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잔치』

2014년 2월 13일 서초동 서울고등법원 형사 10부에서는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재심재판 선고공판이 있었다. 재판장 권기훈(배석판사 이주형, 김형석)은 강기훈에게 유서대필 부분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했다. 30분에 걸친 재판장의 판결문 낭독이 끝나자 법정을 가득 메웠던 방청객들 속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당시 재판정의 모습을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사건 전말기’라는 이름으로 안재성이 쓴 『거짓말 잔치』(도서출판 주목, 2015)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다.

진실의 종이 울리는 30분 동안, 강기훈은 한번도 옆을 돌아보지 않은 채 약간 고개를 숙인 긴장된 표정으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양복을 입은 그의 얼굴은 오랜 투병생활로 핏기라곤 없이 창백했다. 항암치료에 지쳐 서있기도 힘든 모습이었다.

“장시간에 걸친 재심 심리에 참여해준 사건관계인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재판장이 인사말을 마치자 법정 안에 가득차 있던 방청객과 기자들 사이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여기저기서 서로 끌어안거나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이석태 변호사가 강기훈을 힘껏 끌어안고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러나 강기훈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무표정했다. (중략)

법원 복도에서 즉석으로 기자회견이 열렸다. 강기훈은 함세웅 신부가 “아들의 무죄를 위해 애쓰신 어머니가 몇해 전 세상을 뜨셨다.”고 말할 때서야 비로소 눈물을 반짝였다. 그는 플래시를 터뜨려대는 취재진들에게 떨리는 음성으로 짤막하게 말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분들이 더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아내 이영미의 부축을 받은 강기훈은 휘청이는 몸을 이끌고 법정을 나서서 늦겨울 한파가 불어대는 거리로 사라졌다.

같이 일하던 동료 후배의 유서를 대신 써줬다는 어처구니 없는 죄명으로 구속되었던 강기훈은 사건이 있었던 1991년부터 무려 23년만에 비로소 억울한 누명을 벗은 것이다. 법정에서 애써 침착했던 강기훈은 일산의 집에 돌아오자 비로소 울기 시작했다. 숨이 가빠서 더 이상 울 수 없을 때까지 오랫동안 흐느껴 울었다. 자신의 무죄를 믿으며 오랫동안 인고의 세월을 살다 병으로 끝내 먼저 가신 부모님들과 그동안 자신이 걸어온 신산한 삶을 돌아보면서 회한의 눈물이 끝없이 북받쳐 올랐으리라.

대법원 판결은 그로부터 14개월 후 2015년 5월 14일에 있었다. 재판장 김창석 대법관과 주심 이상훈, 조희대 대법관은 검찰의 항고를 기각함으로써 강기훈 무죄를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사건이 있은지 꼬박 24년만이었다.

 

‘진실의 승리’

2012년 4월 강기훈에게 간암이 발견되었고, 5월에 간 한쪽의 절반을 잘라내는 대수술을 했다. 7월 한겨레신문에서 강기훈의 간암 발병 소식을 알리면서 강기훈의 근황 사진과 함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당시 고법에서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재심 권고를 받아들여 재심청구를 수용하는 결정했는데도 3년동안이나 대법원에서 재심개시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해서 강기훈이 자신의 소회를 밝히는 내용이었다. 강기훈은 “대법원이 쥐고 있을 이유가 없어요. 나쁜 행동입니다. 나중에 비판 받지 말고 얼른 결정을 내려 줬으면 합니다. 저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강기훈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당시 강기훈은 수술 경과가 썩 좋지 못해 각혈과 내출혈로 생사의 기로에 서 있었고, 체력이 떨어져 걷거나 말하기도 힘들어 하는 상태였다.

이 기사를 보고 필자가 몸담고 있었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에서는 긴급히 회의를 열어 강기훈의 생애사 구술채록을 결정했다. 강기훈의 건강상태가 급격히 악화될 가능성도 있다고 보고 시기를 놓치지 않고 기록을 남길 수 있도록 조처한 것이다.

필자가 이 구술의 면담자로 결정되었다. 필자는 강기훈과는 전민련 시절부터 선후배 사이로 가깝게 지내온 터라 강기훈에게 전화를 걸어 사료관의 결정 사실을 전하고 구술을 수락해 주도록 동의를 구했다. 강기훈은 자신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으면서도 선배의 부탁에 선선히 응락해 주었다.

