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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었는데.. 보상 푸대접.. 목소리 컸어야 했나 후회된다”

[잊혀진 ‘세월호 義人’.. 癌 투병 중인 김홍경씨] “가라앉은 車·장비 보상금, 내겐 생계 달린 일이었지만 유가족 먼저라고 생각했죠 하지만 끝에 몰리고 보니.. 내가 구한 애들 잘 지내는지 죽기 전에 얼굴이나 봤으면”

3일 경기 고양시 국립암센터에서 만난 김홍경씨는 1년 2개월 전 전남 진도 팽목항에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선원들도 버리고 떠난 세월호에서 단원고 학생들을 로프로 끌어올려 구해낸 김씨는 지금 팔조차 들어 올릴 기력이 없다고 했다. 작년 12월 위암 4기 판정을 받고 화학치료를 받느라 머리카락은 다 빠졌고, 호남형이란 소릴 듣던 얼굴은 뼈와 가죽이 붙어버렸다.

김씨는 기자를 보자 “세월호 사고 때 뭘 바라고 아이들을 구한 건 아니었다”고 했다. 그는 “나는 의인감은 아니다”고 했지만, 생의 끝자락에 선 순간에도 한때 세상이 의인이라 불렀던 자신이 구차해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김씨는 지금 후회스럽다고 했다. 일거리를 찾아 스타렉스 차량에 배관 설비 장비를 싣고 제주도로 가기 위해 세월호에 올랐다가 사고를 만났을 때조차 해보지 않았던 후회다.

그는 전남 진도 맹골수도에서 배가 갑자기 균형을 잃고 왼쪽으로 걷잡을 수 없이 기울었을 때 다행히 탈출에 유리한 오른쪽 꼭대기 층(5층)에 있었다. 하지만 왼쪽 아래층에 있는 바람에 오도 가도 못하게 된 단원고 학생 수십 명을 끌어올리기 위해 배 안에 끝까지 남았다. 아이들을 구했다는 안도감에 그걸로 만족했다. 김씨는 사고 직후 세월호를 버리고 먼저 달아난 선원들과 대비돼 언론에서 의인으로 찬사를 받았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승합차와 설비 장비를 바닷속에 잃어버렸지만, 김씨는 “단원고 학생들이 먼저이고 그 가족들이 먼저라고 생각해 정부를 믿고 기다렸다”고 했다. 작년 말 위암 4기 판정을 받아 투병생활까지 하게 돼 쪼들렸지만 “그래도 정부를 믿었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김씨는 세월호 참사 후 정신적으로 힘들었다고 했다. 더 구하지 못한 아이들이 머릿속에 떠올라서라는 것이다. “아직 아래에 남아 있는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며 구해달라고 하는데 시간이 없어 더 끌어올리지 못하던 그 순간이 영상처럼 떠올랐어요.” 자연적으로 치유되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아 병원에도 다녔다고 했다.

김씨는 “정부는 처음에 ‘피해 본 건 무엇이든 다 보상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말뿐이었다”고 했다. 중고차 값에 블랙박스, 내비게이션 값만 더해 배상금으로 530만원만 주겠다고 하더라는 것이다. 김씨는 “‘차 안에 갖가지 공구며 근로자들에게 줄 임금까지 있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따졌지만, 해양수산부는 ‘그걸 보상받으려면 구입 영수증과 함께 차 안에 그 물건이 있었다는 사진이나 동영상을 제출하라’고 하더라”고 했다. 김씨는 “어떻게든 영수증을 찾아 제출해봤지만 ‘증거 불충분’이란 말과 함께 모두 인정받지 못했다”고 했다.

배상 금액에 동의하지 않으면 ‘재심을 신청하라’는 안내를 받긴 했다. 하지만 그 사이 병원비로 쌓인 빚이 1500만원이었다. 게다가 해수부는 “530만원에 합의하지 않을 경우 다른 보상금도 줄 수 없다”고 나왔다. 형편이 어려운 김씨가 인적피해보상금의 일부라도 먼저 받으려 하니, 그러려면 차량 피해 금액 등이 먼저 확정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씨는 해수부가 제시한 530만원안(案)에 “도리 없이 서명하고 말았다”고 했다. 하지만 이 돈도 아직 김씨 수중에 들어오진 않았다.

김씨에 따르면 세월호 사고 이후 1년 2개월간 김씨를 담당한 공무원은 7명이다. 어떨 땐 이름도 밝히지 않고 “오늘부터 제가 맡게 됐다”고 전화하고 아무 연락이 없었다고 했다. 김씨가 먼저 해수부 등에 연락해도 “잠깐만 기다리라”며 전화를 5~6번 돌리다가 “여야가 세월호 특별법을 타결짓지 않으면 정부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답만 되풀이했다고 한다.

