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의 외침

1976년 4월 21일 청주지방법원 충주지원에서는 100여명의 방청객이 참석한 가운데 열띤 분위기 속에서 고영근 목사에 대한 긴급조치9호 위반 재판이 열렸다. 고영근 목사는 3월 10일부터 13일까지 충북 단양군에 있는 단양장로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했는데, 이 부흥회에서 한 설교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고 목사는 부흥회 중에 단양경찰서에 연행되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 기소되었고, 이날 그 첫 재판이 열린 것이다.

하얀 한복에 수갑을 차고 푸른 줄에 묶인 고 목사가 재판정에 들어서자 고 목사가 시무했던 대전 백운교회 신도들과 서울과 충북지역에서 온 목사님들이 일제히 일어나 “목사님, 힘내세요.” “할렐루야” 격려의 인사를 보냈다. 변론을 맡은 이돈희 변호사도 변호사석에서 눈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재판장 박석규 판사가 입정하면서 재판이 시작됐다.

재판장의 간단한 인정심문이 있고, 이어서 조종희 검사가 공소장을 낭독했다. 공소 요지는 고영근 목사가 부흥회 설교에서 1) 박정희가 자기 부인 육영수의 묘지를 1000평이 넘게 조성하고 500만명 넘는 국민을 동원하여 참배케 하였는데, 이것은 법 위반이고 개인숭배다. 2) 통일교 행사에 정부요인이 축사하는 등 정권유지 목적으로 문선명에게 협조하고 있다. 3) 양주 수입이 60억이 넘는데 이것은 나라를 지켜야할 지도층이 부패하여 외화를 낭비하는 것이다. 4) 유엔에서 한국 지지표가 줄고 있는 것은 집권자의 잘못으로 한국이 세계에서 고립되고 있는 것이다 라고 하여 사실을 왜곡 전파하였다는 것이었다.

유신체제의 철저한 언론통제로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못해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못했지만 절대 권력자에 대한 한 부훙목사의 정면 비판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1975년 5월 13일에 공포된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을 신성불가침으로 올려놓고 박정희와 유신체제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민주주의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학생운동조차도 그 무시무시한 위세에 눌려 75년 5월 22일 이후로 1년 가까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다. 고 목사의 유신정권 비판은 실로 세례자 요한의 광야의 외침이라고 할만 했다.

바로 직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 인사들이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해제을 요구하는 3.1구국선언이 있었는데, 부흥회 당시 고 목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그것이 고 목사가 평소의 소신을 좀더 적극적으로 발언하는데 힘이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1차 구속 – 단양교회 부흥회 사건

1차 공판은 공소장 낭독으로 간단히 끝나고 본격적인 심리는 5월 19일과 6월 2일에 열린 2차, 3차공판에서 진행되었다. 여기에는 서울에서 조남기 목사(NCC 인권위원장), 강신명 목사(새문안교회), 이재정 신부(성공회), 조지송 목사(산업선교회 간사) 등이 내려와 참석했다.

고영근 목사는 변호인 반대심문에서 검찰의 공소사실에 대해서 조목조목 반박하고, 자신의 주장을 밝혀 나갔다. 고 목사의 또랑또랑한 진술이 법정에 울려퍼지자 방청하던 교인들이 감동하여 ‘아멘, 아멘’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단양교회의 교인들이 100명 넘게 차로 와서 상당수는 법정이 좁아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승리하십시오.”, “할렐루야, 아멘” 하고 소리내어 응원했다. 마치 교회의 부흥회를 법원으로 옮겨놓은 듯 했다.

1976년 6월 16일 언도공판에서 고영근 목사는 징역 7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고 목사는 이에 불복하여 항소했고, 항소심은 서울고등법원에서 담당했기 때문에 고 목사는 충주에서 서울구치소로 이감되었다. 수인번호는 5195번이었다.