강기훈이 암에 걸렸다는 소식이 알려 지면서 김선택을 비롯한 전민련 선후배들이 긴급히 움직이면서 강기훈의 건강과 재심개시 촉구를 위한 모임을 조직했다. 그리하여 2012년 8월 28일 향린교회에서 함세웅, 이창복, 김상근 등 재야인사 200여명이 모여 ‘강기훈의 쾌유와 재심개시 촉구를 위한 모임’을 결성했다. 이 모임에서는 각계 인사들의 서명을 받아 정계와 법조계에 탄원서를 제출하여 조속한 재심 개시를 촉구하면서 강기훈의 치료를 위한 모금활동도 진행했다. 10월 9일 서울 시립대에서 가수 이은미, 안치환 등이 출연하는 강기훈 치료비 마련을 위한 모금공연 「누구도 나에게 이 길을…」이 있었다. 공연 후 가수 이은미가 자신의 출연료를 전액 치료비로 내놓아서 감동을 주었다.

강기훈에 대한 구술은 그해 9월-10월 두 달간 5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마지막 구술이 10월 22일에 있었는데, 마침 그 사흘 전인 10월 19일에 대법원에서 검찰의 재항고를 기각하고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고법에서 재심 개시 결정을 내린지 3년여만의 일이었다.

대법의 재심결정은 시간을 오래 끌기도 했지만 내용이 명쾌하지 않았다. 고법이 무죄 추정의 재심개시 결정을 내린 반면에 대법에서는 고법에서 무죄의 증거로 인정한 것을 그 일부만 인정하는 등 재심재판에서 공방의 소지를 남겨 놓았다. 그래서 강기훈은 ‘의도가 건전하지 않은’ 면피성 판결이라고 강하게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또 다시 지긋지긋한 법정 공방을 해야하는 일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강기훈은 자신의 무죄 입증과 더불어 검찰과 법원의 잘못을 밝혀내겠다는 전의를 불태웠다.

그리고 약 두 달 후 2012년 12월 20일 서울고등법원 형사 10부에서 재심재판이 개시 됐고, 예상대로 1년여의 치열한 공방 끝에 결국 2014년 2월 재판부는 강기훈의 손을 들어줬다. 번호인단 변론 요지서의 말처럼 값진 ‘진실의 승리’였다.

 

김기설의 분신

1991년 5월 8일 아침 강기훈은 전날 밤 밤늦게까지 일하고 늦잠을 자다가 어머니가 깨우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기훈아! 일어나봐! 누가 분신을 했단다. 이번에는 한양대생이래!” 깜짝 놀란 기훈이 눈을 비비며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그 때 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기훈이 사귀는 여자 친구 이영미였다. 이영미는 떨리는 음성으로 강기훈과 전민련 사무실에 함께 근무하던 김기설이 서강대에서 분신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전화를 받고 난 기훈은 세수도 하는 둥 마는 둥 밥이나 먹고 가라는 어머니의 말도 뿌리치고 황급히 집을 나섰다.

집을 나선 강기훈은 곧바로 종로5가에 있는 전민련 사무실로 나갔다. 강기훈은 총무부장으로서 전국적으로 예정된 집회를 점검하고 김기설 분신에 관한 성명서를 전국 소속단체에 팩시밀리로 송고했다. 그리고 12시 무렵 김기설의 분향소가 있는 세브란스병원 영안실로 갔다.

강기훈이 김기설을 처음 만난 것은 1990년 12월 말경 전민련 송년회에서였다. 새로 들어온 김기설이 총무부에서 함께 근무하게 되었다고 인사를 했다. 강기훈은 붙임성이 좋은 한 살 아래 김기설과 이내 친해졌다. 만난지 한 달 쯤 지났을 때는 김기설에게 이영미의 친구 홍성은을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얼마 후 김기설이 사회부로 가서 주로 전국의 현장을 돌아다니느라 얼굴 마주 치기가 힘들었지만 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후배였다. 그런 김기설이 갑자기 분신자살이라니!

