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거대한 뿌리

절로 옷깃을 여미었습니다. 저절로 무릎을 꿇고 큰 절을 올리고 싶어졌습니다. 에 이미 ‘개벽’의 용례가 아흔 두 번이나 나온다는 사실에 만시지탄이 새어나옵니다. 18세기 영조기에는 무려 19차례나 보인다니 연거푸 이마를 찧게 됩니다. 19세기의 유레카 ‘다시 개벽’의 거대한 뿌리를 때늦게 확인케 된 것입니다. 홀연 지난 반 천년이 투명하게 맑아져옵니다. 돌연 개벽사상의 무르익음으로 이 땅의 역사가 밝아져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방향 감각 또한 또렷해집니다. 역시나 졸가리를 바로 세우고 맥을 정확하게 짚어야 다음 길이 열립니다. “개벽으로 본 실학사”라니 탁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에서 탐구하셨던 ‘실학에서 동학으로’라는 테제보다 훨씬 더 원숙한 발상을 제출하신 것 같습니다. 이만하면 우리 두 사람의 연재가 “선언”에 값하는 내실을 갖추어 가고 있다고 자평합니다.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묻어갑니다. 얻어갑니다. 유쾌하고 통쾌한 기분으로 대미를 향해 달려갑니다.

실로 20세기의 실학 담론은 뒤틀린 열등감의 발로였습니다. 어거지로 우격다짐으로 개화의 단서를 채굴해내는 내재적 발전론으로 기울었습니다. 조급하였기에 조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기에 조선후기 실학에 이미 여실했었던 개벽적 요소가 미처 눈에 들지 못했습니다. 아니 눈에 띄었다고 해도 질끈 감고 외면했을 것입니다. 개벽은 축출하고 개화만 추출하는 작위적 공정을 통하여 실학의 허상을 빚어 세운 것입니다. 허수아비 허깨비의 헛실학론입니다. 실학 2.0, 이제야 제대로 된 참실학론이 기지개를 켭니다.

실학과 개벽을 결부시킴으로써 마침내 내발론과 외발론의 강박 또한 떨쳐낼 수가 있습니다. 나라의 안과 밖으로 장벽을 쌓을 까닭이 터럭만큼도 없습니다. 안팎이 삼투하여 신진대사를 멈추지 않아야 물질생활도 정신생활도 지속할 수 있습니다. 도리어 서학과 동학은 포스트-유학을 궁리하고 탐색하는 새로운 문명운동이라는 차원에서 속 깊이 상통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18세기 서학의 전사(前史)가 있었기에 19세기 동학의 후사(後事)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즉슨 동학은 서학의 반대말이 아닙니다. 서학을 때리지 않고 보듬어 안아 동학으로 거듭났습니다. 이미 19세기의 다시 개벽부터가 내/외가 합작한 창발적 사건이자, 동/서가 회통한 대합장/대합창의 결실이었던 것입니다. 고로 개벽파를 척사파와 개화파의 동렬로 간주하기도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셋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양자의 대결 구도를 넘어서 새로운 지평을 펼쳐내는 일대 도약이었던 것입니다. 척사파의 명분론과 개화파의 변혁론을 모두 함장하였다는 점에서 개벽파는 독창적이고 독보적이었습니다. 지상의 보/혁 갈등을 훌쩍 돌파하는 드높은 하늘로의 비상이었습니다.

그 19세기의 득의가 20세기에는 두 번의 선언으로 분출합니다. 첫 번째가 1919년 기미독립선언이요, 두 번째가 1989년 한살림선언입니다. 20세기 한국사상사가 산출한 거대한 양대 산맥이라 하겠습니다. 2019년 올해는 독립선언 100주년이자 한살림선언 30주년이기도 합니다. 공교롭기보다는 인과 연의 여여한 응보인지 모르겠습니다. 은 명명백백 지난 백년의 쌍벽을 이루는 양대 선언의 계승과 심화를 자처합니다.

그 1919년 3월 1일 ‘개벽절’과 2019년 ‘개벽파 선언’ 사이, 개벽꾼의 회생과 환생에 1989년의 원주라는 독특한 시공간이 자리했습니다. 20세기 척사파 NL과 20세기 개화파 PD와는 다른 차원의 민주화 대서사를 그려내고 있던 개벽파의 성소였습니다. 시공간만으로는 충분치 못합니다. 인간이 화룡점정을 찍어 삼합을 이루어야 비로소 천지인의 조화가 완성됩니다. 서학을 잇는 지학순과 동학을 계승하는 장일순이 원주에서 조우하게 됩니다. 학순이와 일순이. 지구적인 만남이자, 우주적인 인연이었습니다.