항소심은 76년 10월 8일 서울고등법원 117호 법정에서 시작되었다. 두 차례의 심리 끝에 11월 5일 열린 언도공판에서는 이례적으로 일체의 방청객 입장 없이 피고인만 입정하여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이 선고 되었다. 고 목사는 즉시 대법원에 상고했다.

해가 바뀌어 1977년 2월 22일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상고심 재판은 고 목사는 참석하지 못하고 변호인과 가족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대법원은 공소사실 대부분이 사실 왜곡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하여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이 판결은 긴급조치 9호 재판 중에서 유죄판결을 뒤집은 이례적인 판결이었다. 유신체제 안에서도 법관의 양식이 살아있음을 보여준 귀한 사례였다. 이 판결 소식은 일본 아사히 신문에 ‘한국의 정치법 중 처음으로 무죄판결’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파기 환송심으로 열린 77년 6월 9일 서울고등법원의 재판에서 고영근 목사는 다시 징역 1년6월 자격정지 1년6월을 선고받았다. 당연히 무죄판결이 내려져 석방될 것으로 알고 기다렸던 고 목사와 가족들은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1년 3개월의 징역을 살았던 고 목사는 상고를 포기하고 만기출소를 기다리기로 했다. 판결이 있은 후 한달 쯤 지난 7월 17일 법원에서는 지병인 당뇨병을 이유로 고영근 목사를 병보석으로 석방했다.

 

2차 구속 – 강진읍교회 사건

고영근 목사의 수난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석방된지 4개월 남짓된 11월 21일부터 고영근 목사는 전남 강진군 강진읍교회(윤기석 목사 담임)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한 설교가 또 문제가 되었다. 고영근 목사는 부흥회 중 350여명의 회중이 모인 가운데 기독교장로회 전남노회 교회와사회위원회에서 주최하는 농민을 위한 기도회에서 설교를 맡게 되었다. 여기에서 고 목사는 농민을 억압하는 박정권의 농업정책을 규탄하고 박정권은 회개하라고 강력히 외쳤다.

부흥회를 마치고 27일 새벽 강진교회 교인들의 배웅을 받으며 직행버스로 광주를 향해 가던 중 고 목사는 강진 성전면소재지에서 경찰관 30여명에게 둘러싸여 장흥경찰서로 연행되어 장흥교도소에 구속 수감되었다.

78년 1월 중순 첫 재판 통지를 받은 고영근 목사는 마음이 무거웠다. 아들 성진이 대학진학을 앞두고 있고, 자신을 기다리는 여러 가지 문제가 산적해 있어서 가능하면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할 입장이었다. 어떻게 재판을 받을 것인가를 놓고 일주일 동안 고민하며 기도한 고영근 목사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부여한 예언자의 사명을 망각하고 한 몸의 안일을 위해 비겁한 길을 택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고난의 길을 택하기로 결심하고 담대하게 불의에 항거하면서 정의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고영근 목사는 매일 매일 기도하면서 전투장에 출전하는 군인처럼 역사의 심판대 앞에 출전하는 각오를 다졌다.

고영근 목사는 재판과정에서 “박정희와 김일성은 한사람은 남침위협, 또 한사람은 북침위협하면서 평화를 요망하는 국민의 여망을 악용하였고, 남북의 슬픔과 아픔을 이용하여 정권연장을 획책하였으니 회개하고 즉시 하야하여 내가 믿는 예수를 믿고 구원받기 바랍니다. 만일 박정권이 이 큰 죄를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엄중히 경고했다. 재판 때마다 강진교회를 비롯한 교인들 200여명과 광주와 서울에서 온 임택진 총회장, 은명기 목사, 강신석 목사, 이직형 인권위원회 사무국장 등이 참석하여 고 목사를 격려했다.

고영근 목사는 78년 1월 19일 1차공판을 시작으로 장흥지원에서 3차례 재판 끝에 징역 6년 자격정지 6년을 선고받았다. 1심 선고 직후 항소하자 광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광주고등법원에서 3차례의 심리재판 과정에서 고 목사는 무려 12시간에 걸쳐 진술했고, 마지막 최후진술도 1시간 20분을 원고도 없이 열렬하고 거침없이 진술했다. 고 목사의 해박하고 논리정연한 진술에 검사와 재판장도 탄복할 정도였다. 그러나 항소심 언도공판에서도 1심과 같이 징역 6년을 받았고, 대법원에 상고했으나 기각되어 78년 9월 26일 원심이 최종 확정되었다.

