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비망록 56]

수원화성 방화수류정 언덕에 자리했던 순직경찰관초혼비
3•1만세운동 때 처단된 일본인 순사들을 위한 기념물

 

이순우 책임연구원

 

수원화성 팔달문 쪽에서 성벽 옆의 계단길을 삼백미터 남짓 따라 올라가면 서남 암문 앞쪽에 이르러 숲속의 작은 빈터에 자리한 ‘3.1독립운동기념탑’을 만나게 된다. 이것은 1969년 3월 1일 ‘삼일독립기념탑’이란 명칭으로 중포산(中布山)에 조성되었던 것을 삼일동지회(三一同志會, 1969년 4월 12일 창립)에 의해 그해 10월 15일에 다시 지금의 자리로 이전 건립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런데 이 기념탑 바로 옆에는 이것과 함께 옮겨온 약간은 이색적인 또 다른 기념비 하나가 남아 있는데,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앞뒷면에 한글로 ‘대한민국독립기념비’라고 새겨넣은 것이 눈에 띈다. 한쪽 옆에는 ‘수원읍민 수원군내 학생 일동’이라고 되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단기 4281년 8월 15일 건립(유근홍 씀, 이상훈 만듬)’이란 글씨가 있다.

 

수원 팔달산에 자리하고 있는 ‘대한민국독립기념비’의 모습이다. 원래 수원화성 화홍문 옆 방화수류정 언덕에 있었으나 1969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1949년 1월 18일자에 수록된 ‘대한민국독립기념비’ 제막 관련 기사이다. 일제 때 조성된 ‘순직경찰관초혼비’를 헐어내고 바로 그 자리에 이 비석이 건립되었다.

 

이 비석의 건립 내력이 궁금하여 신문자료를 찾아보았더니, 한참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1949년 1월 18일자에 수록된 「수원에서 대한독립기념비 제막식 성대 거행」 제하의 기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수원] 잔악무도한 왜적을 이 땅에서 몰아내고 또 그대들이 세운 가증한 공비를 부시고 왜적들로 말미암아 쓰러진 수많은 선열들의 거룩하신 유업을 찬양하는 동시에 이 땅의 독립을 영구히 빛내일 독립기념비의 거사는 수원읍내에 세우기로 결정되어 민(閔) 군수를 비롯한 26만에 달하는 군민들의 끊임없는 지성으로 지난해 10월 22일부터 착공하여 오던 바 연공사일 80일 만에 52만여 원에 달하는 거액을 던진 공사는 드디어 준공되었던 것이다. (사진은 동 독립기념비)
역사를 자랑하는 수원군민들의 기쁨은 더 한층 크련만 지하에 잠든 투사들의 영령 좋아 이 비(碑) 위에 감돌아 춤출 것이다. 이 뜻 깊은 기념비의 제막식은 드디어 지난 16일 상오 11시부터 이(李) 대통령 대리인 신(申性模) 안(安浩相) 신(申翼熙) 국회의장을 비롯하여 구(具滋玉) 경기도지사와 당지 유지 다수 참석하 먼저 국민의례에 이어 민(閔泰鼎) 군수의 열렬한 식사가 있고 제막이 있은 후 신 내무장관으로부터 뜻 깊은 독립기념비 제막에 당하여 여러 학생과 군민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열강이 승인한 독립국가이며 이 기쁨이란 바로 여기 세운 기념비와 같이 있는 것이다.(하략)

 

이 기사를 통해 이 비석은 표면상으로 대한민국 정부수립일인 1948년 8월 15일에 건립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 이듬해인 1949년 1월 16일에 제막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기사에는 “그대들이 세운 가증한 공비를 부시고”라는 구절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에 관한 궁금증은 1949년 1월 18일자에 수록된 제하의 기사를 통해 풀어낼 수 있다.

