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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 타고 오는 초인’ 허형식 장군 77주년 추모식
거행, 중국 흑룡강성 경안현 대라진 현지에서

전병택 구미지회장

 

동북항일연군 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許亨植, 1909~1942)이 경호원 왕조경과 진운상을 데리고 소부대 현지지도를 다니던 중, 1942년 8월 3일 흑룡강성 경안현 청송령 소릉하 계곡에서 일제 관동군과 괴뢰국인 만주군에 의해 추격을 받아 교전중 33세의 나이로 전사한다. 1915년 음력 3월 장군이 6살 때 가문 전체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망명하면서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를 떠난 지 27년 만이다. 한편 허형식 장군보다 8살 어린,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 출신 박정희(1917~1979)는 이 무렵 25살로 일본군이 세운 만주군관학교 예과를 졸업하여 나중 일본군 장교가 된다. 박정희는 왜왕에게 멸사봉공(滅私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하겠다며 제국주의 일본에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의 혈서를 썼다.

 

허형식 장군이 전사한 지 77년 만에 추모식을 거행한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 왼쪽부터 오상원 장명순 문명숙 김병길 김도화 신문식 전병택 장기태 임재덕 손성진 임영태.

3·1운동 100년을 맞아 식민과 분단, 독재와 이념의 장벽으로 가려진 대표적인 남한 출신 독립운동가 허형식 장군(경북 구미 출신. 13도 연합 의병 총대장 왕산 허위의 종질이자 이육사의 외당숙) 전적지 등 북만주독립운동 사적지를 탐방하여 애국선열들의 정신을 되새기고 우리 민족의 성산 백두산 정상에 올라 한반도의 평화 번영 통일을 기원하고자 민족문제연구소 구미지회가 주최하고 소통과혁신연구소가 주관한 역사평화기행의 핵심인 허형식 장군의 77주년 초모식을 중국 현지에서 고향 선산 쌀과 고국의 소주로 젯밥과 제주를 차리고 합동으로 절을 올리며 추모식을 거행하였다.
허형식 장군 유적지 답사팀은 하얼빈 공항에 도착한 후 항러빈 춘천 빈관에서 1박 후 하얼빈 시내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 관동군 소속의 세균전 연구·개발 기관으로 일제하 한국인과 중국인들에게 용서받지 못할 실험을 자행한 중국 흑룡강성 하얼빈에 주둔시켰던 비밀부대인 731부대 유적지를 답사한 후 동북항일연군 기념관과 박물관을 방문해 허형식 장군에 대한 기록을 찾았다.

 


허형식 장군은 1909년 11월 18일 경북 구미시 임은동에서 시산 허필(許苾 1865~1932.건국포장)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3도 연합의병 총대장 왕산 허위(許蔿 1855~1908. 대한민국장)의 5촌조카이기도 하다. 허 장군은 만주에서 이희산(李熙山) 혹은 이삼룡(李三龍)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다. 중국 정부가 공식 발표한 항일영웅열사 명단에는 허형식 장군과 동북항일연군 연합지휘부 참모장을 지낸 이홍광 장군, 동북항일연군 7군 군장 이학복장군 그리고 중국에서 수차례 영화로도 나온 바 있는 무단장에서 1천여 명의 일본군·만주군과 싸우다 총알이 떨어지자 일본군에 잡히느니 강으로 투신하여 죽음을 택한 8녀 투강의 주인공 동북항일연군 2로군 제5군 부녀단 이봉선, 안순복이 조선인으로서 항일영웅열사에 포함되었다.

제례를 진행한 김병길 어르신은 86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허형식 장군이 왜 부모
형제와 함께 정든 고향산천을 떠나 이역만리 타국에까지 와서 이렇게 일본군과 싸우다 죽어야 되었는지 그걸 우리가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나라 잃은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하다”라는 고사를 인용하여 “당시는 우리가 상갓집 개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 내 자식, 내 딸을 빼앗기고 재산도 빼앗기고 죽으라면 죽어야 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김병길 회원은 “왜 그런가? 주권이 없어 그랬다. 민족의 아픔, 민족의 설움을 허형식 장군이 먼저 깨닫고 느끼고 여기 이역만리 낯선 타국에서 동지들과 함께 끝까지 왜놈들과 싸우다가 전사한 것이 아니냐?”며 “우리 적은 왜놈이다. 바로 일본제국주의자 후예들이 지금도 얼쩡거리고 있다. 참으로 분통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일본 아베 정부의 경제도발에 대해 언급했다. 또한 김병길 회원은 “우리 모두 이 역사적 사실을 명심하고 민족 자긍심을 강화해서 진짜 동방에서 떳떳하고 잘 사는 나라를 만들어 보자고 하면서 허형식 장군을 늦게 알게 된 것이 너무나 죄스럽다 하며 남은여생 동안 허형식 장군의 뜻을 받들어 살겠다”고 강조했다.

 


1939년 허형식 장군은 31세 젊은 나이로 조상지 군장의 뒤를 이어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총참모장에 올랐다. 중국인 조상지 장군을 기리기 위해 중국에서는 주하현을 상지시로 개칭하고 상지시 도심 한가운데 있는 로타리에 조상지 장군의 대형 기마동상을 세워 그의 항일투쟁을 기리고 있다. 반면에 허형식 장군의 고향 경북 구미시는 물론 대한민국 어느 곳에도 허형식 장군에 대한 기념비조차 단 한 곳도 없는 실정이다. 역사를 망각한 나라, 영웅을 잃어버린 나라에서 일본 아베 정부의 경제도발에 대한 일본제품 불매운동, 항일결의문 채택 등 제2의 독립운동이라는 구호가 남발하지만 이러한 과거 항일영웅에 대한 역사를 바로 세우고 널리 선양하는 일이야말로 오래오래 기억되는 진정한 항일운동이며 일본을 뛰어넘고 이기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이육사의 시 <광야>에서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허형식 장군이 유력하다고 학계에서 주장한다.
“허형식 장군이 광활한 만주벌판에서 백마를 타고 다녔다”고 이육사의 외삼촌 허발선생의 후손들이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창 허발은 이육사의 어머니 허길의 큰오빠이다.
허발, 허길, 일헌 허규는 남매 사이며 허길에게 허형식은 사촌동생으로 이육사의 외당숙이 되는 셈이다. 1930년대 말 이육사는 독립운동 자금책으로 활약한 외삼촌 허규와 함께 허형식 장군을 만주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