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이명준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즈음, 김낙중은 그의 ‘평화통일’의 편력을 시작한다. 1954년 4월. 놀라운 일치다. 바로 그 시간, 삭발을 하고 흰 한복을 걸친 24세의 수척한 한 청년이 대낮에 ‘탐루(探淚)’ 즉 ‘눈물을 찾는다’라고 쓴 등불을 들고 부산 광복동 거리를 홀로 배회하였다. “피묻은 잿더미가 아직도 성에 차지 않아 (여전히) 무력북진을 부르짖는 권력자에게 항거”하고자 했던 청년 김낙중의 일인시위였다. 휴전협정은 이뤄졌지만, 당시까지 부산은 아직 임시수도의 역할을 하고 있었고 많은 피난민들이 북적이던 곳이었다. 청년은 거리를 헤매며 외쳤다.

눈물을 가진 사람은 없는가? 전선에서 피를 토하며 죄 없이 쓰러져가는 가난한 이 땅의 아들들을 위해 전쟁을 반대하며 눈물을 흘려줄 사람은 없는가? 이 겨레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세계열강의 분할 정책을 반대하며, 진정으로 눈물 흘리는 사람은 없는가?

20세에 전쟁을 맞은 김낙중은 서울, 파주, 대구, 부산 등에 머물며 세상이 이쪽저쪽으로 번갈아 뒤바뀌는 것을 경험했다. 그는 어느 쪽을 향해서도 총을 쏘고 싶지 않았다. 도피해 다녔다. 고교 교사의 소개로 미군 취사부에 몸을 의탁해 접시를 닦다 임시수도 부산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52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한 것도 국민병 징집을 피하려는 목적이 컸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이곳에서도 학생들을 동원하여 ‘휴전반대 북진통일’을 외치게 했다. 김낙중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더 이상 도피만 하고 살 수는 없었다. 도피할수록 정체 모를 죄의식도 커졌다. 그는 53년 어느 날 일기에 다음과 같이 쓴다.

더 이상 방황하지 말자. 더 이상 주저하지 말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피로 얼룩진 우리 민족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이제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온전히 받아들이자. 망설이지 말고 실천에 옮기자.

그리하여 ‘탐루’ 등불을 든 일인시위에 나섰던 것인데, 이 해프닝은 북부산서 형사들에게 끌려가 따귀를 맞고 훈계 방면되는 것으로 끝났다. 오늘날 ‘일인시위’는 참신한 시위방식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그저 ‘정신 나간 행동’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되었을 뿐이다. ‘탐루’ 시위는 자유인 김낙중의 원형적 특징을 집약한다. 그는 평화통일의 염원을 인간의 눈물이라는 구도적 동기와 연결시켰다. 더 이상 개인적 도피에 그치는 소극적 자유가 아니라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한 적극적 자유의 구현에 나서기로 결심한 것이고 이를 보편적 인류애의 호소와 연결시켰다. 그의 행동은 여전히 개인의 차원이었지만, 그가 품은 자유와 책임의 폭은 그만큼 넓었다. 이 해프닝 이후 그는 서울로 돌아와 대학을 다니며 “민족 전쟁과 이데올로기 싸움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연구”에 전념한다. 그리고 아래 취지의 호소문을 두 통 작성했다.

다시는 이 땅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되며, 우리가 살 길은 ‘평화통일’뿐이다. 그리고 서로 피투성이가 된 남북의 어버이들이 이제 와서 양보와 타협으로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젊은 세대들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대화를 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공동의 광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공동의 광장’이라. 이명준이 꿈꾸었던 ‘보람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광장’과 중첩되고 있다. 작가 최인훈의 상상력은 이렇듯 살아있는 김낙중의 꿈속에서 이미 선취되고 있었다. 김낙중은 이 호소문을 판문점을 직접 찾아가 남북 당국에 동시에 전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경계가 삼엄하여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1954년 9월 말 금촌에 주둔한 해병대 사단 사령관실을 찾아가 자신이 찾아온 목적을 말했다. 그에게 돌아온 것은 판문점으로의 안내가 아니라 파주 경찰서로의 연행이었다. 이어 경기도 경찰국, 다시 치안국으로 이송되어 조사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아무리 조사해봐야 김낙중에게는 경찰이 트집 잡을 아무런 ‘조직 전력’, ‘좌익 전력’이 없었다. 그는 그저 혼자 행동하는 젊은이였다. 그저 철없는 학생의 정신 나간 기행(奇行)일 뿐이라 생각한 수사관들은 ‘학생은 공부나 하라’고 호통쳤다. 이번에는 그냥 훈방하지 않았다. 청량리 정신병원에 며칠 강제 수용시켰다. 나흘째 되는 날 치안국 분실장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일장 훈시와 교양 교육을 시킨 후에야 집으로 돌려보냈다.

