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비망록 55]

가토신사(加藤神社), 당고개에 터를 잡은 왜군장수의 추모공간
다치바나 조선주차헌병대사령관이 깊이 관여했던 신사의 건립과정

이순우 책임연구원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 서울지역에 설치되어 있던 일제의 신사들을 얘기하면, 남산 왜성대에 자리한 경성신사(京城神社)와 남산 중턱 옛 한양공원 터에 들어선 조선신궁(朝鮮神宮, 1925년 10월 준공) 정도를 언급하는 것이 보통이다. 원래 경성신사는 1898년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으로 설립되었다가 1913년에 경성신사로 개칭된 내력을 지녔으며, 이 안에 천만궁(天滿宮, 1902년 창립), 남산도하신사(南山稻荷神社, 1931년 창립), 팔번궁(八幡宮, 1931년 창립)을 섭사(攝社)로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고 1916년 5월 22일에 타니무라 요리타카(谷村賴尙) 외 69명의 출원(出願)에 따라 신사창립에 대한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았는데, 이는 1915년 8월 16일에 조선총독부령 제82호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의 제정 당시에 덧붙여진 부칙규정에 따른 조치였다. 여기에는 “본령 시행 당시 현존하는 신사는 시행일(1915.10.1일)부터 5개월 이내에 신사창립의 허가수속을 할 것”으로 정하고 있었다.
그 후 경성신사는 1936년 8월 1일부터 국폐소사(國幣小社, 조선총독부가 관리비용 일체를 부담하는 신사)로 승격되었고, 이와 동시에 1936년 8월 11일에는 기존의 「신사사원규칙」을 폐지하고 조선총독부령 제76호 「신사규칙(神社規則)」이 새로 제정되었다. 이곳 경성신사에서는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국혼대신(國魂大神, 쿠니타마 오미카미)’, ‘대기귀명(大己貴名, 오나무치노미코토)’
, ‘소언명명(小彦名命, 스쿠나히코나노미코토)’을 제신(祭神)으로 삼았다.

대륙신도연맹(大陸神道聯盟)에서 엮어낸 (1941)에 수록된 경기도 지역 신사(神祠) 목록이다. 가토신사와 한강신사를 비롯하여 신메이신사가 두루 나열되어 있다.

 

이밖에 경성신사의 뒤쪽에 자리하고 있는 노기신사(乃木神社, 1934년 창립)와 용산 일본군병영지의 후면 남산 기슭에 조성된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1943년 창립) 등의 존재도 곧잘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들 말고도 한강 건너 흑석동에 있던 한강신사(漢江神社, 1912년 창립)를 비롯하여 태평로 쪽에 에비스신사(惠比須神社, 1913년 창립), 죽첨정(竹添町, 지금의 충정로) 지역에 이즈모대사(出雲大社), 삼각지 인근에 도하신사(稻荷神社, 이나리 신사)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메이신사(神明神祠)라는 것은 영등포동, 용두동, 신길동, 이태원동 등지에도 두루 포진하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된다.
여기에서 말하는 신메이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의 별칭이므로, ‘신메이신사’는 이를테면 이세신궁(伊勢神宮)을 총본산으로 삼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주된 제신으로 모시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의 신사(神祠, 격이 낮은 소규모 신사)인 셈이다. 1917년 3월 22일에 제정된 총독부령 제21호 「신사(神祠)에 관한 건」에 따르면 “신사(神祠)라고 칭함은 신사(神社)가 아니면서 공중(公衆)에 참배를 시키기 위해 신기(神祇)를 봉사하는 곳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용어라는 점도 가늠해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원효로 인근 영정(榮町, 지금의 신계동 1번지 위치)에 있는 문평산(文平山)에 터를 잡은 가토신사(加藤神社, 1914년 창립)의 존재도 결코 이 목록에서 제외할 수 없다. 오카 료스케(岡良助)가 쓴 (박문사, 1915)라는 책, 173쪽에는 “용산 원정(元町, 지금의 원효로) 2정목 와카노이케(和歌の池) 옆에 있다. 가토 키요마사 공(加藤淸正公)의 신령(神靈)을 제사지내는 구마모토(熊本) 가토신사의 분령(分靈)을 대정 3년(1914년) 12월에 봉영(奉迎)했다”고 쓴 구절이 있는데, 이를 통해 최초에는 다른 장소에 터를 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1915)에 수록된 「경성급용산」 지도를 통해 ‘와카노이케’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이 연못 곁에 가토신사가 처음 터를 잡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에 나오는 ‘와카노이케’라는 연못은 조선총독부 철도국에서 펴낸 (1915)에 수록된 「경성급용산(京城及龍山)」 지도자료에 그 위치가 표시되어 있으며, 또한 1912년에 임시토지조사국에 의해 제작된 「토지조사부」와 「지적원도」를 통해 확인해본즉 그 당시 ‘경성부 용산면 대도정(大島町, 지금의 용문동) 9번지(전체면적 2,734평)’에 해당하는 구역으로 드러난다.
1916년 5월 18일자에 수록된 「가토신사 춘계대제(加藤神社 春季大祭)」 제하의 기사에도 ‘와카노이케’라는 연못의 존재가 드러나 있다.

