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굳이 조지 말로이(George Mallory)의 우문현답(Because it is there)을 동원하지 않고서라도 동물의 한 종으로 인간은 이동 본능을 타고났음을 말 그대로 본능적으로알고 있다. 특히 요즘 코로나19로 집 안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지금, 코로나블루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딘가 나가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런 증상은 방랑벽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동물로서 가진 이동 본능이기에 그냥 당연하다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본능을 누르는 이성이 더 강하다는, 자신의 형이상학적 능력에 위안을 준다면 조금 편해지지 않을까 한다.
인간으로서 지닌 이동의 본능은 기본적 욕구 충족을 위해 우선적으로 사용한다. 생리적 욕구와 안전, 소속의 욕구, 그리고 남보다 위에 서고자 하는 존경의 욕구까지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런 결핍적인 요소의 해결에서 만족하는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존재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무언가 알고 싶고, 아름다움을 탐하고, 스스로 만족감을 높이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 것을 초월하고자 하는, 궁극의 진리를 알고자 하는 욕구를 추구하는 것이다.

매슬로우(Maslow)의 욕구충족이론을 바탕으로 국립공원이라는 제도를 바라보면 이 공간은 당연히 생명체로서의 본능영역인 결핍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곳은 아니다. 결핍의 해소 차원에서 굳이 이곳으로 이동해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결핍욕구를 해결하기 어렵게 만드는 가지 말아야 하는 곳이 된다.
여기서 뻔한 답이 보이는 질문을 하나 던져본다. 우리는 국립공원을 어떠한 곳으로 규정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 그것이다. 동물의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한 공간인가 아니면 인간의 존재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공간인가의 단순한 질문이다. 대전제가 성립되면 후자의 세세한 선택은 너무나 쉬워지기 때문에 이 뻔한 질문의 선택은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 우리는 이 단순한 질문의 답을 잊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국립공원에 너무나 많은 우()를 범하고 있음을 명심해야만 한다.
국립공원이 다른 동물에게 없는 생각하는 인간으로서의 존재 욕구를 위한 공간이 되어야 하는, 이 너무나 당연해서 잊고 지내는 대전제를 기저에 깔면 이제 다음단계는 아주 쉬워진다. 심미적 욕구와 자아실현, 나아가 궁극의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내면세계에 도움을 주는 방향으로 공원관리를 결정하면 된다.
그럼 동물의 본능적 욕구와 인간의 존재욕구의 경계가 어디인지를 그어 봐야 눈에 보이는 공원이 지향해야 할 기준이 생기지 싶다. 소셜미디어를 채우며 좋아요를 받는 흔한 아이템인 명소를 다녀왔다, ‘산해진미를 먹었다, ‘명품을 샀다는 인증샷은 본능사회에서 남들보다 튀어 보이려는 욕구의 하나로 설명할 수 있는데 이러한 행동은 결핍욕구 중 상위 단계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공원은 이것보다 조금 더 높은 욕구를 위해 존재하면 된다. 이 하나의 선을 그음으로서 국립공원의 존재가치와 이용방향이 뚜렷해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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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라 한다. 그러나 스트레스는 긍정적 스트레스부정적 스트레스로 나뉘며 이 만병의 근원은 단지 부정적 스트레스에 한한다. 첫 해외여행을 위해 여권과 비자를 준비하는 과정의 스트레스는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만병의 근원은커녕 다른 부정적 스트레스를 날려주는 희열에 가깝다. 이 두 가지 스트레스를 욕구와 접목시키면, 일반적으로 본능욕구를 채우기 위한 스트레스는 부정적 스트레스인 반면 존재욕구를 채우기 위한 스트레스는 긍정적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이상을 요약하면 국립공원은 인간으로서 존재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찾는 긍정적 스트레스의 공간으로 정의할 수 있다. 단순히 좋아요가 아닌 내면의 성장을 위한 공간이 되어야만 하고, 자신의 성장을 위한 스트레스가 있어야만 하는 곳이다.

결론으로, 국립공원이 사회적 약자를 생각한다면 단순히 결핍욕구의 충족을 위한 편안한 이동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핍욕구는 약자의 생활주변에서는 충분히 확보되어야 하지만 국립공원은 일반인에게 그러하듯 이들에게도 긍정적 스트레스를 안겨주기 위한, 내면의 성장을 위한 공간으로서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해야만 한다. 약자니까 편안해야 한다는 편견을 버리고, 약자의 눈높이에 맞춘 극복의 스트레스가 있는 그런 공간으로 거듭나야만 한다. 조지말로이의 에베레스트가 아닌 그들의 에베레스트를, 일반인의 대청봉이 아닌 그들의 대청봉을 생각한다면 천편일률적인 데크포장으로 장애가 없는 공원으로의 시설투자가 아닌, 내면의 성취 욕구를 위한 프로그램으로의 현답이 나올 것이다.

국립공원이라는 제도를 왜 만들었는가를 먼저 들여다보자. 그리고 그 취지에 맞게 약자를 살피는 것이 순서이다. 국립공원은 도시가 제공해야할 본능적 서비스에 충실한 눈높이로 낮아질 필요도 없으며, 낮아져서도 안 된다. 본격적으로 긍정의 스트레스를 위한 준비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