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TN 라디오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
■ 방송: FM 94.5 (18:10~20:00)
■ 방송일: 2019년 6월 7일 (금요일)
■ 대담: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 이기호 성우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12편 “친일파 처벌 ‘0’, 반민족행위자들의 든든한 ‘빽’”

◆ 문재인 대통령> “독재 세력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친일에 대한 청산도 함께 이루어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부독재 정권이 연장되는 바람에 그 청산에 실패했습니다.”

“친일잔재 청산은 너무나 오래 미뤄둔 숙제입니다. 잘못된 과거를 성찰할 때 우리는 함께 미래를 향해 갈 수 있습니다.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야말로 후손들이 떳떳할 수 있는 길입니다. ‘친일잔재 청산’은, 친일은 반성해야 할 일이고, 독립운동은 예우 받아야 할 일이라는 가장 단순한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입니다. 이 단순한 진실이 정의이고, 정의가 바로 서는 것이 공정한 나라의 시작입니다.”

◇ 앵커 이동형(이하 이동형)> 대통령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친일은 반성해야 하는 일이고, 독립운동은 예우 받아야 할 일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 것이죠.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서 민족문제소와 이동형의 뉴스 정면승부가 함께 준비한 특집 코너.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열두 번째 시간입니다. 1949년 6월 6일, 70년 전 그날을 우리 역사는 치욕의 날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왜 일까요? 오늘 ‘전달자들’은 반민특위와, 미완의 과제로 남은 친일파 청산에 관한 얘깁니다. 도움말씀 주시기 위해서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방학진 민족문제연구소 기획실장(이하 방학진)> 네, 안녕하십니까.

◇ 이동형> 시작하면서 친일청산 문제와 관련해서 문재인 대통령 발언을 들어봤는데, 결국 우리가 친일청산에 실패한 것은 반민특위가 좌절됐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수 있겠죠.

◆ 방학진> 그렇습니다.

◇ 이동형> 반민특위 활동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유일하게 남았던 친일청산의 기회였는데요. 그게 친일파들의 농간으로 날아가버렸다, 이게 안타까운 것인데요. 제가 1949년 6월 6일이 치욕의 날이다, 이렇게 말씀드렸는데, 방 실장님도 같은 의견이십니까?

◆ 방학진> 그렇습니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날이기 때문에, 또한 그 날에 잘못 꿰어진 단추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몰상식이 상식이 되고, 불의가 정의가 돼버리는 그런 날이 되겠죠.

◇ 이동형> 이런 일이 벌어짐으로써 우리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정의가 이런 것이라고 가르치기 어렵게 되어버렸잖아요?

◆ 방학진> 그렇죠. 정의라는 말을 하기 어렵고, 대세를 따라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이기는 놈이 정의다, 라고 하는 잘못된 가치관이 팽배해져 버렸습니다.

◇ 이동형> 왜냐하면 그 결과 친일을 하면 그 후손들까지 잘 먹고, 잘 살게 됐고, 독립운동을 하면 3대에 걸쳐서 빌어먹게 될 수밖에 없는 그런 현실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한테 제대로 된 정의를 못 가르친다는 이 말씀이잖아요?

◆ 방학진> 그렇습니다.

◇ 이동형> 해방 후 당시로 돌아가면요. 해방하고 나서 물론 미군정이 들어왔습니다만, 우리 민중들, 우리 국민들의 요구는 한결 같았습니다. 제일 처음부터 친일파부터 처단해라.

◆ 방학진> 왜냐하면 우리가 상식적으로 볼 때 어젯밤에 우리 집에 도둑이 들었다고 한다면, 그 도둑이 무엇을 훔쳐갔는지, 리스트부터 정리하는 게 기본이죠? 35년 동안 강도 일본에게 지배당했으면 그동안에 누가 도둑질을 해갔고, 거기에 도둑질한 공범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죠.

◇ 이동형> 그러니까 우리가 45년 해방을 하고, 48년에 정부가 수립됐는데, 그 사이 3년이 미군정 시대이지 않았습니까? 미군이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역사를 잘 몰랐기 때문에, 또 자신들의 행정적 편의를 위해서 과거 친일했던 사람들을 그대로 기용했단 말이죠. 그러고 나서 우리가 48년에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나서 이제는 과거를 단죄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생긴 법이 반민법이죠.