 

교도소에서 – 소내투쟁에 앞장서다

대법원에서 최종 형이 확정되고 나서도 고 목사는 광주교도소 미결사에 한동안 수감되어 있었다. 그러다 고 목사가 단식으로 항의하자 교도소 측에서 좌익수들과 시국사범을 수용하는 특사로 전방시켜 주었다. 고 목사는 특사로 옮겨오면서부터 시국문제로 구속된 학생들과 교류하면서 사회과학 공부도 하고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또한 이들과 함께 시국문제를 이슈로(예컨대 카터 미대통령 방한 반대), 또는 소내 처우문제를 걸고 소내투쟁도 함께 했다.

한번은 새로 부임한 교도소장이 운동시간을 반으로 줄이는 조치를 취하자 학생들이 앞장서서 이에 항의하는 단식투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재소자 인권 보장하라’, ‘악질 소장 물러가라’ 등 구호를 외치고, 방문을 차며 항의표시를 했다. 그러자 교도소측에서 구호를 선창한 학생 3명을 징벌방에 보냈다. 이를 보다 못한 고 목사는 학생들을 설득하여 뒤로 물러나게 하고 자신이 앞장서서 구호를 선창하고 투쟁을 선동했다. 교도소 측에서는 고 목사를 불러내어 역시 징벌방에 수감하려고 하였다. 고 목사는 호송하는 교도관을 따라 가다가 틈을 보고 ‘번개처럼 빠른 동작으로’ 특사로 들어가는 철문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학생들 방의 식구통에 손을 밀어넣고, 학생들이 그 안에서 손을 잡게 하여 연행을 막았다. 그런 상태에서 고 목사는 큰 소리로 보안과장 면담과 사과를 요구했다. 이렇게 한바탕 소란을 벌인 끝에 고 목사는 일단 징벌방에 가는 것을 모면하고 자기 방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사실이 밖에 알려지면서 광주시 목사들과 평신도들이 대거 몰려와 교도소 측의 인권탄압에 항의했고, 결국 교도소 측이 물러났다. 교도소장은 운동시간도 원래대로 하고 그 밖의 부식 등 처우개선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했다.

 

각서를 거부하다

79년 6월 들어서면서 광주교도소는 시국사범들에게 각서 쓰기를 요구했다. 고영근 목사에게도 총회장에게 ‘앞으로 석방되면 정치적 문제는 거론하지 않고 복음만 전파하겠다’는 편지를 쓰면 석방시켜 주겠다고 회유했다. 고 목사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자 보안과장이 불러 또 편지나 각서를 쓰라고 요구했다. 고 목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별러왔던 말을 쏟아냈다. “박정희가 나를 3년이나 고생시켰으면 박정희가 내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빌어야지 누구더러 각서를 쓰라는 것이요? 박정희 이놈 천하에 발칙한 놈 같으니라구.” 고함을 지르자 보안과장이 혼비백산하여 어쩔 줄 몰라했다. 그리고는 다시는 각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고영근 목사는 1979년 들어서면서부터 민족적 위기가 닥칠 것을 예감하였다. 그래서 나라를 위한 금식기도를 드리기로 결심했다. 고 목사는 2월부터 박정희 씨는 속히 대통령에서 하야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라고 촉구하고, 그 길만이 박정희도 살고 나라도 사는 길임을 밝히면서 금식기도에 들어갔다. 교도소 당국에서는 매일 교도관을 감방으로 보내 금식기도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지만 박정희 하야를 권고하는 고 목사의 금식기도는 6차에 걸쳐 60일간이나 계속됐다. 그리고 10월 20일부터 6번째 금식기도를 하던 중 10월 27일 아침에 박정희가 피살됐다.그 소식을 듣고 고 목사는 탄식하며 금식을 중단했다.

