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익숙한 일화가 하나 있다. ‘농부와 황희 정승의 일화’가 그것이다.

핵심은 ‘농부로부터 당시 천하의 재상 황희도 지혜를 배운다’는 뭐 그렇고 그런 내용이다.

황희 정승이 어느 날 시골길을 가다가 두 마리 소를 몰고 일하는 농부를 만났다. 황희 정승은 그 농부에게 “그 두 마리 소 가운데 검은 소가 일을 잘합니까, 누런 소가 일을 잘합니까?” 하고 물었다. 농부는 계속 침묵만 지켰다. 그러자 불쾌한 마음이 살짝 든 황희가 그냥 가던 길을 계속 떠났고, 그런데 그 농부가 뒤 쫓아와 말했다. “선비양반,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제가 왜 그때 말하지 않았느냐 하면, 아무리 짐승이지만 주인이 누구보다 누가 더 일 잘한다고 해보십시오. 얼마나 섭섭하겠습니까? 그래서, 침묵을 지켰습니다. 사실은 검은 소가 일을 더 잘합니다. 누런 소는 꾀를 좀 부려요.”

이 말에 크게 깨달은 황희가 그때부터 아랫사람들을 대할 때 함부로 하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그 일화내용이다.

그런데… 그 유명한 일화를 왜 굳이 “식량지원을 정쟁화 시킨 오류: 문대통령님, 왜 이러십니까?”에 등장시킨 이유는 뭔가? 그런 의문이 충분히 들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아무리 좋은 지혜와 가르침이라 하더라도 타이밍과 의도가 맞지 않고, 수용자의 속마음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아니 끄집어냄만도 못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서 그렇다.

우선은, 인도적 지원문제는 스위스 등 유럽국가 들처럼 인도주의 정신에 맞게 ‘낮게’이행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 물론 국내정치적인 입장으로 볼 때 문대통령의 고민과 의도를 모르지는 않겠으나,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오류가 보인다.

당시 ‘비천한’신분이었던 농부의 말에도 귀 기울일 줄 아는 그런 황희 정승의 됨됨이를 선대들이 우리 후대들에게까지 전달하고 싶었던 그 마음은 정치지도자의 덕목이 어디에 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지 ‘잘못된’정치행위로 곡해되어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인도적 지원문제는 말 그대로 한 국가의 국정최고 책임자가 국제법이 허용하고 인류 보편적 가치인 인간존엄성에 근거해 행해도 되는 지극히 정상적인 통치행위의 범주가 될 텐데, 왜 그런 정당한 행위를 그렇게 쓸데없이 정치권 정쟁의 한복판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는 문제로 전락시켰냐는 의미이다.

제아무리 지금 꼬인 정국을 풀기위해서도 그렇지, ‘정치’와 ‘정쟁’으로부터는 멀어져 행해져야 하는 ‘인도적 지원’문제를 여야의 정치회복이라는 그런 발상으로 풀어보고자 했던 그 자체가 정치와 분리되어진 인도적 지원문제와의 성격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제아무리 백번 양보하여 선의로 해석하더라도 인도적 지원문제가 그런 해결의 실마리용으로 이용되어져서는 안 되었다는 말이다.

다음으로는, 수용자입장에서도 문대통령의 그런 발상은 허용할 수가 없다. 이는 앞선 일화에서 그 농부가 소가 없는 먼데까지 가서 그 물음-황희의 물음에 답해주고자 했던 것은 제아무리 하찮은 미물(: 의인화하면 가장 하찮은 신분계급)이라하더라도 존중해줘야 한다는 그런 인간중시의 정신이 녹아져 있다고 한다면, 이를 식량지원이라는 인도적 지원관점에서 보면 그 해당수용국가의 처지와 실정, 상황 등을 충분히 고려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1차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북의 ‘식량난’문제의 본질은 ‘식량난’이라는데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는 ‘식량문제’이고, 이는 여러 정치경제적 측면, 기후·지리적 환경 등 복합적 산물의 결과로서 존재하는 국제문제이자 경제문제인 것이다.