 

16일 아침 9시 30분 경무대를 나선 내무장관 신성모(申性模) 씨 수행을 따라 경원(京原)간 40리(哩, 마일) 연도의 싸늘한 공기를 헤치고 기자는 이곳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언덕 위에 뜻 깊이 선 대한민국독립기념비(大韓民國獨立記念碑) 제막식에 참가하였다.……
이 기념비는 지난 10월 22일에 착공하여 준공까지 연공사일(延工事日) 80일간 그리고 52만 원의 공사비로 민(閔) 수원군수와 유지를 비롯한 26만 명의 군민과 더불어 어린 3만 명 학도들의 열렬한 지성의 결정으로 된 것이다.
그리고 더욱 이 비는 3.1독립운동 당시 우리의 애국선열들을 무참히도 학살(虐殺)하고 맞아죽은 노구치 고조(野口廣三)과 가와바다 도요타로(川端豊太郞)의 가증 무쌍한 추념비(追念碑)를 8.15 해방과 함께 분쇄(粉碎)하여 버린 그 자리에 지금 맑게 개인 하늘 아래 우리가 꿈속에도 그리워 마지않던 독립비는 당당히 그 자리를 힘차게 나타낸 것이다.(하략)

 

여기에는 일본인들이 세운 비석의 정체가 “3.1 독립운동 당시 우리의 애국선열들을 무참히도 학살하고 맞아죽은 일본인 순사들의 가증 무쌍한 추념비”라고 밝히고 있다. 이들 중 노구치 고조(野口廣三, 1889~1919)는 수원경찰서 순사부장으로 1919년 3월 28일 만세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부하들을 이끌고 현지에 파견되었다가 수원군 송산면 사강리에서 권총을 발사하였고 이에 격분한 시위군중들에게 쫓겨 돌에 맞아 처단된 인물이었다. 그리고 가와바다 도요타로(川端豊太郞, 1895~1919)는 수원경찰서 화수리경찰관주재소의 순사이며, 1919년 4월 3일 수원군 우정면 화수리에서 주재소로 몰려든 시위대를 진압하고자 총격을 가하며 도망을 가다 그를 추격한 군중에 의해 역시 처결되었다.

 

(1937)에 수록된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 관련 항목이다. 여기에는 “소요사건 때 폭동진압 중 투석(投石)에 중상을 입어 사망”이라고 적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소장자료)

 

1937년에 발행된 을 보면,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의 순직 원인을 “경기도 수원경찰서 관내에서 소요사건 때에 폭동 진압 중 투석(投石)으로 중상을 입어 사망”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1919년 4월 12일자에 수록된 수원경찰서 노구치 순사부장과 화수리주재소 가와바다 순사의 사망에 관한 보도내용이다.

 

그러니까 이들의 추모비를 걷어내고 이 자리에 ‘대한민국독립기념비’를 건립한 것은 비단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기리는 데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제의 탄압에 숨진 만세시위대 희생자들을 기리는 뜻도 함께 포함된 것으로 풀이된다. 듣자하니 독립기념비의 기단석은 추모비의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하니 어찌 보면 그 자체가 일제치하를 벗어난 극복의 의미를 일부나마 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죽은 일본인 순사들을 위한 비석은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뚜렷한 자료가 알려진 바 없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일본어 신문 몇 종류를 뒤져보니, 1926년 6월 30일자에 수록된 제하의 기사를 통해 간신히 다음과 같은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1926년 6월 30일자에 수록된 이른바 ‘순직경찰관초혼비’의 제막 당시 모습이다. 이 비석의 사진자료가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수원] 전부터 화홍문(華虹門)의 고대(高臺)에 건설중이던 순직경관(殉職警官)의 초혼기념비(招魂記念碑)가 준공되어 27일 오전 10시부터 성대한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참렬자는 지원(地元, 그 지방) 수원(水原)및 경성의 관민 수백 명으로 순직자 가와바다 도요타로(川端豊太郞)의 유족(遺族, 모당, 누이, 딸)이 제막의 거적을 당겼고, 남성적인 여름의 햇볕을 받아 눈부시게 서 있는 기념비는 영원히 빛나는 순직자의 영예 그것과도 같으며, 식후 비전(碑前)에서는 무도대회(武道大會)를 거행, 도내 각서(各署)에서 30조(組)가 출장하여 장렬한 시합을 벌였고, 본사 기증의 특제메달을 받은 고점시합(高點試合)의 우승자는 다음과 같다. (사진은 기념비) (이하 내용 생략)