얼마 전 4월 26일 명지대 학생 강경대군이 백골단의 쇠파이프 폭행으로 시위 도중 사망하면서 노태우 정권의 공안통치와 각종 비리, 민생파탄에 대한 대중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노태우 정권을 정치적 위기상황으로 몰아넣은 6공 최대의 정치투쟁인 5월투쟁이 일어난 것이다. 강경대 사망 바로 다음 날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대책회의)’가 결성된 것을 시작으로 5월 4일에는 전국적으로 20여만명이 참여한 5·4 살인규탄집회에 이르기까지 대중들의 투쟁이 급속도로 고양되고 있었다. 여기에 전남대 박승희(4/29), 안동대 김영균(5/1), 경원대 천세용(5/3)이 잇따라 분신하면서 투쟁의 열기는 한층 높아졌다. 김기설은 바로 이 시점에서 자신의 몸을 던져 5월투쟁의 열기를 한층 끌어올리려 했다고 볼 수 있었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 김기설의 분신은 전혀 돌발적 상황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분신과 투신이 잇따르자 문익환, 백기완 등 전민련 공동대표들은 집회 때마다 “죽지 말고 살아서 싸우자.”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고 있었다. 그래서 전민련 실무자가 분신자살을 한 것은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김기설의 분향소에는 여자친구 이영미와 자신이 김기설에게 소개한 홍성은도 와 있었다. 홍성은이 기자들 앞에서 김기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나서야 강기훈은 김기설에게 죽기 전 며칠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김기설은 이미 죽기 사흘 전부터 가까운 후배들에게 자신의 분신을 예고했었다. 그리고 분신 바로 전날 여자친구 홍성은을 만난 자리에서도 분신하겠다는 결심을 밝혀 홍성은을 놀라게 하고 사라졌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는 같은 자취방 선배 임근재에게 유서가 발견되었고, 그래서 임근재 등이 분신을 막기 위해 김기설을 붙들고 밤새 지켰지만 김기설이 새벽에 몰래 빠져나와 분신을 감행한 것이었다. 강기훈은 무겁고 허탈한 마음으로 분향소를 나와 사무실로 돌아갔다. 물론 그는 이때만 해도 김기설의 유서를 둘러싸고 검은 그림자가 자신에게 드리워지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우라’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강경대 죽음 이후 불과 열흘 사이에 잇따라 4명이 분신하자 치안기관에서는 누군가가 배후에서 이들의 죽음을 사주하고 있다는 유언비어성 정보를 언론에 흘리고 있었다. 분신정국으로 초래된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고도의 방법이었다. 이들이 생산한 정보는 언론에 보도되면서 운동권에 분신조가 있다거나 분신할 사람끼리 제비뽑기를 한다는 소문으로 확대되어 다시 치안기관의 정보망으로 흘러 들어갔다. 치안기관은 자가 생산된 정보를 바탕으로 배후세력을 찾으라는 명령을 하달했고, 김영균 분신 때부터는 경찰에서 배후세력을 찾는 수사를 벌이기에 이르렀다.

김기설의 분신 직후 그날 오전 10시경 청와대에서는 대통령 비서실장 주재로 검찰총장 정구영, 법부부장관 김기춘 등 치안관계 대책회의가 열렸고, 회의 직후 검찰총장 정구영은 산하 검찰에 분신자살 배후를 조사할 것을 지시했다. 이 지시를 받아 서울지검장 전재기는 사건을 강력부에 배치 강신욱 부장검사를 반장으로 한 다섯명의 검사로 전담조사반을 구성했다.

김기설 분신사건이 난 날 서강대 총장 박홍도 대책회의를 열고 그 결과를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다. 그 내용이 충격적이었다.

“우리 사회에는 죽음을 선동 이용하는 반생명적 세력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세력의 정체를 우리 모두가 알고 폭로해야 합니다….(중략)… 저는 이 죽음의 세력을 폭로하는 단호한 결단을 선포합니다.”

김기설의 분신이 있기 사흘 전 김지하가 조선일보에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우라.’는 제목의 민주화운동권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마치 운동권이 운동의 목적으로 분신을 배후에서 조정하고 있다는 의심을 노골적으로 표시한 것이다. 그는 노태우 정권에 대한 비판은 일체 없이 운동권에 대해 생명을 가지고 장난하는 생명경시의 철부지라고 매도했다. 이 김지하의 글은 분신의 배후가 있다는 의심을 부추겼고, 나아가 배후세력을 색출하기 위해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도록 역할했다.

 

필적감정과 검찰의 유서대필 프레임

검찰은 즉시 수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현장을 검증하고 당시 상황을 목격했던 증인들과 관련자들을 조사했다. 그리고 김기설의 죽음의 원인을 밝혀줄 중요한 단서로서 김기설의 유서 사본을 입수하고 그 밖에 김기설의 필적이라고 생각되는 전민련이 제출한 업무일지 등 5종의 문서들을 모아 이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에 필적감정을 의뢰했다.

국과수 분서감정실장 김형영은 이 문서들을 감정하고 검찰에 회신을 보냈다. 요점은 김기설이 썼다고 전민련이 제출한 글씨와 유서 필체가 같다는 것이었고, 이것은 김기설 자신이 유서를 썼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검찰은 유서대필의 의심을 풀지 않았다. 검찰은 2종의 새로운 자료를 국과수로 보내 감정을 의뢰했다. 여기에는 강기훈이 학생운동으로 체포되었을 때 경찰 조사과정에서 쓴 본인 자술서 중 본인 이름이 나오지 않는 몇 장이 있었다. 검찰이 전민련 관계자의 과거 수사기록 중에서 유서와 가장 가깝다고 판단한 강기훈의 진술서를 필적감정한 것이다.