실질적으로도 엄격한 잣대로만 보자면 북의 식량 자급률은 전 세계적으로 매우 높은 상급순위에 해당되는데도, 그런데도 왜 북은 식량문제가 일어나야만 하는가? 복합적 이해가 필요하고, 그 이해를 바탕 한 인도적 지원이 다양한 각도에서 강구되어져야만 한다.

바로 그러할 생각은 않고, 실제 북의 식량문제에 대해서도 도움은커녕, 즉 지원의 시급성과 수용자의 마음, 인도적 지원이라는 특성에 따른 ‘낮은’지원을 할 생각은 없이 온 동네방네 다 소문을 내 지원은 지원대로 제때 못하면서 상대방은 불쾌하게 만들고, (문대통령의 그런 호소에 돌아온 보수야당의 대답은 “자식의 죽음에 대한 세간의 동병상련을 회 처 먹고, 찜 쩌 먹고, 그것도 모자라 뼈까지 발라 먹고 진짜 징하게 해 처먹는다. 귀하디 귀한 사회적 눈물 비용을 개인용으로 다 쌈 싸 먹었다. 지구를 떠나라. 지겹다.”(차명진) “세월호 그만 좀 우려먹으라 하세요. 죽은 애들이 불쌍하면 되는 거죠. 이제 징글징글해요.”(정진석) “맞아요, 불쌍한 아이들 욕보이는 짓들이죠.”(안상수) “시체장사 그만하라.”(김문수) “세월호 가족 4억 6천만원 벌었다, 양평해전 전사자도 겨우 3천만 원 받았는데.” “미사일에 대한 문 대통령의 답이 식량 지원이라니…. 참으로 누구의 대통령인지…. 해야 될 일을 안 하고, 하지 말아야 될 일을 하는 것 아닌가 싶다.”(나경원)였고,북도 5월 12일 자신들의 대외선전매체 를 통해 “주변환경에 얽매여 (남북 정상 간) 선언이행의 근본적 문제들을 뒷전에 밀어놓고 그 무슨 계획이니 인도주의니 하며 공허한 말치레와 생색내기나 하는 것은 남북 관계의 새 역사를 써나가려는 겨레의 지향과 염원에 대한 우롱”이라며 남측의 인도주의적 대북지원 의사를 거칠게 비난하고 있지 않던가.) 또 인도적 지원문제는 국제적인 제재국면과는 하등 상관없는데도 그 (지원의) 규모와 시기, 절차와 형식 등을 미국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워킹그룹에서 논의하고자 했던 것은 분명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해서 명심해야 될 것은 인도적 지원문제는 ‘인도적 지원문제 답게’ 정치문제와는 별개로 인도적 지원원칙과 정신에 맞게 그렇게 풀면 되는 것이고, 정치해법으로서 필요한 협치 문제는 끝가지 대화와 타협으로 모든 문제를 풀고자했던 세종, 영·정조와 같은 그런 집요함으로 풀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마키아벨리와 같은 해법으로 풀어나가면 되는 것이다.

참고로, 인도적 지원, 그 중에서도 생존 그 자체의 고통과 관련된 인도적 지원문제는 당시 프란치스코 교황이 달고 있었던 세월호 배지에 대해 누군가(기자)가 시비하자 그분 왈, “타인의 고통에는 중립이 없습니다.”

거기다가 필자는 “인도적 지원문제는 정치의 문제가 아니며 타이밍이 생명”이고, “수용자를 배려하는 마음입니다”라는 것을 꼭 덧붙이고 싶다. 울림으로 다가갔으면 하고, 하루빨리 식량지원 문제가 매듭 되었으면 한다.

(불행히도 지금도 여전히 정부는 국민여론 청취중이고, 이러저러한 상황 핑계만 대면서 대한민국의 인도적 지원은 깜깜 무소식이다.)

 

민 플러스, 2019년 5월 14일에 게재된 글입니다 (필자와 협의하여 수정 후 본지에 실린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