◆ 방학진> 그래서 반민법이라고 하는 법이 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법률 3호로 만들어지거든요. 쉽게 말하면 세 번째로 먼저 만들어진 법인데, 앞의 두 가지 법은 정부조직법, 대통령사면법이기 때문에 대단히 실무적인 법이고, 법률 3호인 반민법이 그 당시의 민중들의 요구가 담긴 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에서는 이러한 그 당시 우리 민중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친일파들을 등용하는 데, 그 등용의 논리가 아주 간단합니다. 그 당시 경찰 책임자인 미군정 경찰 책임자 윌리엄 매글린이 뭐라고 얘기하냐면, 일제 강점기에 일제에 충성한 사람은 미군정이 들어서서 미군정에게 충성할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검증된 친일파들을 자기들이 쓰지 않을 수 없다. 쉽게 말하면 친일파들의 노예근성을 정확히 파악한 거죠. 노예가 주인을 가리지 않지 않습니까? 일제에게 노예를 했던 사람들은 다시 미국에게도 노예가 될 것이다, 라고 하는 논리죠.

◇ 이동형> 그래서 48년에 정부가 수립되고, 반민특위법을 만들어서 반민특위가 출범되는데, 일단 위원장은 우리 독립운동가 출신이죠. 김상덕 선생.

◆ 방학진> 우여곡절 끝에 이승만과 그 당시 친일 세력들은 반민특위법이 만들어지는 것부터 해서 계속 반대를 했었고, 그렇지만 워낙 제헌의회에 들어와있던 소장파들이 그나마 신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승만과 친일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법률 3호에 의해서 반민법 통과, 또 그 법률에 기초한 반민특위를 만들었고, 그 위원장은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치신 김상덕 위원장님이 되신 거죠.

◇ 이동형> 그래서 반민특위가 조사하고, 친일파들을 체포하는 역할. 그다음에 특별 검찰부도 생기고, 특별 재판부도 생기지 않습니까?

◆ 방학진> 그렇습니다. 일종의 원스톱 서비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사를 하고, 기소도 하고, 특별 재판부에서 재판도 하는. 그것이 바로 반민특위인데요. 특별 재판부의 재판관은 바로 지금 한국의 법조인들이 가장 존경한다고 하는 가인 김병로 선생님이 특별 재판부의 재판장이었죠.

◇ 이동형> 1948년 11월 26일, 국회 속기록에 남아있는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옵시다.

◆ 성우> “지금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마찬가지로 우리 현실에는 본 법에 해당한 자가 경찰 관리 가운데 많습니다. 그런데 그 임무를 하는 조사원들이 사법 경찰관들을 지휘 조사하는 권리가 없다면 사법 경찰관 내부의 해당한 자는 도저히 조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관계로 해서 능동적으로 하기 위해서 우리가 법적으로 이러한 권리를 갖지 않고는 안 되겠다는 점입니다.”

◇ 이동형> 지금 요즘 들어서 과거사위원회, 법무부 산하에서 만들어서 여러 가지 조사를 했습니다만, 다들 아쉬움을 표현하는 게 수사권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거든요?

◆ 방학진> 그렇습니다. 조사만 하고, 압수수색도 못하고.

◇ 이동형> 김상덕 위원장도 그것을 걱정하지 않았나 싶어요.

◆ 방학진> 그렇습니다. 당시에 이승만과 친일권력을 떠받치고 있던 물적 토대는 일제 강점기 친일경찰들이거든요. 그 당시에 서울 시내에 10개의 경찰서 서장 중에 9명이 친일경찰 출신이고, 나머지 한 명은 군수 출신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 당시 10개의 서울 시내 경찰서장 모두가 일제 친일관료 출신이라는 얘기죠. 그런 상태에서 특별 경찰, 특경대가 없이는 도저히 강제적으로 수사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특경대가 필요했던 거죠.

◇ 이동형> 만약에 특경대가 없었다면, 반민특위의 여러 가지 정보들도 샐 수 있었을 테고 말이죠.

◆ 방학진> 그렇습니다.

◇ 이동형> 민족의 염원속에 출범한 반민특위는 조사와 처리 대상자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습니다.

◆ 성우> 일본 정부와 통보하여 한일합방을 위해 적극적으로 통모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와 이를 모의한 자,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자, 독립운동자나 그 가족을 살상한 자, 밀정 행위로 독립운동을 방해한 자,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일제 기관의 중앙 간부를 지낸 자, 군경으로 악질행위를 한 자

◇ 이동형> 이러한 자들을 처벌하겠다, 이렇게 해서 출범했고 1호 검거자가 그 유명한 매판 자본가죠? 화신백화점의 박흥식.