필적 감정에 들어간 김형영은 불과 이틀만에 김기설의 유서와 강기훈의 진술서 필적이 동일한 필적이라는 감정소견을 검찰에 보냈다. 김형영은 필적 감정의 기본원칙을 지키지 않은 채 유서는 당연히 본인 글씨일거라고 예단하고, 검찰이 가져온 모든 자료를 같은 사람의 글씨라고 대충 판단해 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났다. 곧 강기훈이 김기설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뜻이었다. 이로써 유서 필적을 둘러싼 기나긴 공방이 시작되었다.

크게 고무된 검찰은 유서는 강기훈이 김기설을 대신해서 써줬다고 결론을 내렸고, 유서가 김기설의 글씨라는 증거로 제출된 모든 문서는 전민련과 강기훈의 조작이라는 프레임으로 자신의 결론을 밀고 나갔다. 예컨대 전민련이 보관하고 있었던 김기설의 수첩이 유서와 필적이 같다고 감정이 나오자 김기설의 수첩이 강기훈에 의해 위조되었다고 몰아갔던 것도 그 예이다.

김기설의 여자친구 홍성은의 증언, 김기설의 아버지의 증언도 이런 프레임에 맞춰 해석하였고, 상당 부분 그런 결론에 맞출 수 있도록 증언을 유도하였으며, 때로 압박하기도 하였다. 이런 증언들은 나중에 본인의 입으로 모두 번복되었다.

검찰은 김기설이 죽은 8일 후인 5월 16일 강기훈의 집을 전격 압수수색했다. 여기서 나온 유인물이 나중에 이른바 ‘혁노맹 사건’으로 추가기소하는 소재로 활용되었다. 이 때부터 강기훈은 자신에게 검찰 수사가 뻗치고 있다는 걸 감지하고 연세대 범국민대책회의로 피신하게 된다.

강경대 장례식이 열렸던 5월 18일 조간부터 강기훈이 유서대필자라는 기사가 신문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날은 강경대 장례식이 치러진 날로 전국에서 수십만 시위대가 거리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을 외치고 있었다. 검찰은 전민련의 간부가 유서를 대필했다고 발표하면서 강기훈이라는 이름까지 흘렸다. 검찰은 교묘하게 언론을 이용했고, 언론은 경쟁적으로 검찰이 흘리는 내용들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노태우정권은 유서대필문제를 폭발하는 대정부투쟁의 열기를 냉각시키는데 교묘히 이용했다. 김기설이 죽은 후에도 분신이 잇따르고 있었다. 윤용하, 김정순, 김귀정 등 강경대 이후 두달간 13명이나 사망했다. 그러나 방송과 신문은 온통 유서대필 문제를 쟁점으로 운동권이 정말로 분신을 배후에서 지시하고 있는가 하는 기사들로 채워졌다.

 

강기훈 구속과 검찰조사

5월 18일부터 범국민대책회의는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시작했고, 강기훈도 강경대 장례식에 참석한 후 여기에 합류하게 된다. 검찰은 5월 26일자로 강기훈을 자살방조 혐의로 사전구속영장을 발부 받아 공식적인 체포작전에 나섰다. 강기훈은 다음날 5월 27일 오전 기자들 앞에서 김기설의 유서와 같은 내용을 써 보이며 검찰의 조작을 반박할 가치도 없는 주장이라 비판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 역시 조작극이라 묵살했고, 언론도 대수롭지 않게 처리해 버렸다.

명동농성은 한달 이상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동안 유서문제를 둘러싸고 공안당국과 재야 민주화운동 진영의 공방은 끝없이 이어졌다. 국민들도 피로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외국어대를 방문한 정원식 총리에게 학생들이 계란과 밀가루 세례를 퍼부은 사건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학생운동권에 여론의 질타가 집중되고 운동권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다. 정부당국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민주화운동권에 대한 탄압의 강도를 높혔다. 대정부시위가 소강상태에 빠져들고, 명동성당 농성장은 고립되었다.

강기훈은 6월 24일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의 조작기도에 협조할 생각이 전혀 없으며’ 다만 ‘법정에서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 검찰에 출두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강기훈은 재야인사들과 어머니가 지켜보는 가운데 성당 입구로 걸어나가 기다리던 검사들에게 체포되어 경찰 호송버스에 실려 강남 검찰청으로 향했다.