장일순

 

 

2. 세기의 도반(道伴)


장일순 평전

올해는 무위당 25주기이기도 했습니다. 장일순의 일생을 묘파한 문장은 역시 김지하의 그것입니다. “하는 일 없이 안 하는 일 없으시고, 달통하여 늘 한가하시며, 엎드려 머리 숙여 밑으로 밑으로만 기시어, 드디어는 한 포기 산 속 난초가 되신 선생님”

그 선생님에게도 미숙하고 미욱한 때가 있었을 터이니, 세상을 향해 평균 4만개의 질문을 던진다는 2세부터 5세까지 장일순의 아동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는 할아버지였다고 합니다. 일찍이 천주교로 개종한 개화파 집안의 후손으로 일순은 중학생 때 세례를 받고 서울로 유학하여 배제중고등학교에서 공부합니다. ‘개화학당’의 상징으로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의 후신에서 수학한 것입니다. 가학도 소학도 온통 개화에 치중되었을 법하건만, 생각의 균형이 달성된 바탕에는 할아버지의 친구이자 독립운동가인 박기정에게 한문과 서예를 배운 점이 컸다고 하겠습니다. 척사를 견지하며 항일운동에 투신했던 ‘거대한 뿌리’로서 동방고전의 세계에도 한 발을 걸쳐 있었던 것입니다. 개화와 척사, 양자의 극단에 휩쓸리지 않음으로써 노자를 재발견하고 해월을 재발굴하여 개벽파로 진화하는 청년기와 장년기의 토대가 소싯적에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요즘 부쩍 벽청(개벽하는 청년)과 더불어 그들보다 더욱 어린 벽동(개벽하는 아동) 운동에까지 관심이 솟아 주의를 쏟고 있는 까닭이기도 합니다.

그러함에도 혼자만으로는 여의치 않았을지 모릅니다. 동년배의 동지, 귀인이 찾아옵니다. 지학순이 원주로 발령 난 해가 1965년입니다. 당시 나이 44세, 서른 일곱의 일순보다 7살이 위였습니다. 저와 조성환 선생님 사이의 차이쯤 되겠습니다. 학순이 하늘나라로 돌아간 해가 1993년이고, 일순은 1994년에 무위자연으로 흩어졌으니 두 사람이 일구어간 30년 세월을 음미하노라면 ‘세기의 도반’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성 싶습니다.


지학순

초대 원주교구장으로 원동성당에 입성한 젊은 신부 지학순은 ‘빛이 되어라!’를 사목의 지침으로 삼았습니다. 학순 또한 이미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으니 천주교를 현대적으로 ‘개벽’하기 위한 제2차 바티칸 공회의의 노선에 충실한 성직자였습니다. 학순이 바티칸으로 상징되는 서방과 글로벌을 담보했다면, 길벗 일순은 동방 고전과 로컬을 담지해 두었다는 점도 절묘한 구석입니다. 양자가 의기투합함으로써 19세기의 동학은 근대문명 이후를 전망하는 동서회통의 지구학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동녘 하늘과 서쪽 하늘이 합류하여 하나의 하늘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195-60년대, 교육사업과 지역정치에서 고투를 거듭하던 일순은 학순과 조우함으로써 비로소 원주를 민주화의 성지로 전변시키게 됩니다. 학순이 세우고 일순이 조력한 가톨릭센터는 민주화운동의 요람이었습니다. 꾸르실료 교육을 발진시킨 장본인 또한 두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꾸르실료 교육을 받은 원주의 청년들이 협동조합운동과 지역사회운동의 리더로 성장해갔습니다. 김지하와 김민기 등 이제는 ‘레전드’가 된 당대의 힙한 청년들(벽청의 전신?)까지 속속 합류하면서 원주는 박정희 시대의 해방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장일순과 김민기와 김지하