고 목사는 79년 12월 8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면서 석방되었다. 구속된지 2년 1개월 만이었고, 중간에 4개월 간 석방된 것을 빼면 처음 1차 구속되었던 1976년 3월부터 꼬박 3년 4개월을 감옥에서 지낸 셈이었다.

 

출생과 어린 시절

고영근 목사는 1933년 1월 18일 평안북도 의주읍에서 동쪽으로 50리 쯤 떨어진 고관면 중단리에서 아버지 고원익(高元益) 선생과 어머니 김성만(金成萬) 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 지역은 비교적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여 1900년도에 교회가 세워졌고, 항일정신이 강했던 지역이었다.

고영근은 일곱 살 때 서당에 가서 한문을 공부했고, 아홉 살 때 2년제 간이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일반 초등학교로 편입하여 몇 군데를 옮겨 다니다가 중단국민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열두살 되던 해인 1944년 아버지를 장질부사로 여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지자 고영근은 진학을 포기하고 어머니를 도와 농사를 지었다. 어린 나이에 고영근은 소를 몰고 논갈이 밭갈이에 나섰고, 열일곱살에는 소 두 마리를 몰아 밭을 가는 상일꾼이 되었다. 가을이면 벼베기, 겨울에는 솔가리 긁어오기 등 쉴 새 없이 부지런히 일해 어머니를 봉양하고 아래로 두 동생을 거느리는 든든한 집안의 가장 노릇을 했다.

1945년 8.15 해방이 되자 고영근의 고향에도 중단교회 박창록 전도사라는 분이 9월부터 야학을 시작하였다. 고영근은 기쁜 마음으로 야학에 나가 국어, 국사, 성경, 산수를 배웠다. 영근은 이 야학을 통해 나라와 민족과 기독교를 알게 되었고, 결국 친구들의 강권으로 기독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1948년 한 부흥회에 참석하여 큰 감동을 받고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감옥살이를 한 이기선 목사, 심을철 목사 등의 지도를 받아 순교를 각오하는 투철한 신앙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1946년 토지개혁으로 지주들의 토지는 모두 몰수되었다. 그리고 1947년부터 3년간 심한 한해로 북한의 식량 사정이 매우 악화되었다. 게다가 집권한 공산당은 기독교인들의 신앙활동을 억압했다. 이런 과정에서 지주출신들과 기독교인들을 비롯한 많은 북한사람들이 남으로 월남했다. 고영근도 차츰 월남을 생각하게 되었다.

 

월남, 포로수용소, 석방, 군 입대

1950년 6.25가 발발하자 북한 전역에 18세부터 45세까지 인민군대로 동원령이 내려졌다. 영근은 처음에는 다른 청년들과 함께 산으로 도망하여 숨어 있었다. 그러다 어머니가 내무서로 잡혀갔다는 소식을 듣고 열흘만에 내무서로 자진 출두했다. 그래도 군 입대를 거부하여 한 동안 감옥에 갇혀있었다. 감옥에서 나오자 고영근은 월남할 것을 결심했다. 전쟁 중이라 일단 군에 입대했다가 도망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1951년 6월 인민군에 자진 입대했다.

고영근은 영변에서 한 달간 군사훈련을 받고 전방에 배치되었다. 영근의 부대는 남으로 행군하여 양구까지 내려와 전투에 투입되었다. 영근은 몇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기회를 노리다가 10월 어느 날 부대를 탈출, 극적으로 남쪽 국군 초소로 월남하였다.

귀순한 고영근은 그러나 미군에게 포로로 인계되어 부산포로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리고 2개월 후 거제도 수용소의 기독교 신자중대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고영근은 해박한 성경 지식과 말솜씨를 인정받아 300여명의 수용소 포로들을 상대로 첫 설교를 해 큰 호응을 받았다.