강기훈은 검찰청 11층 특별조사실로 끌려와 집중조사를 받았다. 처음 이틀간은 24시간 잠도 재우지 않고, 진술을 계속해야 했고, 변호인 접견이나 가족 면회도 허용되지 않았다. 신상규 검사와 수사관들은 욕설과 협박과 모욕도 서슴치 않았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강기훈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흔들어댔다. 남모 검사는 아예 조사보다는 이런 목적으로 투입되었다고 할 정도였다. 때로 옆방에 있는 밧줄, 수갑, 쇠사슬 등 온갖 고문도구를 보여주며 겁을 주기도 했다.

강기훈은 처음에는 묵비권을 행사하려 했지만 수사관들의 집요한 겁박 속에 결국 김기설의 분신과 상관 없다는 주장을 하기 위해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다. 유서대필을 인정하라는 수사관의 추궁과 이에 대해 결백을 주장하는 강기훈의 주장이 끝없이 이어졌다. 검찰의 집요한 흔들기와 계속되는 심문에 피로한 나머지 잠시 혼란을 일으킨 적은 있지만 강기훈은 자신이 유서대필과 무관하다는 진술을 끝까지 유지했다.

결국 검찰은 19일에 걸친 엄중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강기훈으로부터 유서를 대필했다는 자백을 받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검찰은 언론에 계속해서 강기훈이 범인이라는 정황들을 흘려 보냈다.

이 무렵 전민련이 일본에 연락해 일본인 문서감정 전문가 오오니시 요시오에게 필적 감정을 의뢰한 결과를 발표했다. 오오니시 요시오는 김형영과 달리 유서는 강기훈이 쓴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보내왔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유서대필건만으로 공소유지가 어렵다는 판단을 한 검찰은 강기훈의 집 압수수색 과정에서 입수한 유인물을 바탕으로 새로운 건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유인물은 강기훈이 혁노맹(혁명적노동자동맹)으로부터 받아 보관하고 있던 문건인데, 혁노맹 사건은 이미 1년 전에 마무리된 사건이었다. 강기훈은 이후 열흘 가까이 이 사건에 대해 집중조사를 받았고, 이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추가 기소되었다.

 

편견으로 기울어진 재판

재판은 기소된지 한달 만인 8월 22일에 시작되었다. 주심판사는 노원욱, 배석판사는 정일성, 이영대였다.

사회적 이목을 집중시킨 이 재판에 대비하여 검찰은 신상규 등 수사검사들로 공판검사를 구성하고 이 사건을 유죄로 몰아가는데 거의 사생결단 수준으로 총력을 기울였다. 재판이 시작하면서 검찰이 혁노맹사건을 추가기소한 의도가 드러났다. 검찰은 유서대필사건에 앞서 혁노맹사건을 추궁하는데 집중했다. 즉 ‘혁명’이라는 용어의 연상 효과를 살려 유서대필사건이 혁명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과격분자의 소행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한 것이다. 강기훈은 자신이 한때 가입했던 노동자조직의 기관지 ‘혁명의 불꽃’에 가입한 사실은 인정했지만 혁노맹에 가입한 적은 없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검사들은 ‘공산주의자 10대 신조’, ‘살부회(殺父會)’ 들먹이며 강기훈이 과격한 공산주의자이며 그래서 유서대필도 서슴치 않았다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했다.

재판장 노원욱은 운동권에 대한 편견을 드러냈다. 검사의 황당한 질문에도 이를 제지하기는커녕 검사의 심문을 보충하는듯한 질문으로 강기훈을 몰아세웠다. 더구나 김기설의 전민련 수첩이 조작되었다는 검찰의 억지 주장조차 강기훈에게 전민련 수첩이 없다는 점을 들어 강기훈이 위조하지 않았는가 의심하고 거듭 추궁했다. 검찰의 음모론에 동조한 것이다.

변호인들의 주장은 재판관들에게 철저히 무시되었다. 홍성은이 검찰조사에서 한 진술을 번복했지만 이 진술도 인정하지 않았다. 기타 변호인이 신청한 십여명의 증인 진술도 모두 채택하지 않았다. 강기훈의 글씨와 유서 글씨가 다르다는 오오니시 요시오의 감정 결과도 한글을 모르는 일본 사람의 감정이라는 이유로 판사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 시작 3개월 만인 1991년 11월 10차공판에서 검찰은 징역 7년을 구형했다.

12월 4일 11차공판에서 변호인단은 변론요지서에서 검찰의 공소내용이 ‘사실’이 아니라 ‘픽션’이라고 주장했다. 유서를 써 주었다는 장소와 일시가 전혀 없는 공소가 어떻게 가능한지 묻고, 유서대필이라는 비상식적인 행위가 어떻게 가능한지 질타했다.