 

여기에서 말하는 ‘화홍문의 고대’는 앞서 ‘대한민국독립기념비’의 제막장소였던 ‘방화수류정 언덕’과 동일한 장소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특히 이 기사에는 그동안 전혀 알려진 바 없었던 비석의 사진자료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 매우 주목할 만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 사진을 통해 비석의 전면에는 ‘순직경찰관초혼비(殉職警察官招魂碑)’라는 글자가 새겨진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1937)을 살펴보면,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수원경찰서 관내에서 순직한 경찰관은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 이외에는 전무하였다는 것이 드러나므로, 이 초혼비는 결국 전적으로 3.1만세사건 당시에 숨진 두 일본인 경찰관을 위한 것이었음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연유로 이곳에서는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해마다 4월이 되면 이들을 위한 초혼제가 거행된 흔적을 어렵잖게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1935년 4월 29일자에 수록된 「수원경찰관(水原警察官) 초혼제(招魂祭) 집행」 제하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착된다.

 

[수원] 일찍이 수원경찰서 관내에서 폭민(暴民) 때문에 순직(殉職)했던 노구치(野口), 가와바다(川端) 양 경찰관에 대한 제17회 초혼제는 수원경찰서 및 경우회(警友會) 주최 아래 4월 27일 오후 1시부터 양씨 기념비전에서 집행할 예정이었으나 공교롭게도 당일 우천(雨天) 탓에 공립보통학교 강당에서 집행, 제주(祭主) 후지타 서장(藤田署長), 경우회장(警友會長), 곤도 토라노스케(近藤虎之助), 내빈(來賓) 오카와우치 군수(大河內郡守)의 제사(祭詞)와 옥관봉전(玉串奉典) 등이 있은 후에 후지타 서장으로부터 경우회 및 내빈에 대한 인사를 마치고 개연(開宴)이 있었는데 당일의 인원은 이백여 명으로 종래 그 예를 보면 성의(盛儀)를 이뤘다.

 

1929년 5월 13일자에 수록된 제9회 순직경찰관초혼제의 광경이다. 여기에는 경복궁 근정전 용상이 죽은 일본순사들의 제단으로 사용되는 모습과 야마나시 조선총독이 제단에 옥관(玉串, 타마구시)을 바치는 장면이 수록되어 있다.

 