1952년 6월 논산 수용소로 옮겨서도 목회활동을 계속하던 중이던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 조치가 발표되었다. 그러나 고영근은 바로 석방되지 못하고, 7월 휴전협정 조인 후 북한 송환을 거부하는 인민군 반공포로들과 함께 경기도 장단군 우남촌에 3개월간 수용되었다. 여기서 포로들은 남·북·중립국 중 행선지를 선택하게 되어 있었다. 고영근은 여기서 남쪽을 선택하고 1954년 1월 어렵게 석방되었다. 이때 포로 800여명 중 약 200명이 북한, 70여명이 중립국, 나머지가 남한을 선택했다고 한다.

석방은 되었으나 조건 없는 무조건 석방이 아니었다. 남쪽을 택한 포로들은 서울에서 환영식을 하고 포항과 군산으로 이동했는데, 거기에서 국군에 입대할 것을 강요받았다. 고영근도 여기에서 군대에 자진 입대했다. 그리고 제주도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논산 제2육군훈련소 경비대대 군종하사관으로 배속 받아 근무했다. 그 후 광주교육총본부로 옮겼다가 1956년 10월 대전에서 제대했다. 인민군에 입대한지 5년 4개월 만에 고영근은 군복을 벗었다.

 

남한에 정착, 결혼

군대에서 제대는 했지만 남한에는 친척도 취직자리도 없었고, 당장 몸을 의지할 데가 없었다. 고영근은 군대 있을 때 한두번 출석한 적이 있는 괴정리교회를 찾아가 신세를 졌다. 그러다 이 교회 집사 한 분이 충북 옥천에 있는 과수원을 소개해줘 일꾼으로 일하게 되었다. 고영근은 일꾼으로 일하면서도 그 지역 교회에 열심히 나갔는데, 그 교회 부흥회에 자청해서 설교를 맡아 큰 성황을 이뤘다. 포로수용소에서의 설교로 닦은 실력이 빛을 본 것이다.

이 부흥회에 참석한 과수원 주인 할머니가 감동을 받고 고영근을 대전에서 성우보육원 원장을 하는 자기 아들에게 소개했다. 그래서 고영근은 보육원 직원으로 채용되어 고아들을 돌보는 일을 하게 되었다. 고영근은 보육원에 근무하면서 한푼도 부정하지 않고 착실하게 일해 원장의 신임을 얻었다. 원장은 고영근을 야간신학교에 나갈 수 있게 해 주었다. 고영근은 검정고시를 거쳐 야간 신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신학공부를 하고 목회자의 길을 밟게 되었다. 고영근은 복음전도자가 되는 어려서부터의 꿈이 이루어지게 되어 너무나 기뻤다. 그는 훌륭한 목사가 되기 위해 낮에는 보육원 일을 하고, 밤에는 신학교에 나가 열심히 공부했다.

이런 과정에서 고영근은 평생의 반려자를 만난다.

1957년, 당시 고영근은 보육원에서 근무하면서 지역 교회들의 요청으로 설교를 다니기도 했는데, 한번은 성환에 있는 교회에서 요청이 와 설교를 한 적이 있었다. 이 때 교회에 와서 고영근의 설교를 들은 한완수라는 처녀가 그 설교에 쏙 빠졌다. 한완수는 고영근에게 자기 마음을 고백했다. 고영근은 자기 처지가 처지인지라 선뜻 그 마음을 받지 못하고, 한완수에게 ‘예수 믿는 사람에게 시집 오려면 굶어죽을 각오를 해야 하는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한완수는 선뜻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한완수는 성환의 부유한 지주 집안의 딸이었다. 한완수는 일찌기 아버지의 신임을 얻어 집안의 재정관리를 주관했다. 아버지는 딸을 인근 공장 공장장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하였으나 한완수는 아버지께 자기 마음을 밝히고 고영근에게 시집가겠다고 고집했다. 딸이 이북출신 일용노동자에게 시집가겠다고 하니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아버지는 일단 고영근을 만나 보기로 했다. 고영근을 만난 한완수 아버지는 고영근의 활달하고 당찬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결국 딸과의 결혼을 허락하고 고영근을 사위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이들에게 자기 과수원을 떼어주어 생활하게 했다. 이 두 사람은 다음 해 1958년 11월 결혼하여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목사가 되어 목회에 전념하다

