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손잡고 대표 배춘환입니다.

국내 유일의 노동법 모의법정 경연대회가 제5회를 맞이할 수 있도록 관심 가져주시고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문제출제위원을 비롯하여 서면심사위원, 재판부, 대회 참가자 분들, 서울대학교공익법센터, 전국민주노동조합연맹, 한국노동조합연맹 관계자 분들, 또 손잡고의 활동가와 운영위원 분들, 그리고 무엇보다 고공에서 길 위에서 길고 긴 싸움을 이어가고 계신 노동자 분들, 우리 모두 매년 이 8월 뜨거운 여름을 사회 정의에 대한 더 뜨거운 갈망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노동자의 이름은 어디에서 왔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산업의 역군’이라는 이름으로 이름 없는 손가락들과 과로사들을 산업탑 아래 묻었던 사람들, 중동 건설 붐에 이국의 모래사막 열기를 견뎌내던 사람들, 숨도 쉬기 힘든 좁은 작업 공간에서 묵묵히 맡을 일을 해내던 사람들, 한 달에 한 번 기름 베어나는 종이봉투에 통닭을 들고 오시던 아버지의 이름이었습니다. 그 자랑스러운 이름이 권리를 주장할 때, 노동자는 철벽 앞에 서는 것 같습니다. ‘노동자의 권리’나 ‘파업’, ‘쟁의’와 같은 단어 앞에 언론도 법원도 국회도 사회의 시선도 싸늘해집니다. 마치 노동자의 이름은 인권의 이름이 아니라 기능의 이름 같습니다.

우리나라 노동자의 이름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개화 되던 비참한 시기에 등장했기 때문인가 생각해봅니다. 철로 공사에 강제로 동원되어 뼈를 묻은 사람들, 하와이와 멕시코 등지에서 종일 억센 사탕수수와 애니깽 잎을 쳐내도 고국으로 돌아올 뱃삯을 마련할 수 없던 사람들, 정미소며 미곡소에서 화장실 가는 것도 옆 사람과 이야기 하는 것도 금지된 채 묵묵히 쌀알 속의 쭉정이를 골라내던 사람들. 우리나라 초기 노동자의 이름에 인권은 없었습니다. 그들이 힘을 합치는 것, 조합을 만드는 것, 단체 행위를 하는 것,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습니다.

해방이 된 후에, 한국 전쟁이 끝난 후에, 박정희의 독재가 끝난 후에, 6월 민주항쟁이 지나간 후에, 촛불 혁명이 타오른 후에, 민주주의는 성숙해 간다는데 언제 노동자의 이름은 인권의 이름이 될까요? 최저임금 몇 백 원, 몇 십 원 올리는데 부딪쳤던 그 저항들을 보면 노동자의 이름은 역시 인권이 아니라 기능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일제 강점기, 목숨을 걸어도 성취하기 힘들었던 노동자의 단결과 저항이 2019년 이 사회에서도 왜 이렇게 힘든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법으로 보장된 노동권을 행사한 것이 왜 손해배상 가압류라는 ‘돈’으로 매를 맞아야 하는 일인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분명히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산업의 역군이었고, 우리의 시민이자 국민인 그가, 왜 노동자의 이름으로는 헌법에 보장된 권리를 누릴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한 번도 인권의 이름이 되지 못한 ‘노동자.’ 그 합법적인 권리를 되찾기 위해 오늘의 한 걸음은 값지고 무겁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고립된 듯한 두려움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절망감에 빠져있는 많은 노동자들에게 여러분들의 관심은 오늘을 버텨낼 수 있는 연대가 됩니다. 그런 여러분들이 있기에 2020년의 뜨거운 8월에는 인권의 빛이 노동자의 이름에 깃들 것을 믿으며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손잡고 상임대표 배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