그는 “금전 보상이 적다고 해서 서운해하는 건 아니다”라고 몇 번이나 말했다. 김씨는 세월호 참사 직후 의인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땐 건설인협회에서 주겠다는 상도 마다했다. “아이들 수백 명의 목숨을 앗아간 참사 때 한 일로 상을 받는 게 무슨 소용이냐”고 했다. 그런 그도 이젠 “세상의 끝에 내몰리니 한국에선 목소리가 커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후회가 된다”고 했다. 그의 아내는 “못 들은 걸로 해달라”면서도 “남편이 죽기 전에 아이들을 꼭 보고 싶다고 하는데 사고 뒤 단원고나 학생가족회 등으로부터 연락 한번 받아보지 못한 건 못내 서운하다”고 했다. 대한민국은 의인을 이대로 내버려둘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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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학생 학부모 대표 대표 장동원 님의 관련 글 가기

세월호 생존자 암투병중인 김홍경씨 관련하여 글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세월호 생존학생 학부모 대표를 맡고 있는 장동원 이라고 합니다. 지금 인터넷 과 페북의 올라온 글을 보면서, 생존학생 학부모로써 우선 김홍경씨게 죄송하고, 뭐라 위로의 말씀을…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가 벌써 422일이 지났습니다. 1년2개월이라는 시간동안, 세월호 참사로 인해 많은 분들이 너무나 큰 아픔을 갖고 살아간다는것이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476명의 탑승자 중에 학생246명,교사10명,일반인39명 의 희생자와 학생4명,일반인3명,교사2명의 미수습(실종자) 되신분들 일반인95명,학생75명,교사2명의 생존자가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들입니다.

지난2014년 4월16일 온 국민이 정부의 구조행태에 있어, 개탄스러워했고,정부의 무지의 분노할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날 더이상 대한민국은 내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 마져 들더군요.

기쁜 수학여행을 체 즐기지도 못하고 꽃다운 나이의 하늘로간 우리 어린 학생들, 가족들과 생을 살지도 못하고, 떠나신 일반인 분들, 교육의 사명감을 갖고 아이들과 즐거운 추억의 교육을 만들고자 했던 교사분들, 이모든 분들이 살아있는 생존자들의게는 평생의 아픔을 갖고 갈수 밖에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참사이후 생존학생들은 정부의 구조도 없이, 스스로의 탈출과, 어른들의 도움으로 크나큰 공포속의 세월호에서 나왔습니다. 단원고(당시2학년)현 3학년 학생들은 안산시의 교육평준화가 처음으로 되어 단원고의 입학한 아이들입니다,유치원,초등학교,중학교,단원고(선부동,와동,고잔동)일대의 살아왔던 친구들입니다. 친구들만 두고 나왔다는 죄책감으로 이아이들도, 숨죽이고, 살아오면서, 적게는 1개의 병원과 많게는 8개의 병원을 다니면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1년2개월이 지났지만, 지금도 분향소를 찾지 못하는 친구들도 있었고, 친구들의 죄책감으로 자살을 시도한 학생도 있었습니다.

그러한 아픔도, 이아들한테는 죄스러움만 있을지도 모릅니다. 자식을 잃고, 하루하루를 마지못해 살아가시는, 오직 아이들의 억울함을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고자, 길거리로 나서는 부모님들을 이아이들은 눈물만 흘리며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느누구도 만나기를 꺼려하고, 세월호 당시의 생각을 얘기한다는 것도, 아이들은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지난1년2개월이라는 시간속의 생존자들의 치료지원을 정부가 책임지라고, 돈도 필요없고, 생의전주기 치료를 정부가 지원해 달라 요구했지만, 쓰레기 시행령으로 생존자의 치료지원을 5년으로 국한 시켜 버렸습니다.

뵙고 싶었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분들이 아이들을 구조하셨고, 도와주셨기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크나큰 아픔을 알기에 함께하고 싶었습니다. 위 에서 언급했듯이 아이들도 하루하루를 힘들게 생활하고, 학생들의 부모님들도, 자식이 살아왔다는 아픔도 잠시 우리 아이들 친구들의 죽음으로, 너무나 아파하고, 숨죽이며, 살수밖의 없습니다. 자식의 죽음을 무엇으로 대신할수 있을까요…

생존자분들의 연락처를 알길도 없고, 피해자들의 연락처를 알려달라해도 개인신상의 이유로 정부는 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아이들도 누가누구인지도 모르는 그날 상황에서 알길이 없었지요.

생존학생 부모로서 죄송합니다. 당연히 찾아뵙고 인사드려야지요.

그리고 416참사의 있어, 함께 진실을 밝히고, 정당한 피해구제를 받으셔야 합니다. 정부가 피해자들의 분열을 조장해도, 굴하지 말고, 함께 해야 합니다.

부디 건강 찾으시길 바라고, 빠른 시일의 찾아 뵙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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