고영근은 1958년 4월 전북 임실군 갈담리 강진교회에서 전도사로서 첫 목회를 시작했다. 그는 이 교회에서 2년간 새벽 4시 30분부터 밤 9시 30분까지 목회 일에 전념했다. 그의 노력으로 처음에는 미약했던 교회가 점차 부흥하여 교인 수가 250여명을 헤아리게 되었다. 교회가 부흥하자 탐을 낸 교회 당회장이 고영근에게 교회를 그만두고 신학교로 가도록 종용했다. 1960년 결국 타의로 강진교회를 그만둔 고영근은 서울로 올라와 신학교에 다녔으나 그나마도 2개월 후 장로교 분열로 신학교가 해산하는 바람에 그만두게 되었다. 고영근은 성환 처갓집으로 내려와 장인이 준 과수원을 일구면서 지냈다.

그러던 중 1960년 4월 대전 백운성결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와 달라는 요청이 왔다. 교파가 다른 성결교회였지만 고영근은 상관하지 않고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여기서 9년간 성결교회 목사로 시무하다가 1969년 장로교회로 복귀한다.

대전백운성결교회에서 시무하는 동안 고영근은 1961년 5월 서울신학대학 전수과 2학년에 편입하여 2년 후 졸업장을 받았다. 그리고 1966년 5월 기독교성결교회 총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목사가 된 고영근은 교인들을 상대로 한 일반목회와 더불어 유치장, 교도소 목회에도 힘썼다. 포로수용소와 군대에서 목회한 경험이 그를 이러한 특수사회 사람들에 대한 목회에 애착을 가지게 했던 것 같다. 1964년 대전경찰서 유치장 전도를 시작하여, 1965년부터는 경찰서 직원들까지 범위를 확대했고, 1966년 목사 안수를 받고 나서는 서대전경찰서 경목에 위촉되었다. 1967년부터는 대전교도소 전도도 시작했다. 그 밖에도 고영근은 인근 군부대 사병들, 도립병원 무위탁 환자들, 그리고 대전 시내 아동보호소, 보육원, 고아원들에 대한 전도에도 힘썼다.

1969년 4월 고영근은 북아현교회 담임목사로 자리를 옮겨 장로교로 복귀했다. 여기에서도 성전 건축과 지역사회 선교와 봉사에 힘썼다. 북아현교회에서 근무하는 23개월 동안 교회는 큰 성장을 이루었고, 지역사회에서 교회의 위신도 크게 높아졌다.

 

스타 부흥목사 고영근

고영근은 교회 담임목사로 있으면서도 지역교회의 부흥회에서 설교 요청이 있으면 원근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 부흥회를 인도하곤 했다. 60년대를 거치면서 고영근의 열정적인 설교가 전국 교회에 이름이 나기 시작하여 70년대 초쯤에는 전국 교회에서 너무나 많은 부흥회 요청이 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고 목사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교회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부흥회와 문서운동을 중심으로 목회를 해 나가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그는 1971년 3월 북아현교회를 사임하고 총회 전도부 전도목사가 되었다.

고영근 목사는 1971년부터 매년 전국단위의 교역자 수련회와 강좌회를 시작했고, 교회직원 수련회도 열었다. 1972년부터 1975년까지 매년 전국단위 부흥회 40여회, 교역자수련회 20여회를 했고, 그 밖의 크고 작은 집회들을 인도했다. 그는 전국적으로도 열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 부흥사로 이름을 날렸고, 그가 인도하는 부흥회마다 참석하는 신도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는 문서설교에도 힘써 한국교회 혁신과 사회정화, 민족복음화를 위한 책들을 수만권 발간하여 전국 교회들에 보급했다.