 

구마모토시 쿄마치(熊本市 京町) 가토신사에서는 작년 이래 구용산 야시마쵸 와카노이케(舊龍山 八島町 和歌之池) 측(側)에 키요마사공(淸正公)의 분령(分靈)을 봉사(奉祀)하였는데 내(來) 24일로 복(卜)하여 춘계대제를 집행하기로 목하(目下) 준비중인데 기일(其日)은 생화진열회(生花陳列會), 예기가무(藝妓歌舞), 소인스모(素人相撲) 등 여흥도 거행하기 위하여 유지자(有志者) 간에 주선중이라더라.

 

이 기사에서 언급한 ‘야시마쵸(八島町)’는 ‘오시마쵸(大島町)’의 인쇄 착오로 봐야할 듯싶다. 어쨌건 가토신사의 위치는 여러 자료에서 거듭 확인되는 바와 같이 ‘와카노이케’ 옆에 가까우면서 ‘원정 2정목’에 속한 자리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구체적인 지번 주소까지 확인하기는 어려운 상태이다. 이보다 좀 더 세월이 흘러 일본어 신문인 1930년 1월 10일자에 수록된 「가토신사 개축(改築)」 제하의 기사는 이 신사가 문평산(文平山, 통칭 ‘당고개’ 지역) 아래 공터로 자리를 옮긴 때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용산의 가토신사를 개축하여 용산의 사람들이 결혼(結婚), 기타 의식(儀式)을 그 신전(神前)에서 거행할 수 있도록 그렇게 되면 만사(萬事)가 편리할 것이라고 하는 몇 사람의 이야기에서 이 논의가 점차 진전되어 왔는데, 만약 이 이야기가 진전되면 이를 기회로 동(同) 신사를 문평산(文平山) 아래 공지(空地)에 신축하고 현재의 신사부지(神社敷地)를 경성신사(京城神社)의 어려소(御旅所; 신사의 제례 때 신령을 태운 가마가 순행하는 도중에 쉬거나 숙박하는 장소)로 충당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이러한 결과로 그 이듬해인 1931년 4월 24일에는 가토신사의 춘계대제에 맞춰 참도개수준공봉고제(參道改修 竣工奉告祭)가 열리기에 이른다. 이때 새로 조성된 가토신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제8호(1936)와 일한서방(日韓書房) 편찬, (1937)의 후면에 수록된 「경성요부(京城要部)」 와 같은 지도자료를 통해 문평산 지역의 철도수도급수소(鐵道水道給水所) 바로 옆쪽에 표시된 것이 남아 있으므로 이를 참고할 수 있다.

 

일본어 신문인 1931년 4월 28일자에 수록된 ‘가토신사’ 참도개수 준공봉고제의 광경이다. 뒤로 보이는 언덕 일대가 이른바 ‘문평산(文平山, 통칭 당고개)’이다.

 

일본어 신문인 1932년 10월 20일자에 수록된 가토신사 고소사건 관련기사이다. 여기에는 흥미롭게도 조선국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 그리고 가토의 통역이던 조선인 김관이 함께 배향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서술되어 있다.

 