◆ 방학진> 네, 그렇습니다. 이 당시에 우리가 반민특위분들이 친일파들을 잡아가고, 친일의 기준이랄까, 이런 것을 세운 것을 보면 우리만 특별한 기준을 만든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 나치 청산을 했던 프랑스나 유럽의 기준과 거의 일치합니다. 일종의 상식이고, 그 당시의 시대정신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요. 그중에서도 특별히 문화·예술인들, 경제인들, 이런 사회적인 영향을 많이 끼칠 수 있는 자들을 먼저 체포했던 것인데요. 이런 구성을 보면 과거의 독립운동, 3·1운동에 의해서 설립된 임시정부가 7가살이라고 하는 그러한 것들도 만들어냈고, 41년도에 건국 강령을 통해서 해방이 되면 친일파들을 꼭 피선거권을 박탈해서 정치권력, 정치세력에게 권력을 주지 않겠다고 하는 친일 청산에 대한 일맥상통하는 맥이 있거든요. 그 맥을 그대로 이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이동형> 1호 검거자 박흥식 이후에 밀정 출신이죠. 이종형. 또 최린, 김현수, 최남선, 이광수, 줄줄이 체포되어서 유치장으로 들어가는데, 여기에는 최린을 제외하고. 최린은 미안하다, 잘못했다, 종로 거리에 날 매달아라.

◆ 방학진> 그렇습니다. 광화문에서 자기 사지를 찢어서 그렇게 민족에게 사죄하겠다, 그런 말을 했으니까요.

◇ 이동형> 최린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반성이라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특히 이종형 같은 경우에는 재판정에서 오히려 나한테 상을 줘야 하는데, 왜 가두냐, 이렇게 뻔뻔한 모습을 보였단 말이죠.

◆ 방학진> 자기는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탄압한 적은 없고, 오직 빨갱이들만 잡았다, 이런 말을 했었죠.

◇ 이동형> 반민족 행위자들이 법정에 나와서까지도 반성하지 않고, 뻔뻔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글쎄요. 뭔가 믿을 만한 구석이 있다, 이렇게 생각했을까요?

◆ 방학진> 그렇습니다. 영화 2015년도 ‘암살’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면 제일 좋을 것 같아요. 이정재가 반민특위 법정에서 나는 밀정이 아니고 오히려 독립운동가, 애국자라고 했잖습니까? 그 근거는 바로 이정재의 밀정 행위를 목격하고, 증언할 수 있는 하수인이라는 든든한 ‘빽’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죠.

◇ 이동형> 방금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체포된 친일파들의 변명은 다양했고, 반성과 사과는 없었습니다. 당시 반민특위에서 조사관으로 활동한 정철용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 성우> “난 그래도 ‘미안하다’ 이런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하는 이야기가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우리는 전부 황국신민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 같은 사람이 신사참배 안하고 창씨개명 안 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이러는 거지. 그래도 민족정신이 있어서 조금이나마 뉘우치길 기대했는데, 엉뚱한 소리가 나오니 기분이 좋지 않더라고”

◇ 이동형> 이렇게 뻔뻔하게 이야기한 것, 예가 있으면 조금 더 들어주실래요?

◆ 방학진> 이게 정철용 조사관님 제가 생전에 뵀던 분인데요. 이분이 충청도분인데, 청운의 꿈을 안고 조사관이 되셔서 이게 누구 이야기냐면, 춘원 이광수의 이야기입니다. 평소에 춘원 이광수를 대단히 존경했는데, 해방이 되고 춘원 이광수가 반민특위에 잡혀 와서 이런 식의 변명을 하니까 대단히 실망했다, 이런 이야기를 정철용 선생님이 하시거든요. 이외에도 대부분이 순순히 체포에 응하지 않고, 도망다닌다든지, 또 잡혀서도 이거는 모함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반민특위에서 공식적으로 민중들에게 투서도 받았거든요. 투서를 받은 분들 대부분 자기를 모함하는 것이다, 이렇게 변명으로 일관했다는 이야기를 제가 많이 들었습니다.

◇ 이동형> 반민특위에서 유일하게 사형 선고와 무기징역을 받은 인물이 일본경찰 간부 출신인 김덕기와 김태석이죠. 대통령 연설 때문에 요즘에 시끄럽던데, 이 김태석이라는 사람이 의열단, 약산 김원봉의 의열단이 조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같은 조선인으로서 고발해서 거사를 실패하게 만든 대표적인 인물 아니겠습니까?