참고적으로, 다른 지역의 사례도 살펴보니까 3.1운동 과정에서 죽은 일본군 헌병과 조선인 헌병보조원을 위한 기념비가 건립된 흔적이 눈에 띈다. 우선 강원도 이천군에서는 이천헌병분견소(伊川憲兵分遣所)의 헌병보조원으로 있다가 죽은 고세진(高世鎭)을 위한 비석이 건립되어 1921년 10월 15일에 제막된 일이 있었으며, 평안남도 성천군에서는 1919년 3월 4일에 중상을 당하여 결국 숨진 성천헌병분대장 헌병대위 마사이케 카쿠조(政池覺造)의 기념비가 특히 사이토 조선총독의 휘호를 받아 1925년 10월 10일에 제막된 사실이 확인된다.
그런데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의 경우, 그들에 대한 초혼제가 수원지역에서만 거행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초혼비가 건립되기 이전에 이미 1921년 4월 26일에 조선경찰협회(朝鮮警察協會)의 주관으로 처음 시작된 ‘순직경찰관초혼제’에도 당연히 대상자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 초혼제는 초기에는 남산공원 광장, 왜성대, 광화문 경찰관강습소 등에서 거행되었고, 1926년 7월 4일에 열린 제6회 순직경찰관초혼제 때에 경복궁 근정전으로 자리를 옮겨 거행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7년에는 막 준공된 조선총독부 신청사 대홀에서 열렸다가 다시 1928년부터는 경복궁 근정전으로 되돌아왔으며, 그 이후로 줄곧 이곳에서 어김없이 초혼제가 개최된 바 있었다. 1935년부터는 ‘순직소방수’에 대한 초혼제도 곁들여 함께 거행되기 시작했으나, 이 시기에도 경복궁 근정전의 용상이 이들을 위한 제단으로 사용되는 고약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그대로 지속되었다.
이처럼 죽은 ‘왜놈 순사들’을 극진히 모시는 초혼제는 해마다 거행되면서도 정작 그들에 의해 희생된 조선인들을 위한 추모행사가 벌어졌다는 얘기는 결단코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점에 있어서 1923년 5월 21일자에 수록된 「수원사건(水原事件)에서 김상옥사건(金相玉事件)까지, 허다참극(許多慘劇)의 와중(渦中)에 순직했다는 경관이 46명, 그 중에는 조선사람도 열아홉」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초혼제를 지켜보는 그 당시 조선인들의 심정이 과연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늦은 봄비가 개일 듯 말 듯한 작일 왜성대(倭城臺)에서는 조선경찰협회(朝鮮警察協會)의 주최로 소위 순직경관(殉職警官)의 초혼제(招魂祭)를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초혼의 제물을 받는 그들 중에는 전염병(傳染病)의 예방에 종사하다가 병이 들어 죽은 자도 있으며, 저희들끼리 격검(擊劍)연습을 하다가 맞아 죽은 자도 있으며, 물에 빠진 사람을 건지려다가 죽은 자도 있고, 강도(强盜)나 절도(竊盜) 범인을 잡으려다가 죽은 자도 있고, 그리고 또한 가지는 무수한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들을 죽이다가 다시 독립단들의 들쳐오는 총칼에 맞아 죽은 자도 있다. 그리하여 독립단의 손에 죽어 버린 자는 전체 일백 한 사람 중에서 마흔 여섯 사람이나 되며 다시 그 중에서 열아홉 사람은 조선의 아비를 모시고 조선의 아들을 거느린 조선사람이다.
그리하여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힘쓰는 독립단과 또는 독립에 관한 사건으로 싸우다가 죽은 자는 지금으로부터 4년 전 3월 1일 탑골공원(塔洞公園)에서 독립만세(獨立萬歲) 소리가 일어난 지 스물일곱째 날 세계의 이목을 놀라게 하고 사람의 피가 끓게 한 수원의 참사(水原慘事) 당시에 약한 주먹에서 날리는 백성들의 돌팔매에 맞아 죽은 일본인 순사부장(巡査部長)을 비롯하여 금년 1월 17일 새벽 시내 삼판통(三坂通)에서 김상옥(金相玉)의 육혈포에 맞아 죽은 일본인 순사부장 전촌(田村)으로 끝을 마치었다. (중략) 이와 같이 일백 한 명의 죽은 자를 위하여 그 남은 혼(魂)을 불러주는 자의 정성에는 조선사람이나 일본사람의 구별이 없이 또는 전염병을 예방하다가 죽었든지 독립단을 죽이다가 죽었든지의 구별이 없이 오직 사람으로의 최후의 목숨을 버린 그를 위하여 설워하는 줄을 아는 사람도 역시 그 ‘사람으로의 죽음’을 위하여 가석히 여기는 동시에 그 일이 명의 경관들이 죽어 넘어진 벌판에 다시 기백 천 ‘사람’의 죽음이 깔렸음을 과연 기억할는지, 일백 한명의 죽음은 초혼의 제물을 받치는 자나 있거니와 궂은비에 추추히 우는 기백 천의 영혼은 부칠 곳이 어디인가?

 

이 기사의 원문에는 원래 기사작성자의 표시가 없으나 해방 이후에 나온 소오 설의식(小梧薛義植, 1900~1954)의 (새한민보사, 1949), 150~151쪽에 이 기사가 그대로 수록되어 있으므로, 청년기자 시절의 그가 이 글을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사에 나오는 “순직경찰관 한, 두 사람의 죽음 너머에는 수백, 수천의 불쌍한 죽음이 깔려 있다”는 지적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라 하겠다.
해방 이후 노구치 순사부장과 가와바다 순사의 초혼비가 헐리고 바로 그 자리에 ‘대한민국 독립기념비’가 들어선 것은 한, 두 사람의 죽음 너머에 외면받고 있던 수백, 수천의 영혼에 대한 추모와 위령의 뜻을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