마지막으로 강기훈이 준비한 최후진술서를 읽어나갔다. 검찰의 공소가 희대의 조작극이며 사기극이라는 이유를 조목조목 나열했다. 그리고 자신의 결백을 호소하면서 진실의 승리에 대한 믿음과 재판부가 진실을 가려줄 거라는 기대를 표현했다.

정의와 진실은 고난의 역사 속에서 샛별처럼 초롱초롱 빛이 납니다. 반대로 가식과 허위는 그 명이 짧아 감춘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없는 것이 있었던 것처럼 둔갑되어도 사실은 머지 않아 참모습을 띠며 백일하에 밝혀지게 됩니다.

(중략)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리는 무거운 짐이 얹혀 있는 현실에서 예지와 공명정대함으로 올바른 판결을 해주시리라고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역사에 다시는 허위가 참으로 둔갑되는 기막힌 일들이 반복되고 저와 같은 피해자가 나와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의 기대는 물거품이 되었다. 12월 20일 열린 제12회공판에서 재판부는 강기훈에게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했다. 판결문은 사실상 검찰의 공소장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 같았다. 결함이 많은 김형영의 필적감정이 유죄판결의 유일한 근거가 되었고, 변호인들이 재판과정에서 추가제출한 김기설의 13건의 자필문건은 전민련이 제출했다는 이유로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다.

이듬해 1992년 2월 27일 항소심을 앞두고 전국연합 등 재야 12개 단체가 ‘유서사건 강기훈씨 무죄석방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강기훈공대위)’를 결성하여 조직적인 지원에 나섰다.

3월에 속개된 항소심도 1심과 비슷한 양상이었다. 재판장 임대화, 배석판사 윤석종, 부구욱으로 판사들의 얼굴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항소심이 벌어질 당시 김형영은 뇌물을 받고 필적감정을 해준 죄로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에 들어가 있었다. 이에 변호인들이 김형영의 필적감정에 근본적인 불신을 제기하면서 김형영의 필적감정의 진위여부를 재검토해 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김형영을 증인으로 신청하여 진술을 들은 뒤 변호인의 요청을 묵살하고, 김형영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결심공판이 끝나고 변호인들이 검찰이 고의적으로 묵살해온 유력한 물적 증거를 제시했지만 이마저도 재판부는 검찰의 요구를 받아들여 증거에서 배제해 버렸다. 또한 김수한 추기경 등 수많은 재야인사들의 탄원서가 제출되었지만 그 어떤 것도 재판부를 움직이지 못했다.

항소심이 시작된지 한 달 만인 1992년 4월 20일 재판부는 1심과 똑같이 징역 3년에 자격정지 1년 6월을 선고했다.

마지막 대법원도 마찬가지였다. 이 사건을 맡은 김상원, 박우동, 윤영철, 박만호 네명의 대법관은 불과 3개월만에 판결을 내렸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대법원은 1992년 7월 24일자로 강기훈의 상고를 기각, 징역 3년 자격정지 1년 6월을 확정했다.

 

감옥살이, 출소, 결혼

1심 판결 직후 서울구치소에서 안양교도소로 옮겼던 강기훈은 항소심 판결 후 1992년 6월 대전교도소로 이감을 갔다. 대전교도소는 중구금시설이라 주로 장기수들을 수용하는 교도소였다. 강기훈은 여기서 30-40년씩 잊혀진 존재로 감옥을 살고 있는 장기수들과 만나 ‘이렇게도 사람이 사는구나’ 하는 알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친한 후배의 자살을 방조하고 유서를 대신 써줬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을 살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면서 그 분들과 인간적인 공감을 나눈 것이다.

강기훈은 자신의 사건은 되도록 잊으려고 노력했다. 대법 확정 이후 한 달에 두세 번씩 어머니와 면회하는 것을 빼고는 주로 독서에 몰두했다. 책도 어려운 사회과학 책들은 멀리하고 문학전집류 같이 쉽게 몰두할 수 있는 책들을 주로 읽었다.

강기훈은 1994년 8월 만기출소 때까지 2년 2개월 정도를 이 대전교도소에서 살았다. 그동안에 노태우 정부에서 김영삼 정부로 바뀌었지만 감옥생활에는 변화가 없었다. 몇 차례의 사면에서도 강기훈은 제외됐다. 아들의 일로 권력에 대한 분노와 원한을 혼자 삭이던 기훈의 아버지가 간경화로 위독한 지경에 이르러 교도소에 귀휴를 신청했지만 이것도 거부되었다.

