렸다.
그리고 십여년후 CJ의 골프장 개발 계획
20주년 생태기행은 유독 이십년전 굴업도를 떠오르게 한다. 굴업도 핵폐기장 투쟁이 지난지 십여년후 굴업도는 CJ의 골프장 계획이 발표되며 또다시 위기에 처한다. 어느새 굴업도의 99%의 땅을 매입한 CJ의 골프장 개발 계획은 강풍이었다. 강풍에 맞서 싸우기에 환경단체와 주민들의 힘은 미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해의 보석 같은 섬인 굴업도를 방문하는 사람들마다 개발 반대를 외쳤고 인천과 서울의 예술인들이 굴업도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결국 2014년 올해 CJ가 스스로 골프장 개발 계획을 철회시키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이제 아픈 역사를 넘어 '굴업도를 생태섬으로~'
둘째날, 탄성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해안사구와 모래해변을 걸어 연평산을 올랐다. 1920년에 민어파시가 한창이던 굴업도의 모습은 그저 모래해변에 세워져있는 전봇대들이 흔적을 남기고 있다.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1923년 8월 16일 엄청난 해일과 폭풍으로 민어잡이 어선 200여척이 조난당하고, 파시촌을 형성했던 조선 가옥 120호가 바람에 날려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에 민어 파시는 덕적도로 옮겨갔지만 굴업도 개머리 바다, 덕물산 앞의 동뿌리 어장, 굴업도와 문갑도 사이 굴업골, 백아도와 굴업도 사이의 민어탄의 굴업도 어장은 196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이제 민어떼가 넘실대던 파시의 흔적은 옛건물터와 전봇대 정도만 남아있지만 굴업도는 굴업도 핵폐기장과 골프장이란 광풍을 이겨내고 아름다운 자연과 생태를 유지하고 있다. 인천환경운동연합 20주년을 맞아 우리는 굴업도 개머리 군락에서 굴업도가 그 숱한 역사를 품에 안고 아름다운 자연과 생태를 간직한 섬으로 유지되길 기원하며 폐현수막을 이용해 손글씨로 만든 현수막을 들고 ‘굴업도를 생태섬으로~’를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