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정부, 오키나와 등서 전몰자 유골 수습하며 한반도 출신자는 제외
日 “韓 구체적 제안하면 협의” 약속해놓고 “제안 없었다” 말 바꿔
억울하게 목숨 잃고 묘지조차 없는 강제동원자 유골 2만2천구 추정


▲ 1944년 4월 일제에 징집돼 멀리 동남아시아 옛 버마 전투에 참가한 조선인들. 사진 아랫부분에 ‘최전방에서 싸우는 용사’란 글귀가 희미하게 쓰여 있다.[연합뉴스 자료사진]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본 정부가 2차대전 당시 격전지에서 수습된 유골이 조선인의 것인지 감정하기 위해 협의하자는 우리 정부의 제안을 반년 가까이 무시한 채 딴청을 부리고 있다.

그동안 유골 문제를 놓고 한국 정부가 협의를 제안하면 응할 것이라고 공언했던 일본 정부지만, 정작 한국 정부가 협의를 공식 요청하자 “협의를 제안받은 바 없다”고 발뺌하는 것이다.

26일 일본 시민단체 ‘전몰자유골을 가족의 품으로 연락회’, 한국 행정안전부 등에 따르면 우리 정부는 지난 4월 주일 한국대사관을 통해 일본 후생노동성과 외무성에 유골 문제에 대한 실무 협의를 하자고 제안했지만, 반년이 다되도록 아직 답변을 받지 못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격전지인 오키나와(沖繩) 등에서 유골 발굴 사업을 진행 중인 일본 정부가 발굴 사업 도중 찾은 유골 가운데 한반도 출신자의 것이 있는지 감정해보자는 우리 정부의 제안을 외면하는 것이다.


▲ 징병을 독려하는 글귀가 쓰인 일장기 [독립기념관 제공=연합뉴스 자료사진]

앞서 행정안전부는 이를 위해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 167명으로부터 DNA를 수집해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16년 ‘전몰자 유골수집 추진법’을 제정해 태평양전쟁의 전몰자를 유족에게 인도하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전몰자 유족의 DNA를 수집하고 이를 현장에서 발굴한 신원미상의 유골과 대조해 해당 전몰자의 유족에게 유골을 인도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한반도 출신자는 ‘수습’의 대상에서 제외됐다. 강제로 전쟁터에 끌고 가 죽음으로 몰아댔지만 정작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뒤에는 자국민이 아니라며 유골을 고향으로 되돌려주는 사업에서 제외한 것이다.

법 제정 후 일본과 한국의 시민단체가 한국인 전몰자의 유골도 찾도록 나서라고 재촉하자 일본 후생노동성은 2016년 10월 한국 정부로부터 ‘구체적인 제안’이 있으면 이를 검토하겠다는 답변을 내놨다.

하지만 정작 우리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난 4월 협의를 요청했음에도 일본 정부는 이에 응하기는커녕 무시하고 있다.


▲ 韓시민단체, 일본 정부에 조선인 전몰자 유골반환 촉구 요청서
(도쿄=연합뉴스) 데라사키 유카 통신원 =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이하 보추협)가 8일 일본 정부에 한반도 출신 전몰자의 유골 반환을 촉구하는 요청서를 전달했다. 사진은 보추협 사무국 역할을 하는 민족문제연구소의 김영환 대외협력팀장(오른쪽)이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참의원 의원회관에서 일본 후생노동성 담당자(왼쪽)에게 요청서를 주는 모습

연합뉴스가 협의에 응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후생노동성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요시다 가즈로 과장은 “한국 측으로부터 아직 (협의하자는) 구체적인 제안을 받지 않았다”며 “유골 수습 사업이 목표로 하는 것은 일본이 모국인 일본군과 군속이며 한반도 출신자는 대상이 아니다”고 말했다.

우리 정부가 주일 한국대사관이라는 외교 루트를 통해 ‘구체적인 제안’을 했음에도 구체적인 제안이 없었다고 딴소리를 한 것이다.

이에 “어떤 행위가 구체적인 제안인가”를 재차 묻자 그는 “그건 한국 측이 결정할 일”이라고 발뺌을 하기도 했다.

과거 후생노동성이 ‘한국이 구체적인 제안을 하면 응하겠다’고 약속했음에도 그는 “외교에 관한 일이니 우리들(후생노동성)은 답할 수 없다. 그건(어떤 행위가 구체적인 제안인지) 외무성에 물어봐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행정안전부 관계자는 “주일 한국대사관을 통해 제안했는데도 구체적인 제안이 아니라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구체적으로 제안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 오키나와에서 일제에 의해 숨진 박희태 씨 관련 일본 정부 기록
(도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일제 말기 일본 오키나와(沖繩)에 군속으로 끌려와 숨진 박희태 씨가 행방불명자로 기록돼 있는 일본 정부의 ‘조선인 행방불명자 명부’. 박 씨는 고구마를 훔쳐 먹었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의해 참수를 당했지만, 일본 정부는 그를 사망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자료제공 ‘오키나와 한(恨)의 비(碑)’. 2017.8.15 [email protected]

이 관계자는 “작년과 재작년에도 실무자들이 만나서 유골 문제 전반에 대해 논의를 했는데, 우리는 이를 협의로 보고 논의 내용을 공식 기록에 남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가 전몰자 유골 수집 사업을 집중적으로 펼치고 있는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1945년 제국주의 일본군과 미군 사이에 격전이 치러진 곳이다.

당시 20만명 이상이 숨졌는데, 이 중에는 한반도에서 오키나와에 강제로 끌려온 군인·군속·노무자·정신대원 1만명 가량이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오키나와가 전후 미군정 산하에 있었던 까닭에 유골 수습이 진행되지 못해 전몰자의 상당수는 어딘지 모를 곳에 묻혀 있다.

일본 정부의 전몰자 유골 수집 사업을 통해서는 그동안 800구 가까운 시신이 발견돼 일본인 전몰자 유족들과의 DNA 감정이 진행됐지만, 대부분은 신원을 확인하지 못했다.

억울하게 죽어 어딘가에 묻힌 채 유족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는 조선인 유골은 팔라우, 사이판, 필리핀 등 일본 밖에도 적지 않다.

오키나와와 남태평양 등에서 발굴되지 않은 채 묻혀 있는 조선인 강제동원자의 유골은 2만2천구로 추정된다. (취재 보조:데라사키 유카 통신원)


▲ 강제징용 유골 발굴 계기 된 1945년 잡지 ‘라이프’ 사진
(모토부초[일본 오키나와현]=연합뉴스) 김병규 특파원 = 1945년 5월 28일자 미국 잡지 ‘라이프(Life)’에 실린 무덤 묘표 사진. 오른쪽에서 각각 2번째와 4번째 묘표 속 ‘金村萬斗’와 ‘明村長模’라는 이름은 강제징용 당한 조선인 김만두 씨와 명장모 씨인 것으로 확인됐다. 사진과 함께 게재된 르포 기사의 제목은 ‘오키나와-일본인이 아니라면 오키나와는 살기 좋은 곳이다’이다. [사진 제공=동아시아 시민네트워크] 2019.2.17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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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원문: “강제동원 유골봉환 협의하자” 韓 제안에 日 반년째 ‘딴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