1994년 8월 17일 새벽 강기훈은 구속된지 3년 2개월만에 만기출소했다. 어머니 권태평 여사와 가족들, 그리고 김근태, 김희선, 진관스님 등 재야인사들이 교도소 앞에서 강기훈을 뜨겁게 맞아 주었다.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 노래가 새벽바람을 가르며 울려퍼졌다.

그해 10월 출소한지 두 달만에 기훈은 옥바라지하며 기다려준 이영미와 결혼식을 올렸다.

 

강기훈 유서사건 공동대책위원회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유서대필사건은 어느덧 세상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나 강기훈이 억울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대법원 판결 이후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전민련 인권위원장으로 이 사건의 여파로 감옥살이를 했던 서준식과 사무처장 대행으로 수배되었던 김선택이 앞장서서 강기훈유서사건 공동대책위원회(강기훈공대위)를 중심으로 다양한 구명활동을 펼쳤다. 우선 강기훈공대위는 유서사건의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자료집 발간에 집중했다. 이렇게 해서 1년여의 자료수집 끝에 나온 것이 1993년 7월에 발간된 무려 2,700쪽에 이르는 『유서사건 총 자료집』이었다.

또한 강기훈공대위는 강기훈 실형 선고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홍성은의 기자회견도 주선했다. 홍성은은 1993년 10월 강기훈 사건에 대한 국정감사 증인으로 참석하면서 기자회견을 자청하고, 검찰의 강압수사로 어떻게 진실이 왜곡되고 자신의 본의와 다른 진술을 하게 된 경위를 밝혔다. 검찰이 유죄의 증거로 제시했고 재판부에서 채택한 홍성은의 진술은 완전히 뒤집혔다.

강기훈공대위는 강기훈 사건의 재심을 추진했지만 사법부에 의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02년 MBC 시사다큐 프로그램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이 사건을 다루면서 이 사건이 다시 한번 세인의 관심에 떠올랐다. 이 프로 제작진은 저명한 외국인 필적전문가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미국인 감정사 르레나틴과 일본인 하야치 데로우가 필적감정을 한 후 유서가 강기훈의 필적이 아니라는 감정서를 보내왔다. 그러나 사법부에서는 여전히 강기훈 사건의 재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진화위의 재조사와 재심결정

2003년 노무현정부가 들어서고나서 상황을 반전시킬 계기가 왔다. 노무현정부는 독재정권 치하에서 행해진 인권유린 사례들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했고, 경찰, 검찰, 국정원, 기무사 등 권력기관들마다 과거사위원회를 발족하고 민간인들로 위원회를 구성했다. 유서대필사건은 2005년 5월에 발족한 경찰청과거사위원회가 맡았다. 그러나 경찰청과거사위는 수사권이나 공소권이 없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검찰에 자료제출을 요구했지만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사건이라는 이유로 검찰이 공식적으로 거부했고, 조사는 더 진척될 수 없었다.

조사가 난항이 빠지자 노무현 대통령은 기관별 과거사위를 통폐합하여 2005년 12월 대통령 직속으로 보다 권한을 강화시킨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화위)’를 발족시켰다. 진화위는 업무를 개시하자마자 경철청과거사위로부터 인수받은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을 1순위로 다루기 시작했다. 진화위는 전과 달리 독립적인 수사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료 제출을 거부했던 검찰도 하는 수 없이 이 사건에 관한 모든 자료를 넘겨줄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을 전담한 조사관 안경호와 홍수정은 정황증거인 관련자 진술 확보와 물적증거인 필적 재검정 작업에 착수했다. 모두 67명으로부터 공식적인 진술을 받아 확보한 증언들은 강기훈을 무죄로 추정하는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필적감정은 우선 서울 시내 7개 사설감정소에 재판에 사용된 필적자료와 그 뒤에 발견된 필적자료들에 대한 감정을 의뢰했다. 필적감정 결과는 일치했다. 김기설의 유서와 강기훈의 필적은 다르다는 것이었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진화위는 그 모든 자료를 국과수 문서감정실에 감정을 의뢰했다. 국과수는 2007년 5월 감정에 착수하여 두 달간의 심층 분석 끝에 7월 6일 감정결과를 회신해왔다. 결과는 사설감정소와 마찬가지로 유서는 김기설의 글씨가 맞고 강기훈의 글씨와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김형영의 필적감정이 있은지 꼬박 16년만에 번복된 것이다.

