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이분법, 육식 대 채식

 

육식이 도덕적으로 문제라는 입장도 있다. 육식이 윤리적이냐 아니냐를 논하는 것이 목적도 아니지만, 저마다의 생각에 따라 입장을 펼칠 수 있다. 여기서는 잘잘못보다 선택과 행동, 그리고 그에 따르는 결과와 책임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그것은 역사적, 사회적 관점에서 육식에 대해 접근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육식이 어떻게 변해왔고,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그리고 실태와 그 작동기제에 대한 사실 확인과 충분한 논의가 이뤄진다면 판단과 선택은 알아서 하지 않을까? 누구도 당위와 도덕으로 어떤 것을 타자에게 강요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고기를 먹는 다는 것은 수렵채취에서 시작한 인류역사로 볼 때 자연스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이후 농경정착 생활에서도 짐승을 가축으로 키웠고, 그것을 잡아먹기도 했다. 물론 지금과는 모든 것이 다르다. 가축은 식량자원이기 보다는 농업에 필요한 축력을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 가축을 잡아먹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었고, 농사를 짓지 않는 유목민에게도 식량으로써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이 때 가축들은 충분히 거의 수명만큼 성장하였고, 자유롭게 자랐다. 그리고 도축과정도 그 사회마다 나름의 의식을 치렀다. 이 때 육식은 이윤추구나 욕구충족을 위한 것이 아닌,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것이었다.

지금과 같은 육식문화와 축산업이 일반화 된 것이 얼마나 되었을까? 100여 년을 조금 넘지 않을까? 오늘날 우리는 고기에 대해 쉽게 생각한다. 그냥 큰 할인매장에 가서 사면되는 것 아니냐고, 우리 눈에 보이는 육식은 모든 과정 중에서 빙산의 일각에 해당한다. 우리 손에 들어오기까지 우리가 보지 못하는 많은 단계를 거치며, 그 막후에서 세계고기시장을 좌우하는 것은 초국적 자본인 정육업체다. 이들로 인해 정작 가축을 키우는 농민이나 축산업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그들의 규정에 따라 가축을 키워내는 일뿐이다. 사료나 키우는 방식도 정육업체들로부터 세세하게 지시를 받는다. 그러다 보니 문제는 이 가축을 키우는 과정이 과거처럼 ‘인간과 가축, 주어진 자연 환경 속에서의 삶 관점’이 아니라 ‘이윤’에 의해 결정된다.

사육조건은 이제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이윤 때문에 가혹한 공장식 축사가 일반화 되었고, 그 열악한 환경에서 사육하니 운동도 부족하고 면역력도 떨어져 건강하게 가축을 키울 수 없다. 이 같은 독점적 상황에서는 가축들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다수의 소규모 축산농가와 목장도 문제이고, 대규모 축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인권도 문제이다. 거대자본의 시장에 대한 독점적 지위로 인해 다수의 축산 농가는 거의 빈사상태에 빠져 있고, 몇몇 거대 축산업자도 정육업체에 대한 종속적 지위로 인해 제대로 된 가축을 생산할 수 없다. 도축과정도 이루 말할 수 없다. 영화 ‘옥자’나 책 『패스푸드의 제국』, 『육식의 종말』등에 묘사되어 있는 것만 봐도 이들이 막강한 자본으로 법과 공권력, 그리고 인권을 어떻게 유린하고 이익을 위해 소비자의 건강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기껏해야 자료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도 아주 제한적이다. 거의 매일같이 고기를 먹는데도 우리는 그 고기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먹음직스런 광고사진과 잘 포장된 최종 상품으로 고기이다.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먹는 것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가격 말고. 누가 어디서 어떻게 길렀는지. 결국 먹는 것이 나를 구성하고, 내가 하는 행위가 내가 사는 세계와 사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신동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