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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는 30일 일제 강제동원 ‘신일철주금’ 피해자 소송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24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열린 일본기업 신일철주금 강제동원 소송 기자회견에서 일제시대 강제징용 피해자인 김정주 할머니가 참석하고 있다. 양승태 사법부 시절 법원행정처가 재판에 개입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사법농단 소송 중 하나의 사건으로 5년2개월 만에 선고가 내려진다.ⓒ김철수 기자

“일본 가면 언니 만날 수 있다고 혀서, 일본인 선생님이 거짓말을 혀서, 순천서 기차 타고 후지코시로 갔습니다. 군복 한 벌, 모자 한 벌 받아서 공장에서 일했어요. 그때는 키가 적어서 사과 궤짝 두 개를 놓고 서서 쇳덩어리를 깎았어요. 밥도 너무 적게 줘서, 일본말로 ‘시루’(국)라고 하는디 된장국인디 파도 없고 무도 없고 맹물 된장국 한 가지에다가. 일허다가 중간에 화장실 가서 쬐끔 늦게 나오믄 일본 남자 반장들이 쫓아와서 뺨을 때렸어요. 그래도 우리는 30개면 30개 5시(퇴근 시간)까지 다 깎았어요”

89세 김정주 할머니는 74년 전 일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시절 김 할머니는 근로정신대로 끌려간 언니를 볼 수 있다는 초등학교 교사의 꼬임에 넘어가 도야마현 후지코시 공장에서 근로정신대로 강제 동원됐다. 그는 후지코시에서 강압적이고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강제노동, 폭격에 의한 위협에 시달리다가 광복 후 귀국했다.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를 인정하고, 일본 기업에 배상을 명령했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여전히 투쟁 중이다. 과거 강제동원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정부와 기업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이미 해결됐다’라며 ‘국제법에 비춰 있을 수 없는 판결’이라고 비난했다. 심지어 ‘경제 보복’으로 한국을 굴복시키려 했다. 일본 기업은 정부 뒤에 숨어 판결을 무시하고 있다.

“제 일생을 망친 것은 일본 사람입니다. 아베가 테레비에 나올 때마다 ‘저 죽일 놈, 거짓말을 또 한다’고 해요. 아주 뵈기 싫어요. 내가 언제 저놈한테 사죄받고 보상받을까. 아베는 우리한테 사죄해야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즈그 나라에 가서 일을 해줬는디. 저놈 얼굴만 봐도 내가 아주 치가 떨립니다” 74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둔 14일 ‘강제동원 문제의 해결을 위한 국제회의’가 ‘강제동원 문제해결과 대일과거청산을 위한 공동행동’ 주최로 서울 종로구 조계사 국제회의장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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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시대 한국노인회 관계자들이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삼일문 앞에서 ‘일본 정부 측에 경제보복 중단과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사과 및 배상 등을 촉구하는 규탄대회’를 하고 있다. 2019.08.06ⓒ김철수 기자

20년 만에 인정된 강제동원의 고통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개인 손배청구권 소멸 안 해”

전문가들은 대법원 강제동원 판결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지난해 10월 30일 대법원 판결은 20여 년 동안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법적 투쟁을 벌여온 결과다. 첫 번째 소송은 일본에서 시작됐다. 신천수 할아버지 등 피해자 2명은 1997년 12월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일본제철(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오사카지방법원은 4년 뒤 강제노동의 불법성을 인정하면서도 일본제철에 배상 책임이 없다고 봤다. 전후 일본이 시행한 회사경리응급조치법·기업재건정비법에 따른 판단이었다. 일본은 1946년 8월 11일을 기준으로 기존 회사를 구계정(옛날 회사)과 신계정(새로운 회사)으로 분리한 뒤, 기업의 자산은 신계정으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채무는 구계정으로 이전했다. 이에 새로운 회사인 일본제철은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2003년 10월 일본 최고재판소는 원고 패소 판결을 확정했다.

이들의 소송 투쟁은 한국에서 계속됐다. 이춘식 할아버지 등 피해자 4명은 2005년 서울중앙지법에 소송을 제기했다. 1·2심은 피해자들의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에서의 판결이 한국에서도 효력을 미친다고 봤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일본 법원과 마찬가지로 과거 회사에 책임을 물어야지 새 회사에 배상하라고 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2012년 5월 대법원은 이를 뒤집었다. 대법원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를 인용하는 취지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파기환송 후 2심은 대법원 판결에 따라 일본제철이 각 피해자에게 1억 원의 위자료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일본제철은 이에 불복해 재상고했지만, 계류 5년 만인 2018년 10월 대법원은 원고 승소 판결을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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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4명이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1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 재상고심 선고 공판에서 승소 판결이 내려진 30일 오후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94) 할아버지가 서울 서초구 대법원을 나서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김슬찬 기자

강제동원 소송대리인 김세은 변호사는 2012년 대법원 판결 의미에 대해 “일본 법원의 판결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에서 효력을 미칠 수 없다고 강조했다”라고 말했다.