그는 자신과 같이 전도를 전담하는 부흥사들로 조직된 부흥사협회의 총무도 맡았다. 그리고 1975년에는 총회 전도부 목사를 사임하고 한국기독교선교회 총무로 부임했다. 그리고 그는 ‘민중을 찾아가고’ ‘민중을 사랑하고’ ‘민중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파하는’ 목민선교를 실천하기 위해 힘썼다. 그는 민중들이 고난 받는 현장에 찾아가 만나는 일에 힘썼고, 그들과 친구가 되어 동고동락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그의 목회철학은 후에 그가 설립한 목민선교회의 이념이 되었다.

그는 수많은 부흥회와 집회들을 인도하면서 항상 민중들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 계신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민중들의 삶을 억압하고 핍박하는 것에 대해서는 함께 분노하고 서슴없이 비판의 화살을 날렸다. 그런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의 탄압은 어쩌면 불가피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80년대 – 연행과 투옥을 거듭하다

고영근 목사는 1979년 12월 오랜 감옥생활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석방된 다음 해, 1980년 목민선교회를 창립하고 전국을 무대로 활발한 선교활동을 벌여나갔다. 그의 선교활동은 곧 독재군사정권에게는 아픈 가시 같은 것이어서 고영근 목사의 활동 뒤에는 연행, 구류가 뒤 따랐다.

1982년 5월 18일 광주 YMCA에서 열린 광주항쟁 2주기 추모예배에서 고영근 목사는 ‘순국열사의 핏소리’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여기에서 고 목사는 구속을 각오하고 ‘미국정부는 회개하고 전두환 정권에게 협조하지 말라’, ‘전두환 정권은 회개하고 물러가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우뢰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오고 강당 안은 감격과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당시 전두환 정부의 철권통치로 광주항쟁에 대해 입도 뻥끗하지 못하던 시절에 고 목사의 설교는 촌철살인의 비수와 같았다. 설교 후 고 목사는 안기부로 연행되어 수사국 지하실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며 조사를 받았다. 고 목사는 신음소리 한번 안 내고 그 고문을 다 견뎌내고 7일만에 풀려났다. 고 목사는 구속을 각오했던 터라 일주일만의 석방은 뜻밖이었고, 고 목사는 그것을 ‘일주일 만에 고래 뱃속에서 나왔고’ ‘그들이 괴로워서 나를 토해 놓은 것’이라고 말했다.(『죽음의 고비를 넘어서 2』, 1989, 목민출판사) 그러나 고 목사는 컴컴한 지하실에서의 혹독한 고문으로 몸이 많이 상했고, 후에 심한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고영근 목사는 1982년부터는 설교로 만족하지 않고 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여 시대의 예언자적 소명에 부응하려 했다. 그는 여기서도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1984년 11월에 발간한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 3권에서 ‘전두환정권은 회개하고 물러가라’고한 글이 문제가 되어 고 목사는 안기부 수사국에 붙들려 가 13시간 조사받고 나왔다.

1983년에는 광주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구속된 문부식 구명기도회에서 설교하다가 안기부에 연행되어 41일간이나 붙잡혀있다가 나온 적도 있었다. 1976년 1차 구속 이후로 고영근 목사는 14년 동안 25회에 걸쳐 연행과 투옥을 거듭하였다. 40대와 50대를 고난의 시대로 보낸 것이다. 그는 이 고난의 시대를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 가는’ 연단의 시기로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고 목사는 교단의 인권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84년 2월부터 NCC 인권후원회장을 3년간 역임했고, 1985년부터는 자신이 속한 예수교장로회 인권위원회 부위원장으로 2년간 봉사했다.