김낙중은 좌절 앞에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한 발 더 앞으로 나간다는 점에서 이명준과 다르다. 귀가한 김낙중은 자신의 평화통일안 완성에 더욱 매진했다. 그해 겨울을 온통 이 작업에 몰두한 끝에 김낙중은 30여 개 조문에 이르는 기본조약과 8개의 부속협정들로 이루어진 ‘통일독립청년 고려공동체 수립안(수립안)’을 완성했다. 1955년 2월, 우선 이 수립안과 취지서를 경무대(오늘날 청와대)를 통해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청원서로 제출했다. 그러나 나흘 후 돌아온 건 경무대경찰서 압송과 국가보안법 위반 구속이었다. 보름 동안의 가혹한 심문과 훈계 후에 김낙중은 또 방면된다.

그의 ‘수립안’의 요점은 무엇이었을까. 남북이 서로의 통치권을 인정한 상태에서 휴전선에 ‘초국가기구’인 ‘청년공동체’를 설립하고, 이 공동체가 점차 남북 양측의 주권을 이양받아 (15년 이내에) 통일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청년’이란 ‘1950년 6월 25일 현재 만 20세 미만인 자와 그 이후에 출생한 자’이고, 그 공동체가 수립될 곳은 ‘비무장지대와 판문점 부근의 1,000평방킬로미터의 지역’이라 하였다.

그러나 오직 무력에 의한 북진통일만이 유일한 통일의 길이라 주장하고 있던 당시 이승만 정권에게 청년 김낙중의 이 ‘수립안’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가히 짐작할 수 있겠다. ‘위장 빨갱이’ 아니면 ‘미친놈 잠꼬대’였을 것이다. 전쟁 직후라 경찰 조직도 어수선했던 탓인지, 아니면 분단체제가 아직은 어설픈 상태였던 탓인지 모를 일이지만 아무튼 경찰은 김낙중을 풀어주었다. 그 자리에서 ‘시경 사찰과장’은 다음과 같이 훈계했다.

이놈아, 어린놈이 뭘 안다고 까불어. 공산당이 우리들하고 똑같은 사람인 줄 알아? 얼마나 무자비하고 지독한 폭력주의자들인데. 그놈들이 지금 휴전을 시켜놓고 눈이 시뻘개 가지고 새로운 전쟁 준비에 날뛰고 있는 판에 무슨 놈의 평화통일이야. …… 그것은 네가 공산주의자가 뭔지도 모르고 하는 철부지 소리야. 공산당이 들어주지도 않을 실현성 없는 공상을 가지고 들고 다니니 네가 미친놈이지 뭐야? 공연히 쓸데없는 짓하지 말고 가서 공부나 해. 송청해서 형무소로 보낼 수도 있지만 네 나이가 아직 어리고 해서 고려해주는 거야.

그러나 김낙중의 ‘자유혼’은 여기서도 멈출 수 없었다. 오히려 ‘결정적인 도약’을 감행한다. ‘자유혼의 도약’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과연 자신을 훈계했던 사람들 말처럼 북한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라 악마’일 뿐이며, 따라서 ‘대화가 불가능’한 것일까. 직접 알아보고 싶었다. 그의 통일방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의 통일방안으로 북측을 설득하고 싶었다. 이것이 그가 선택한 길에 대해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하여 김낙중은 1955년 6월 25일 단신으로 임진강을 헤엄쳐 건넜다. 그가 강을 건넌 곳은 자신이 자란 파주의 고향마을과 멀지 않은, 따라서 그에게는 아주 익숙한 곳이었다. 이제 강 저쪽과 이쪽이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오히려 익숙하지 않았다. 강 저쪽도 그가 자란 고향 동네의 일부였을 뿐이다. 남과 북의 현실의 경계가 오히려 낯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김낙중은 거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서야 도강(渡江)에 성공한다. 그저 ‘동네 마을 강 건너기’라고 생각했겠지만, 수영도 익숙하지 않은 데다 폐병으로 허약한 체력, 그리고 장맛비로 불어난 강물이 그의 생명을 위협했다.