그런데 가토신사의 건립 내력과 관련하여 꽤나 흥미로운 내용 하나가 눈에 띄는데, 1932년 10월 20일자에 수록된 「신사령(神社令)에 얽힌 가토신사(加藤神社)를 고소, 종교단체(宗敎團體)의 책동(策動)인가, 용산서(龍山署) 일응취조(一應取調)」 제하의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가토 키요마사 공(加藤淸正公)을 주신(主神)으로 하고, 순화(順和, 순화군) 임해(臨海, 임해군) 양왕자(兩王子)와 당시 키요마사공의 통역(通譯)으로 종사하면서 위덕(威德)을 경모하여 내지(內地, 일본)에 귀화(歸化)했고 장렬한 순사(殉死)를 했던 조선인 김관(金官)을 배사(配祀)하는 내선동화(內鮮同化)의 신(神) 용산의 가토신사에 대해 수 일 전 용산서(龍山署)에 고소장(告訴狀)이 제기되어 목하(目下) 동서(同署)에서는 관계자를 불러 취조중이다.
측문(仄聞)한 바에 의하면 동(同) 신사는 대정 3년(1914년) 통감시대의 경무총장(警務總長)이던 육군중장(陸軍中將) 다치바나 코이치로(立花小一郞) 씨(氏)의 재임중(在任中)에 용산의 유지가 상계(相計)하여 봉신회(奉信會)라는 것을 조직, 키요마사공 분령소(分靈所)를 건설하고자 당국의 허가를 얻어 가토신사를 건설, 구마모토(熊本)의 본사(本社)에서 사사(社司) 타케시타 마사미(竹下眞美) 씨가 내선(來鮮), 동사 건설과 흥륭을 위해 진력했으나 그 후 일시 동씨(同氏)를 대신하여 엔인 히토시(圓印等)가 사사(社司)로서 사사(社事)를 맡았으나 이런저런 재미없는 문제를 야기하여 결국 그 부덕(不德)한 행위로
부터 용산부민(龍山府民)의 비난을 야기(惹起)하여 퇴사(退社)에 의해 내지(內地)로 물러났고, 재차 부민의 간망(懇望)에 의하여 타케시타 씨가 사사로 취임하여 금일에 이르렀던 것이다.
고소(告訴)의 이유는 근년 동사 관계자와 유력자가 동사를 용산신사(龍山神社)로 개명(改名)하여 경성신사와 같은 모양으로 크게 하려는 의향에 당국에 출원(出願)했으나 당국으로서는 일부일사(一府一社)라고 하는 것이 정해져 있었으므로 허가되지 않았던 것인데, 이내 신사령(神社令)이 개혁(改革)되어 당시 이 신령(新令)에 부응하지 않는 전국의 각사는 5개월 내에 새롭게 신사(神社)로서의 허가 신청을 하도록 되어 있었던 것을, 동사(同社)에서는 먼저 용산신사(龍山神社)로 개명하려는 의향도 있어서, 개정된 신령에 따라 가토신사(加藤神社)로의 수속(手續)을 게을리 했던 관계상 형식적으로는 신사로서 존재
하지 않는 것이 될 수밖에 없는 상태에 있다고 하는 이유에서, 여기에 주목하여 부내(府內) 황금정(黃金町, 지금의 을지로)에 거주하는 원(元) 한강신사(漢江神社) 근무 우에자키 아무개(上崎某)와 용산〇〇교(敎) 일파의 아무개(某)가 책동하고, 이에 겸해 이름 하여 신도관구소(神道管究所)라는 것을 통해 사실 현존한 가토신사의 〇〇을 꾸몄던 것이다. (이하 생략)

 

며칠 후 1932년 10월 25일자에 다시 등장한 고소사건의 후속 기사에 따르면, 익명(匿名)으로 표기된 종교단체의 정체는 천리교(天理敎)였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런데 위의 기사에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이 서술되어 있는데, 우선 가토신사에는 왜군장수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뿐만이 아니라 임진왜란 당시 그에게 포로로 잡힌 조선국 왕자 임해군(臨海君: 1574~1609. 선조의 장자)과 순화군(順和: 1580~1607. 선조의 6남), 그리고 가토의 통역을 지냈다는 김관(金官)이라는 조선인도 함께 배향되어 있었다는 부분이 그 가운데 하나이다.

조선주차헌병대사령관 겸 조선총독부 경무총장으로 새로 임명된 다치바나 코이치로(立花小一郞) 육군소장의 인물 사진이다. 그는 가토신사의 건립과정에 깊이 관여했던 것으로 드러난다. 1914년 4월 19일자

1934년 4월 18일자에 수록된 ‘가토신사’의 설립허가내역이다. 가토신사의 최초 설립은 1914년 12월의 일이지만, ‘용산신사’로 개명하려던 시도가 계속 지연되면서 총독부령에 의한 설립허가는 이때 처음으로 이뤄졌다

 