 

세상을 향한 외침을 계속하다

1987년 6월항쟁과 전두환 군사정권이 국민의 힘에 굴복한 6.29선언은 고영근 목사에게도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하는 큰 사건이었다. 6월항쟁 전후해서 고 목사는 미국과 정치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성명서, 공개권고문들을 여러차례 발표했다. 그리고 6월항쟁 이후 열린 87년 대통령선거 국면에서는 고영근 목사는 김대중씨를 지지하는 길을 선택했다. 양김씨 중에서 김대중씨가 군사독재를 종식하고 진정한 민주화와 통일로 이끌어갈 지도자라고 확신한 것이다. 고 목사는 김대중 씨 지지를 공개적으로 천명했고, 선거유세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양김씨의 단일화가 무산되고 12월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야권에서는 이대로 가다가는 노태우가 당선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돌았다. 고영근 목사가 보기에도 보수진영의 단결이 눈에 띄게 보였고 분열된 야권의 패배가 감지되었다. 선거국면이 막바지로 치닫던 11월 말 어느날 고영근 목사는 평소 호형호제 할 정도로 친하게 지내는 문익환 목사를 찾아갔다. 고영근 목사는 다짜고짜 문 목사에게 “형님, 김대중 씨를 사퇴시킵시다. 이대로 가다가는 노태우가 당선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문 목사는 묵묵부답이었다. 마찬가지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던 문목사였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결국 고 목사도 자신의 생각을 접고 모든 걸 하늘에 맡기고 김대중 씨의 당선을 위해 더욱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87년 12월 대통령선거가 노태우의 승리로 끝나자 고영근 목사는 깊은 절망에 빠졌다. 거의 한 달간을 두문불출하며 지냈다. 그러다 다음 해 초부터 다시 기운을 차리고, 국민과 교계에 보내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4월 총선을 독려하는 등 활동에 나섰다. <동포여! 일어나자. 그리고 기어이 민주화를 쟁취하자.>(1988.3.28.) <총선에서 승리함으로 군사독재를 무너뜨리고 조국통일의 기초를 이룩하자.>(1988.4.9.) 등이 그것이다.

그 이후에도 고영근 목사는 전국을 도는 선교활동과 더불어 정권의 불의에 대한 비판, 미국과 여야 정치인, 언론인의 바른 자세를 촉구하는 성명이나 권고문을 계속 발표했다. 1990년 8월에는 공정언론 촉구 성직자회를 창립하고 스스로 회장이 되어 바른 언론 창달을 위해 노력했다.

1988년 이후부터 통일운동에도 나섰다. 그러나 해방 직후 북한에서 겪었던 체험 때문에 북한 정권에 대한 비판이 항상 앞섰다. 그래서 김대중 정권의 햇볕정책에 대해서도 북한정권에 유화적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비전향 장기수를 돕는 일에는 항상 앞장섰고, 그래서 1990년부터 2003년까지 비전향 장기수에게 성금보내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1998년 10월에는 평생 민중들의 인권신장에 앞장서온 공로를 인정 받아 한국 인권문제연구소(소장 이영작)에서 주는 제1회 인권상을 수상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다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고영근 목사의 건강이 서서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원래 지병으로 당뇨병이 있었지만 40-50대 수난의 시기에 감옥을 여러번 살면서 제대로 돌보지 않아 고질병으로 서서히 악화되어 갔다. 2002년 무렵부터는 당뇨병이 심해져 눈이 안보이기 시작했고, 2003년부터는 파킨슨병으로까지 발전했다. 2004-5년경 뇌졸중이 와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시작했다. 아울러 신장 기능이 급격히 떨어져 신부전으로 투석을 시작했다.

2007년 또 한번의 뇌졸중이 찾아와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눈이 안보이고 혀가 굳어져 의사표현이 어려워졌다. 집에서 치료가 어려워 요양원으로 옮겼다. 3년 정도 요양원에 가 있는 동안 둘째 딸 고성휘가 자주 찾아가 아버지를 돌봤다.

2009년에 접어들면서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다리가 썪어들어가는 증상으로 종아리까지 절단해야 하는 상황까지 왔다. 고 목사는 다리 절단을 거부하고 최후를 맞을 준비를 했다. 병세는 더욱 급격히 악화되어 2009년 9월 6일 고영근 목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공동선, 2019년 7-8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필자는 공동게재에 동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