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시리즈> 제주의 용천수 이야기 : 제주시 동부지역 용천수

(신흥리에서 김녕리까지의 산물)

 

큰물 : 신흥리를 만든 산물

◆ 위치 : 제주시 조천읍 신흥리 113-9

큰물은 조천읍 신흥리 마을 어귀에 자리하여 암반 틈에서 용출하여 쉐물깍 옛 포구가 있는 바다로 흐르는 용천수이다. 이 산물은 여자전용으로 여잦(여자를 뜻하는 제주어)물이라고 하여 신흥리의 설촌 배경이 되고 마을의 중요한 식수원으로서 귀한 생명수였다.

암반에서 용출한 물은 사각 형태의 식수통에 모아져 식수로 사용하였다. 여기에서 넘친 물은 배추나 나물 따위의 음식물을 씻는 용도로 이용되었다. 2007년에 비가림 시설을 하였지만 오히려 햇빛이 차단되어 바닥에 이끼가 잘 끼며 매우 미끄러져 다칠 수가 있다. 이 산물 입구에 있는 산물은 족근물(작은물의 제주어)로 아이들이 물 놀이터였다. 흘러나간 용천수는 용천수 비가림 시설 뒤로 습지가 형성되어 잠시 머물다가 바다로 빠져나간다.

 

앞갯물 : 함덕포구의 산물

◆ 위치 :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3130-4

앞갯물은 모살(모래의 제주어) 함덕해수욕장 포구인 앞개에 있는 산물이다. 앞개는 마을 앞에 바닷물이 드나드는 곳인 포구를 뜻하며, 사시포(사시미)라 했던 황개코지 자락에 있는 지금의 함덕포구로 마을 서쪽에 있어 섯모살동네라 부른다. 코지는 곶의 제주어로 ‘바다 쪽으로 부리 모양으로 뾰족하게 뻗은 육지’를 말한다. 이 물은 마을과 포구에서 사용한 물로 지금은 마을 쉼터로 현대적으로 개조되어 있으나 용천수의 원형을 고려하지 않은 콘크리트식 정비로 되어 있어 아쉬움을 남긴다.

 

고도물 : 함덕리 도릿개의 산물

◆ 위치 : 고도물(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1002-109)

                서레물(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1334-3)

(고도물(남탕))

구전에 의하면 근검절약으로 부를 이룩한 함씨 할머니가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돌 한 덩어리씩 옮기게 하여 죽 한 그릇을 대접하고 마을의 오랜 숙원이던 다리가 만들어졌다고 하여 함씨할머니의 덕이 있는 마을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 돌다리가 있었다고 하여 함덕 바닷가를 도릿(돌다리의 의미)개, 함도리라 부른다.

이 함덕리에 마을에 중심이 되는 산물들이 바닷가와 서우봉 기슭, 그리고 마을 안에서 용출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많은 산물이 매립되거나 그 형체를 잃어버렸다. 그나마 몇 개가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고도물은 동산 아래 땅이 꺼진 곳에서 솟는 물로 예전에 함씨 할머니의 주막이 있었다고 전해온다.

(서레물)

서레물은 사래물이라고 불리는데 ‘사래물’의 ‘사’는 ‘절 사(寺)’로, ‘절이 오면서(來) 보호된 물’이란 뜻이라고 추정되는 산물이다. 현재도 이 일대에는 사찰이 두 군데나 있다.

예전 이 산물은 자연암반 틈에서 용출돼 동쪽으로 흘렀는데 이후 시멘트로 칸을 만들어, 네 칸으로 구분하여 사용했다. 처음 솟는 물은 제사용수와 식수로만 사용했다. 그리고 음식물, 몸을 씻거나 빨래를 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그리고 마지막 물은 마소들에게 먹이거나 농업용수로 이용했다. 이런 물 사용방법은 제주도 용천수의 전형적인 사용방식이다.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중수도’개념의 물절약을 이미 우리 제주선조들은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수도보급으로 마을 사람들로 부터 멀어지면서 산물은 축소되고 방치되다가 2012년에 정비되면서 옛 모습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제주의 많은 용천수들이 이처럼 서레물 방식으로 정비되어 원형을 잃어버렸다.

 

사원이물 : 선조들의 지혜가 담긴 북촌리의 산물

◆ 위치 :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1281-6

(사원이물)

예전부터 북촌리는 양질의 산물이 여러 곳에서 용출되어 동쪽 지역에서 북촌의 물은 식수로서 최적이라 했었다. 정지물, 사원이물, 도와치물, 우왕물 등 약 20여개가 넘는 산물이 마을을 지키고 지탱해 주었다. 북촌리를 대표하는 산물로는 ‘뱃구들’ 포구 입구에 있는 사원이물이다. 이 산물은 중동 마을 입구에 있는 여성 전용의 물이다. 사원이물에는 두 개의 원형 시멘트 식수통이 놓여 있으며, 이렇게 설치한 이유는 밀물이 되어도 식수통에 바닷물인 짠물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식수통이 넘치면 그 물로 음식물을 씻거나 빨래를 한 후 허드렛물(잡용수)로 사용하는 지혜를 발휘하기 위해서이다.