6년 가까이 조선에 머물렀던 인물이었다. 이 시기는 일제의 강압통치가 본격화하던 때와 고스란히 겹치며, 특히 그 자신이 헌병경찰제도의 수장인 ‘총독부 경무총장’을 지낸 만큼 이른바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자행한 장본인이기도 한 셈이다.
그리고 앞선 기사에서 눈길을 끌만한 또 다른 내용의 하나는 이곳이 ‘용산신사(龍山神社)’로 개명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는 부분이 될 것이다. 이것은 물론 일부일사(一府一社; 하나의 부에 하나의 신사만 두는 것)의 원칙에 따라 허가가 불발되었는데, 여느 신사들과는 달리 유독 이곳 가토신사에서는 1915년 8월의 「신사사원규칙」 또는 1917년 3월의 「신사(神祠)에 관한 건」에 따른 절차를 거친 아무런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던 것인지를 설명해주는 단서가 된다. 실제로 가토신사의 신사설립허가에 관한 기록은 무려 19년 가까운 공백기를 지나 1934년 4월 18일자 「휘보(彙報)」에 “경기도 경성부 영정(榮町) 1번지에 가토신사(加藤神祠) 설립의 건, 사이키 츠구시(齋木胤志) 외 25명의 원출(願出)에 대해 4월 11일부로 이를 허가함”이라고 기재된 것이 최초이다. 짐작컨대 이 마저도 앞선 기사에 채록된 1932년의 고소사건을 수습하기 위한 조치의 결과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에는 신사(神祠)였던 것이 다시 신사(神社)의 격을 갖춰 설립허가를 새로 받은 것은 일제패망을 몇 달 앞둔 시점의 일이었는데, 1945년 5월 18일자 「휘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신사창립허가(神社創立許可)] 경기도 경성부 용산구 영정(榮町)에 가토신사(加藤神社) 창립의 건, 이시하라 이소지로(石原磯次郞) 외 62명의 원출(願出)에 대해 소화 20년(1945년) 5월 15일부로 이를 허가함.

 

여기에 나오는 이시하라 이소지로(石原磯次郞)는 용산 지역에 근거를 둔 실업가로 창덕가정 여학교(彰德家庭女學校, 한강로 1가 50번지)의 설립자인 동시에 경기도회 관선의원을 역임했던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1927년 7월 14일 정토종 대념사(淨土宗 大念寺; 한강통 11번지)의 사원창립허가와 1943년 10월 20일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의 신사창립신청 때에도 대표자의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도 아울러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내력을 지닌 가토신사는 일찍이 조선을 침략한 왜군장수를 내선융화(內鮮融和)의 상징으로 삼았던 공간이니만큼 일제의 침략전쟁과도 전혀 무관할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1941년 9월 26일자에는 이곳에서 산업진흥과 황군(皇軍, 일본군)의 무운장구(武運長久)를 비는 기원제와 아울러 시국영화(時局映畫) 상영회가 열렸다는 소식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불과 며칠 후에는 이곳에서 약간 별스러운 행사가 벌어진 흔적도 눈에 띈다.
1941년 9월 28일자에 수록된 「비행기, 탱크, 오토바이로 남방보도(南方寶島)를 정벌(征
伐), 모모타로회 대표(桃太郞會 代表), 가토신사에 참예 맹서(參詣 盟誓)」 제하의 기사에는 이러한 내용이 남아 있다.

 

1941년 9월 28일자에 수록된 ‘모모타로회(桃太郞會)’의 가토신사 참배 관련 기사내용이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가속화하면서 이곳도 예외 없이 전쟁동원의 공간으로 사용되었음을 말해주는 장면이다.

 

국민의 남방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가고 있는데 부내 구용산 방면의 국민학교 생도들 사이에는 동화(童話) 속의 영웅 ‘모모타로(桃太郞)’가 남방의 보배섬을 쳐서 그곳의 금, 은, 보배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를 생각하고 한 달 전부터 ‘모모타로’ 운동을 일으키게 되어 금정국민학교(錦町國民學校) 고등과 생도 야마모토 유키오(山本行雄, 15) 군을 비롯한 지원병지망소년의용대(志願兵志望少年義勇隊) 60명은 이 운동에 남 먼저 참가하여 모모타로회(桃太郞會)를 조직하여 26일 오후 3시반 원정(元町) 2정목 가토신사에 세 명의 대표자가 복숭아를 그린 ‘일본일(日本一)’의 깃발을 기증하며 다음과 같은 맹서를 하였다고 한다.
“우리들은 옛날의 모모타로와 같이 씩씩하고 명랑하고 굳세인 소년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모모타로의 꿩과 원숭이와 개 대신에 우리들은 비행기와 탱크와 오토바이를 가지고 남방의 보배섬을 치겠습니다.
” (사진은 모모타로회 대표들의 기도)

 

여기에 나오는 금정국민학교는 옛 용산공립보통학교에서 전환된 것으로 지금의 ‘금양초등학교(錦陽初等學校, 효창동 126번지)’를 가리키며, 이곳은 원래 조선인 학교였으므로 야마모토 유키오라는 학생 역시 창씨개명한 조선인 아동인 것임에 틀림없다. 이들이 이곳을 찾아 ‘모모타로’와 같은 소년이 되겠다고 맹세한 것은 일제 패망기에 이르러 가토신사도 예외 없이 전쟁동원의 공간으로 사용되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