도강 후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한 농가에서 잠을 청하다 김낙중은 체포된다. 그리고 개성을 거쳐 평양의 내무서 예심처로 끌려가 취조를 당했다. 여기서 김낙중은 그의 인생에서 최초로 ‘간첩 혐의’를 받게 된다. 아니 간첩이 되어야만 했다. 김낙중의 진심을 북은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한 새파란 젊은이가 홀로 작성한 통일방안을 가지고 북 당국과 토론하기 위해 목숨 걸고 월북했다? 그들이 보기에 말이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예심처 취조원은 김낙중에게 오직 간첩죄를 자백하라고 강요할 뿐이었다. 다른 어떤 이야기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허망하게 처형당하거나 끝 모를 감옥살이를 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김낙중은 궁리 끝에 스스로 없는 ‘한미 고용 간첩’이 되어야 했다. 그가 소지하고 온 통일안은 한미 정보부에서 만들어준 것이고, 만일 이 안을 들고 간 사람을 북이 죽이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것이고, 살려 보내면 당장 전쟁을 할 의사는 없는 것으로 보겠다는 게 한미 정보부의 뜻이라는 픽션을 만들어냈다. 이 픽션을 북이 믿어주기를 기대했다. 북의 공식자료가 없으니 당시 평양 내무성에서 김낙중의 이 진술을 어떻게 판단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탐루』에 따르면 결국 북은 김낙중의 자백을 믿어보기로 한 것 같다. 그가 소지한 통일안에 대해 토론도 해주고 건강 회복을 위해 요양치료도 해준다. 그리고 최종선택권을 김낙중에게 준다. 남으로 돌아가도 좋고 이곳에 남아도 좋으며, 남는다면 공부하도록 돕겠다고까지 했다 한다. 김낙중은 자신이 북에 온 목적 즉 “북한의 입장을 듣고 다시 남한으로 내려가 어떻게든 우리 민족이 화해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겠다”는 뜻을 상기하여 다시 월남하는 길을 선택한다.

1956년 6월 23일 새벽 김낙중은 경의선 철길을 따라 월경, 미군 초소에 ‘귀순’하여 서울 대방동의 미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미군 방첩대 조사를 거쳐 한국 경찰 특수정보과에 인계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는다. 미군과 한국 경찰 역시 김낙중을 간첩으로 간주했다. 이후 재판에서 김낙중은 간첩죄는 무죄, 국가보안법 위반에 대해서는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1957년 6월 22일 출옥한다. 임진강을 건넌 지 딱 2년 만이었다.


책 소개:

한반도 위의 남과 북은 여전히 정전(停戰) 상태의 ‘분단체제’를 존속하며 서로가 맞서고 있다. 이러한 전쟁 상태에서는 순수한 통일 의지와 열망조차도 갈등을 격화하고 독재를 강화하는 불쏘시개로 이용되는 ‘딜레마’에 봉착할 뿐이다. 『코리아 양국체제』의 저자는 체제의 전환(‘질적 단절’)을 통해 남북이 평화와 공존에 이르는 선명한 대안을 제시한다. 일 민족 이 국가의 평화체제이자 공존체제, 한마디로 ‘코리아 양국체제’이다.

이 책은 양국체제의 이론을 종합 정리한 1부, 촛불 이후의 현실 흐름과 이에 대한 양국체제론 입장에서의 진단을 모은 2부, 그리고 분단체제론과 양국체제론 간의 논쟁을 3부로 싣고 있다. 지난 실패의 역사를 면밀히 분석하면서 코리아 양국체제가 촛불혁명을 평화적으로 완성하는 길이라는 점을 역설하고 체제전환의 당위와 함께 구체적 방법론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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