(도와치물)

사원이물 옆에는 도와치물이 있다. 도와치는 마을에 중대사가 있을 때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로 사용하는 집(일종의 공회당 혹은 마을회관)인 도갓집으로, 이 근처에서 나는 산물이란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도와치물에서 서쪽 해안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정지물이 나온다. 정지물의 ‘정지’는 부엌을 의미하는 제주어로 이 동네를 정지물동네라 한다. 여자들이 전용으로 사용한 물이다.

 

청굴물 : 하늘빛과 바다빛이 하나인 산물

◆ 위치 :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1296 일대,조간대

김녕해수욕장 서쪽 200m 정도 떨어진 지점인 바닷가에 청굴물(청수물)이 있다. 물이 맑아 푸른빛을 낸다고 하여 청굴물(청수물)이라 부르고 있다. 이 산물은 예전에 주민들이 해질녘에 와서 목욕을 했었고, 소에게 물을 먹였던 곳이었다. 이 산물은 매우 차가워 하절기가 되면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며칠씩 숙박하면서 목욕했던 물이다. 예전 청굴물은 남탕에서 산물이 솟아나와 여탕으로 흘러들게 하여 사용했었으나 마을가꾸기 사업으로 정비된 지금은 양쪽에서 다 물이 나온다. 지금도 김녕해수욕장을 찾는 사람들이 이 산물에서 몸을 씻기도 한다. 또한 맑은 산물이 솟는 모래에 많은 조개들이 서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다. 입구에 치수공덕비(1971년)가 세워져 있다.

 

개웃샘물 : 동굴안에서 솟는 김녕의 산물

◆ 위치 :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1513-2

김녕리는 하천이 없는 마을이다. 대신에 땅속의 많은 동굴들이 하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개웃샘물도 마찬가지이다. 마을 한가운데 땅 아래 동굴 속에서 용천수가 솟아나고 있다. 동굴은 입구가 수직형태이며 폭 5m, 길이 300m 정도이다. 이 샘물의 물줄기는 바닷물과 이어졌다. 밀물 때는 바닷물과 섞여 염분이 좀 남아 있지만 썰물 때는 담수가 맑고 차갑다. 개웃샘물은 물 모양이 전복 내장의 ‘게웃’ 모양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사람들은 개웃샘물을 가리켜 “죽어가는 사람도 이 물을 마시면 살아난다”는 생명수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죽어가는 사람도 ‘개웃샘물 튼내면(생각해내면의 제주어) 산다’는 속설이 전해오고 있다. 이 샘물은 땅 아래서 물소리가 들려 땅을 파 내려가다 보니 동굴과 맑은 샘을 찾았다고 알려졌다. 예전에는 마을 행사 때 이 물을 사용하였으며 가정에서 제사 시에도 이 물을 사용하였다.

 

흐른물과 고냥물 : 김녕 흘림물고개의 산물

◆ 위치 :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3944 일대(흐른물)

(흐른물)

백년사 동쪽 흘림물고개 밑 동네에 막 들어서면 흐른물(흐르물)이 있다. 이 산물은 팽나무 밑 궤(동굴)아래서 산물이 흐르는 듯 나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식수로 사용했으나 따로 식수통은 두지는 않았다. 지금은 물통 안에는 수초만 무성히 자라고 있으며 물통이나 화분 등이 있는 것으로 봐서 허드레 물품을 보관하는 개인적 장소가 되어 버렸다. 흐른물에서 서쪽으로 50m 거리에 고냥물이 있다. 이 산물은 치수기념비 밑 암반경계부 돌구멍에서 용출되는 물이라서 고냥물(고냥은 구멍의 제주어)이라 하는데, 바다의 영향으로 물맛이 짠듯하여 식수로는 사용하지 않고 주로 남자들이 목욕하는 물로 사용했다. 물 건너편에 수감물이 보인다. 치수비 밑에 고냥물이 용출되는 구멍이 선명하다.

(고냥물)

 

수감물 : 팽나무가 지키고 있는 산물

◆ 위치 :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 3978 일대

수감물은 백련사 동측 소롯길을 따라 가면 고목인 팽나무가 수문장처럼 지키는 동굴 같은 바위틈에서 솟아나오는 산물로 여자전용 산물이다. 이 산물은 조석간만의 차에 의해 바다의 영향을 다소 받는 산물로 만조 시에는 물이 짜서 마시기 어려우나 간조 때는 마실 수 있는 물이다. 그나마 해수의 영향을 덜 받는 물로 물맛이 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산물은 바위동굴이란 궤에서 솟아나오는 물로서 식수통과 일자형 빨래터를 만들고 보호시설인 돌담 뒤에 목욕하거나 허드레 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다시 담을 싼 이중 담 형태로 만들어 졌다. 이 산물은 1960년에 돌담을 높이 올려 정비하였다는 기록이 치수비에 있으며 산물은 바다 쪽 물팡이 있는 데서 길었다. 지금은 수풀로 뒤덮어 있고 안내시설도 없어 산물이 있는지 조차 알아보기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