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삶을 온전히 두 발로 살아내는 일
계단을 오른다는 것
글 바오밥 활동가
인천지하철 예술회관역에서 내린다. 내가 출근하는 길이다. 역 밖으로 나가기 위해 올라야하는 수십 개의 계단 앞에서 한숨부터 나온다. 저걸 또 어떻게 오른담. 그래도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하나둘 계단을 밟아 오른다. 난 젊으니까! 우리는 매일 언제 어디서나 쉽게 계단을 마주한다. 계단으로 하루를 시작해서 계단으로 하루를 마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계단이 언제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우리가 매일 오르고 내리는 계단은 서양 건축의 역사와 나란히 뻗어오면서 각 시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 왔다. 때로는 이동의 장소로, 때로는 격투의 장소로, 때로는 만남의 장소로 계단은 온 시대를 살아왔다. 그렇다면 계단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임석재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는 계단의 기원을 도구 본능, 자연 발생, 인체 구조 등으로 나눈다.
계단의 탄생은 침팬지로부터?
자신의 키보다 훨씬 위쪽에 있는 물건을 꺼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두 가지다. 높이 뛴다. 그래도 안 닿으면 힘을 내어 더 높이 뛴다. 하지만 뛰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다른 방법은 무언가를 쌓고 그 위에 올라서는 것이다. 도구를 이용하는 방법. 도구 본능이다. 독일의 심리학자 쾰러(1887~1967)는 침팬지를 데리고 다양한 실험을 했는데, 계단이 도구 본능에서 생겨났음을 보여주는 내용이 있다.
방 안에 침팬지 한 마리가 있다. 천장에는 바나나가 매달려 있고, 바닥에는 네모난 나무 상자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침팬지는 펄쩍 뛰어서 바나나를 잡으려고 시도하지만 쉽게 닿지 않는다. 아무리 뛰어도 바나나를 딸 수 없자 침팬지는 주변의 나무 상자를 바나나 밑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옮긴 상자를 차곡차곡 쌓고 그 위에 올라서 바나나를 딴다. 침팬지가 쌓은 나무 상자는 원시적 형태의 계단으로 볼 수 있다.
원시인들 또한 혹독한 자연환경 속에서 살아남으려고 침팬지와 동일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 사나운 짐승을 피하거나 과일을 따기 위해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했고,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도구를 만들어 사용해야 했다. 계단은 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계단은 사람의 손을 타거나 도구를 쓰지 않고 땅의 모습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겨날 수도 있다. 땅 자체에 박힌 바위나 쓰러진 나무로 인해 이미 계단의 형태가 잡히기도 하고, 사람과 동물의 발길로 다져진 언덕에 자연스런 경사로가 형성되기도 한다. 계단의 탄생을 자연 발생으로 설명하면, 인류 최초의 계단은 자연 그 자체이며, 사람과 동물의 발자국이다. 계단이 인공 조형물이라는 인식과는 정반대로 자연 발생의 계단은 있는 그대로 자연의 흔적이며 삶의 흔적인 것이다.
계단의 기원 세 번째는 인체 구조다. 구부러지는 무릎으로 인해 계단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뱀이 계단을 오르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개가 계단을 오르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상상한 장면에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계단은 무릎을 굽혀 걸을 수 있는 포유류의 신체 구조에 적합하다. 인간에게 구부러지는 무릎이 없었다면 계단은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계단을 두 발로 밟아야 하는 이유
계단은 역사적으로 하늘에 이르는 길로 추앙받기도 하고 힘과 예술의 상징으로 활약하기도 했지만, 엘리베이터의 등장으로 더 이상 후한 대접을 기대하기엔 어려워졌다. 냉장고의 발명이 얼음장수의 일자리를 빼앗은 것처럼 엘리베이터의 발명은 지하철역 계단 앞에 선 우리에게 한숨만을 가져다주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단을 올라야 한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산을 왜 오르느냐고 물어보면 '산이 거기 있기 때문'이라고 답을 하곤 한다. 계단 역시 거기 있다는 이유만으로 올라야 하는 걸까. 그럼 거기로 안 가면 되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로 갈 수밖에 없다. 우리가 가려는 곳엔 반드시 계단이 있기 때문이다. 두 발로 계단을 오르는 일은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내는 일. 기계가 육체의 일을 대신해 주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은 무엇인지, 계단의 탄생을 되새기며 곰곰이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