◆ 방학진> 그렇습니다. 고등 경찰의 대부분이 조선 경찰들인데, 이것은 일제의 정책입니다. 왜냐하면 가장 조선인들의 습성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잘 알기 때문에 조선인 특고를 통해 가지고 독립운동가 탄압에 앞장섰던 사람들인데, 대표적인 게 노덕술, 김덕기, 김태석, 이런 사람들입니다. 김태석이 실제로 사형 선고를 받기는 했지만, 사형이 됐는가? 안 됐죠. 왜냐하면 이 법에 의해서 원래는 반민특위가 50년 6월까지 활동을 하게 되어 있었는데, 49년 9월에 개정법안이 발의되면서 와해가 되어 버린 거거든요. 제대로 활동을 못 했기 때문에 반민특위에서 기록상으로는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반민특위 위원회가 와해되고, 6.25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반민특위에 의해서 집행유예라든지, 죄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무죄로 되어 버린 거죠. 51년이 되면 법적으로 모두가 무죄가 되어 버립니다. 반민특위에 의해서 처벌된 사람은 법적으로 0라고 보는 게 맞겠습니다.

◇ 이동형> 그러니까 노덕술, 김태석, 이런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하든, 의열단이나 김원봉, 이런 사람들을 일본 경찰의 끄나풀 노릇을 하면서 고발하기도 하고, 잡아다가 고문하기도 하고, 나중에는 해방 후에 노덕술은 약산 선생한테 뺨을 때렸다,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 방학진>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는 거죠. 노덕술은 울산 출신이거든요. 울산 출신인데, 경남 지역에서 주로 활동을 합니다. 통영 경찰서, 거제, 을영, 김제 경찰서에서 활동하면서 대부분 학생들, 학생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다가 고문하는 아주 실력을 발휘해서 경기 경찰청, 지금으로는 서울 경찰청으로 스카우트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경기 경찰청에서 오랫동안 정보 업무를 담당하고 해방을 맞이했고, 바로 말씀하신 김원봉 선생을 직접 고문해서 김원봉 선생이 얼마나 속이 상했겠습니까?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에게 자기가 다시 고문당할 줄이야. 아마 그것이 김원봉의 월북에도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죠.

◇ 이동형> 그러니까 독립운동 30년 하면서 이런 수모를 단 한 번도 받은 적이 없다. 왜냐하면 한 번도 체포된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해방된 조국에 와서 친일경찰 노릇을 했던 사람한테 잡혀서 고문 당하고, 그런 생명의 위협도 느끼고요. 그렇기 때문에 그게 월북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렇게 나오는 거겠죠.

◆ 방학진> 그렇습니다. 김원봉 선생은 북한을 좋아해서, 김일성 정권을 추종해서 월북했다기보다 대한민국에서 내가 살 수 있는 여지가 없구나, 라고 해서 절망 속에서 월북하지 않았을까 생각되고요. 실제로 북한에서 김원봉 선생은 숙청이 되거든요. 지금 요즘 말하듯이 친북이다, 뼛속까지 공산주의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대단히 어불성설인 것 같습니다.

◇ 이동형> 아까 쭉 이야기했습니다만, 친일파들, 그리고 잡혀온 친일파들의 뒷배가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이것은 다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실인데요. 김상덕 위원장을 이승만 대통령이 찾아가서 회유한 적도 있다고 하는데, 회유는 조사 적당히 해라, 이런 거겠죠? 더 이상 잡아가지 마라, 이런 거죠?

◆ 방학진> 김상덕 선생님의 친 아드님이신 김정육 선생님에게 작년에 직접 들은 이야기인데, 그 당시에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님 관사가 충정로역 대한극장 주변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기서 직접 아들 김정육 선생님이 15살일 때인데, 김정육 선생에게 방에 들어가 있어라, 절대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거실로 나오지 마라, 라고 했는데, 바로 그 손님이 이승만 대통령이었던 거죠. 비공식 일정 속에서 밤에 찾아와서 결과적으로 어떤 말씀을 하셨느냐고 김정육 선생님한테 여쭤보니까 원하는 거 다해주겠다. 대신에 살살해라. 살살하라고 하는 것은 친일파 청산, 친일파들 잡아들이고, 조사하는 작업을 살살하라고 하는 유화적인 정책을 폈었는데, 그것을 김상덕 선생님이 거부하신 거죠.

◇ 이동형> 우리가 아까 전에 얘기했듯이 노덕술은 대표적인 친일경찰인데,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체포될 때 우리 경찰이, 대한민국 경찰이 소위 말하는 보디가드 역할을 해서 그것도 충격적인데요. 지금 주한 미대사관의 반민특위 보고서를 보면, 이승만 대통령이 수감 중인 노덕술을 차 2대를 줄 테니까 풀어줘라, 이런 요구까지 했기 때문에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뿐만이 아니고, 이승만은 몇 차례 대국민 담화를 통해서 반민특위에 대해서 불편한 감정을 드러냈는데요. 그것도 듣고 오죠.