재판부는 일본 판결을 부정하는 근거로 민사소송법 제217조 “외국법원의 확정 판결의 효력을 인정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를 들었다.

재판부는 “일본 판결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배가 합법적이라는 규범적 인식을 전제로 해, 일제의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을 한반도와 원고들에게 적용한 것이 유효하다고 평가한 부분이 포함됐다”라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불법이고, 일제강점기의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일본법 적용 배제의 이유로 “회사의 인적, 물적 구성에는 변화가 없었음에도 전후처리 및 배상채무 해결을 위한 목적 아래 회사경리응급조치법과 기업재건정비법 등 일본 국내법을 이유로 대한민국 국민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을 지지 않는 결과가 되는 것은 대한민국의 공서양속에 비추어 용인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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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제징용 피해 생존자 이춘식(94) 할아버지가 30일 오후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재상고심 판결을 위한 전원합의체에 참석하기 위해 서울 서초구 대법원으로 이동하고 있다.ⓒ김슬찬 기자

2018년 대법원 판결은 특히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고 김 변호사는 말했다. 재판부는 아베 정부의 ‘한일청구권협정으로 강제동원 배상 문제는 해결됐다’라는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논리들을 판시했다.

재판부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된 일본 기업의 반인도적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한 위자료 청구권으로 미지급 임금이나 보상금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이어 “한일청구권협정은 한일 양국 간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 관계를 정치적 합의로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협상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했다”라며 “이러한 상황에서 강제동원 위자료 청구권이 그 적용 대상에 포함됐다고 보기 어렵다”라고 판단했다.

“강제동원은 국제인권법상 중대한 인권침해”
국제법은 한국이 아닌 일본이 어겼다

조시현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은 “대법원 판결의 가장 큰 의미는 피해자들이 겪은 고통이 마침내 한국의 사법부에 의해 처음 인정됐다는 점”이라며 대법원이 강제동원을 ‘반인도적 불법행위’로 규정하고, ‘불법한 식민지배’를 인정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 연구위원은 “대법원은 피해자들의 배상 요구를 한국의 민법을 근거로 불법행위 책임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 문제로 다뤘다. 즉 불법행위가 성립해야 배상 책임이 생긴다는 논리”라며 한국과 일본 판결의 결정적 차이는 불법행위 인정 여부에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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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 부산 정발장군 동상 앞 ‘친일역사 청산, 자주평화의 새로운 100년, 강제징용노동자상과 함께하는 3·1운동 100주년 부산시민대회’에서 참가자들이 일본의 사죄 촉구 구호를 외치고 있다.ⓒ민중의소리 김보성기자

아울러 그는 대법원 판결에서 다수 의견이 불법행위 앞에 ‘반인도적인’이라는 수사를 붙였다고 지적했다. 그는 “국제법상 ‘인도에 반하는 범죄’와 연관돼있음이 분명하다”라며 강제동원을 교통사고나 폭행 등 단순한 불법행위가 아닌 특별한 불법행위로 규정했다고 말했다.

조 연구위원은 더 나아가 “대법원은 이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를 ‘일본 정부의 한반도에 대한 불법적인 식민지배 및 침략전쟁의 수행과 직결’시켰다”라며 “강제동원의 배경과 맥락이 함께 고려돼 일제가 한 행위의 위법성이 더욱 또렷해졌다”라고 말했다. 그는 “강제동원은 국제인권법상 중대한 인권침해”라며 국제법을 어긴 것은 한국이 아닌 일본이라고 강조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배상 권리는 단순히 금전배상에 그치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왔다. 조 연구위원은 “배상의 권리는 구체적으로 원상회복, 금전배상, 재활, 만족, 재발 방지의 보증에 관한 권리들을 포함한다”라며 특히 만족을 위한 조치로써 사실인정과 책임의 수락을 포함하는 공적 사과를 강조했다.

그는 “일본 정부는 (강제동원 등 식민지배 피해에 대해) 사과했다고 말하지만 무엇을 사과했는지 잘 모르겠다. 정확한 사실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겠다는 의사를 밝혀야지 진정한 사과”라며 “청구권이라는 재산법상 개념을 뛰어넘어 국제인권기준에 따른 해법이 모색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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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대학생진보연합 소속 대학생 및 관계자들이 7일 오전 서울 중구 미쓰비시 서울본사 앞에서 전범기업 미쓰비시 규탄 집회를 열고 강제징용 사죄 배상 없는 전범기업 미쓰비시 규탄하는 구호를 외친고 있다. 2019.08.07ⓒ김철수 기자

한편 전범 기업 측에서 배상을 이행하지 않음에 따라 피해자 측은 해당 기업의 한국 내 자산에 대한 강제집행 절차에 돌입했다. 피해자 측은 포스코와 일본제철의 합작 회사인 PNR의 주식 매각 명령을 법원에 신청했다.

이에 한국 법원은 주식압류를 결정하고 일본 외무성에 압류결정문을 발송했으나, 외무성은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반송해 국제협약을 위반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민중의소리 

☞기사원문: 아베 주장 ‘터무니 없다’는 대법원 강제동원 판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