진화위는 조사 19개월만인 2007년 11월 13일 강기훈 유서대필사건 조사를 종료하면서 국가로 하여금 강기훈과 그의 가족들에게 사과하고 재심재판으로 누명을 벗겨줄 것을 권고했다.

진화위의 권고가 나온지 2개월 후인 2008년 1월 31일 강기훈은 서울중앙지법에 재심청구서를 제출했다. 최종심이 서울고등법원이었기 때문에 재심여부를 판단할 관할법원으로 서울고등법원 형사10부(재판장 이강원)로 정해졌다. 검찰은 즉각 ‘재심 불가 이유서’를 보냈다. 17년 전과 다름없는 이유들이었다. 그리고 김형영의 필적감정이 옳다고 거듭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2007년 국과수의 새로운 감정 결과가 1991년 김형영 감정의 한계와 오류를 극복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기타 여러 증거들을 종합하여 재판부는 2009년 9월 16일자로 사실상 강기훈의 무죄추정을 내용으로 한 재심결정을 내렸다. 사건발생 17년만의 일이었다. 사건 당시 29세였던 강기훈은 어느덧 46세의 중년이 되어 있었다.

 

뒷 이야기

강기훈이 서울고등법원에 재심청구를 제기했던 2008년 12월 아버지 강태열 선생이 간암으로 별세했다. 그리고 2년 후 2010년 4월 강기훈에게 ‘촛불’이 되고자 했던 어머니 권태평 여사마저 아들의 재심재판에서 누명을 벗는 것을 보지 못하고 역시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 모두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은 아들의 억울한 감옥살이와 오욕 속에 살아온 20년의 세월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2009년 사울고법에서 무죄추정의 재심개시 결정을 내렸을 때 권태평 여사는 이제 아들이 누명을 벗을 수 있다는 것을 예감했다. 그러나 자신이 이제 더 버틸 힘이 없다는 것을, 아들을 더 이상 지켜줄 수 없다는 것을 느꼈던 것 같다. 어느 날 아들에게 “여기서 더 못 가고 주저앉더라도 너무 실망 마라. 이 정도면 된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나간 게 어디냐. 그 다음은 네가 알아서 해라. 앞으로도 많이 시간이 걸리겠지만 잘 될 거다. 주님께서 알아서 잘 보살펴주실 테니까 너무 급하게 마음 먹지 말고 잘 될 거니까 기다려라.”라고 말했다. 결국 이것이 유언이 되었다. 항상 곁을 지켜주던 어머니와의 이별은 기훈에게는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었다.

2012년 대법원에서 재심개시 결정을 내렸을 때 강기훈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한테는 재심해서 무죄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그거는 나를 수사한 검사들과 법원, 나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 사람들의 충심어린 사과다. 그 당사자가 사과를 해줬으면, 그게 나한테는 더 위로가 된다.” 그는 유서사건 검찰 조사와 재판과정에서 정말 인간에 대한 절망감을 느낀 듯 했다. 과연 어떤 사람이 친구가 죽겠다는데 말리지 않고 유서를 대신 써 준단 말인가? 그런 가장 기본적인 인간성과 관련된 문제에서 검찰과 재판부가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 인터뷰는 어찌 보면 강기훈의 절망적인 외침이라고 할 수 있었다.

2015년 대법원 재심재판에서 무죄판결이 났지만 이 사건 조사와 재판에 관여했던 검사와 판사들 중에 사과를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유서사건을 유죄로 몰아가는데 간접적으로 일조했던 지식인들, 언론인들 속에서도 충심어린 자기 반성과 사과는 없었다. 이 사회의 법과 제도를 지키는 자라고 자임하는 이들이 그 법과 제도가 악용될 때 한 여린 인간의 영혼과 심성이 파괴되고 결국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왜 외면하는가? 그런 점에서 볼 때는 강기훈 유서대필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판 드레퓨스 사건이라고 불리우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결국 한국사회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지금도 선거 때만 되면 출몰하는 빨갱이라는 붉은 유령처럼 불의한 정권이 사람들의 잘못된 편견을 이용하여 한 인간을, 그리고 그 가족까지 얼마나 철저히 짓밟을 수 있는지를 똑똑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런 여론몰이에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허약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도 잘 보여주었다.

강기훈은 대법원의 재심판결 직후 2015년 말부터 가족과 떨어져 전남 장흥으로 내려가 암치료와 요양에 전념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독학으로 수준급에 오른 클래식 기타 공부도 하고, 장흥문화공작소라는 비영리법인도 설립하여 지역 문화 발전을 돕고 있다. 2018년부터는 거처를 강진으로 옮겼으나 여전히 장흥을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공동선, 2019년 9-10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필자는 공동게재에 동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