◆ 성우> 1948 년 9월 3일 친일파 처단에 대하여
“지금 국회의 친일파 처리 문제로 많은 사람들이 선동되고 있는데, 이런 문제로 민심을 이산시킬 때가 아니다. 이렇게 하는 것으로는 문제 처리가 안 되고 나라에 손해가 될 뿐이다.”

1948년 10월1일 기자회견
“정권이양 시기이므로 현직에 있는 사람을 처단하는 것은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반민특위법으로 검경찰관들이 동요한다는데, 정돈이 되거든 친일파를 처단하자.”

1949년 2월2일 친일파문제에 대한 담화
“반민특위의 활동이 삼권분립에 위반되기 때문에 조사위원들은 조사에 그쳐야 하고, 조사도 조속한 시일 내에 완료해야 한다.”

1949년 2월 16일 특별경찰대 폐지 및 반민법 개정에 대하여
“지금 진행하는 바와 같이 며칠에 몇 사람씩을 잡아 가두어 1,2 년을 두고 끌어 나간다면 이는 치안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것이므로 지금 진행하는 방법을 모두 정지하고…”

1949년 2월21일 반민특위 비판 담화
“경찰의 기술로 지하공작과 반란음모를 예방해야 하는데 (반민특위) 조사위원들은 이럴 생각이 꿈에도 없다.”

◇ 이동형> 대통령이 반민특위에 대해서 안 좋은 감정을 노골적으로, 공식적으로 계속 드러냈고, 결국은 대통령이 우리 뒤에 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친일파들이 반발합니다. 백민태의 자수로 무산된 백색 테러 있었고요. 국회 프락치 사건 만들어냈고, 결국은 6월 6일에 반민특위를 습격합니다. 마지막으로 백범 암살. 소위 말하는 6월 총공세. 그렇게 해서 반민특위가 완벽하게 무산되는데요. 반민특위가 6월 6일에 습격 받았는데, 그 이튿날이죠. 이승만이 외신과의 기자회견에서 본인이 습격을 지시했다고 했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도 완벽한 사실이고요. 결국은 이런 끊임없는 반민특위 무력화 시도를 넘어서지 못해서 친일파 청산은 실패로 끝났고, 이후에 반민특위를 만들었던 사람들, 만들고자 했던 젊은 국회의원들은 오히려 빨갱이로 몰려 버렸습니다.

◆ 방학진> 네, 그렇습니다. 백민태라고 나오는데요. 청부 암살업자 아니겠습니까? 백민태를 경찰이 매수를 해서 명단을 주죠. 살해해야 할 15명의 명단을 주는데, 그중에서 신익희도 들어 있고요. 상당히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정치인들, 그리고 친일파 청산을 위해서 반민특위법을 지지했던 많은 분들, 15명의 리스트를 줬는데, 백민태가 너무나 큰 명단들이 많기 때문에 아무리 자기가 돈을 받고 청부 살인업자라도 도저히 그렇게는 못하겠다, 자수를 해버리는데, 결과적으로 법에서는 어떻게 됐느냐. 살인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라고 해서 무죄가 됩니다. 사주한 사람도 당연히 무죄가 된 것이고요. 그다음에 국회 프락치 사건은 이듬해 6월 중순에 이루어지는데, 바로 반민특위법을 만들었던 소장파. 김홍진, 이런 소장파, 이런 의원들을 쉽게 말하면 김일성의 프락치가 우리나라 국회에 들어 와있기 때문에 이사람들이 반민법을 만든 것이다, 라고 해서 13명을 역시 잡아가게 되는 것이죠.

◇ 이동형> 국회 내에도 간첩이 있다, 이 말이죠?

◆ 방학진> 그렇습니다.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화룡점정이 되겠죠.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6월 26일 날 백범 김구를 암살함으로써 더 이상 6월 26일 이후에는 이 땅에서 친일파 청산을 이야기할 수 있는 정치 세력이 사라진 날이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 이동형> 네, 그 이후에 군사 독재가 이어졌기 때문에. 알겠습니다. 반민특위 이야기는 사실은 저희가 20분, 이렇게 해서 끝날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오늘 시간이 없어서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12편, 오늘은 반민특위와 미완의 과제로 남은 친일파 청산에 대한 이야기해봤습니다. 도움 말씀 주신 분,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기획실장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방학진> 고맙습니다.

YTN 라디오 

☞기사원문: 100년의 기억, 전달자들 11편 “친일파 처벌 ‘0’, 반민족행위자들의 든든한 ‘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