세속의 변혁은 교회의 변화와도 긴밀했습니다. ‘교조적 근대화’라 할법한 정교분리의 도그마에서 탈피하여 성속합작으로의 회심을 가장 먼저 실천한 곳이 원주입니다. 교회와 사회를 공진화시켰습니다. 성당과 학당을 상호진화시켰습니다. 기도하고 학습하며 실천했습니다. 사제와 평신도를 차별하지 않는 평신도 중심의 교회를 구현해 갔습니다. 교회의 민주화로부터 지역의 민주화, 나아가 국가의 민주화까지 잔물결이 일파만파 파도를 일으킨 것입니다. 교회일치운동 또한 인상적입니다. 기독교 목사가 성당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천주교 신부가 개신교 교회에서 강론을 펼쳤습니다. 스님이 성당에 와서 법설을 풀기도 했습니다. 사찰을 찾는 신부와 목사도 적지 않았습니다. 지난 글에서 소개해주신 “하늘학회”의 먼 전신이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입니다. 한 달에 한 차례 종교간 벽을 허무는 지역 모임을 주도한 이 또한 학순과 일순이었습니다. 그 원주에서의 선행학습을 발판으로 1974년에 출범한 조직이 바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라 하겠습니다. 원동성당에서 발족하여 명동성당까지 감화시킨 것입니다. 주변에서 중심으로, 지역에서 서울로 파급을 미쳤습니다. 서슬 퍼런 유신체제에 슬슬 균열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무위당의 득의는 1979년 박정희의 비극에 앞서 일찍이 회심했다는 점입니다. ‘조국 근대화’, 산업화의 열풍에 휩쓸리지도 않았으나, 그 반대편의 독재 타도, 민주화만으로는 충분치 못함을 자각한 것이 1977년이라 합니다. 문명의 재건을 골똘히 탐색합니다. 동학의 회생에 인생의 후반전을 전념하고 전력했던 까닭입니다. 일백년 전 해월은 무위당과 만남으로써 비로소 ‘거룩한 스승’이라는 정명을 얻게 됩니다. 해월의 삼경철학에 기초하여 무위당은 생명사상을 만개시켜 갑니다. 일국적 민주화운동의 지평을 돌파하는 티핑 포인트였습니다. 지구적이고 우주적인 차원에서의 신문명건설운동으로 점핑한 것입니다.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의 삼경설은 일찍이 세계 어느 사상가나 철학자도 내세운 바 없는 고유하고도 독창적인 사상이노라 극찬하셨습니다. 하늘만 섬긴 시대를 중세라 일컫습니다. 인간만 모신 시대가 근대라 하겠습니다.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의 고대에는 동식물과 광물을 섬겼습니다. 하늘과 사람과 사물, 만물을 함께 모시고 기르고 살리는 삼경사상은 천지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용의 결정판이었던 것입니다. 인류와 지구를 구원할 수 있는 생명사상의 정수라고 여겼습니다. 그 절차탁마의 제련 끝에서 1989년 선포된 것이 바로 한살림선언입니다. 독재타도의 깃발 아래 단일대오를 형성하였으나, 내부적으로는 패권 다툼에 여념이 없었던 NL과 PD의 악다구니 속에서 모든 이와 모든 것을 품어 안는 새로운 지평, 생명의 지평을 열어젖힌 것입니다.


해월과 무위당

 

3. 궁궁의 그물망

저에게 20세기 후반 한국을 대표하는 문헌 하나를 꼽으라면 잠시의 주저도 없이 을 꼽을 것입니다. 한울님의 각성으로부터 한살림 선언까지 꼬박 두 갑자, 120년이 필요했습니다. 1860년 동학의 탄생부터가 동서가 전면적으로 교류하는 지구사적 사건이었던 고로, 1989년 한살림선언 또한 한국이라는 울타리 안에 가두어두기에는 애석하다 하겠습니다. 20세기 후반에 나온 전 세계의 문건 가운데서도 한 손에 꼽히는 위대한 선언이었노라 자랑스럽습니다.


한살림 선언 표지

집필 과정부터가 그러했습니다. 당대의 신과학을 섭렵하고 냉전이 끝나가는 세계사의 변화를 착목하여 동학에 바탕한 고유한 사상까지 장착시킨 동서고금을 망라한 회통과 달통의 전범을 보인 것입니다. 하기에 30주년을 맞이하여 한살림에서 마련한 다시 읽기 모임에도 기꺼이 참석했습니다. 소속을 기입하는 곳에는 개벽학당을 적었습니다. 올해를 기점으로 저의 제1 정체성 또한 개벽학당의 당장으로 바뀐 탓입니다. 한살림선언 다시 읽기 모임을 주도하고 있는 주요섭 선생님을 학당으로 직접 모셔 세미나를 열기도 했습니다. 기왕 다시 읽는다면 밀레니얼 세대, 벽청들과 함께 읽는 편이 훨씬 더 생산적이고 창조적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은근한 욕심도 없지 않았습니다. 새별 조성환 선생님에게는 최치원부터 최시형까지 일천년 한국사상사의 골자를 배웠습니다. 저와는 인류세와 라이프 3.0, 인공지능 등 최신과학 담론의 골수도 공부했습니다. 서울대학교와 카이스트, 어느 곳에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은 한 학기를 보내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 벽청들이 30년 전 한살림선언을 갱신하고 쇄신하고 혁신시켜 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속으로 품었습니다. 다시 읽기란 결국 ‘술’(述)에 그치기 때문입니다. 30년 전 그 선배들처럼 당대의 최신과학과 5G 기술패권경쟁으로 치닫고 있는 현재의 세계사적 전환과 한국의 고유한 사상 전통을 결합하여 ‘한살림선언 2.0’에 방불하는 개작(改作)을 해주길 원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30년 축적된 물질개벽의 성과는 20세기 쌍팔년도와는 비견이 안될 만큼 휘황하기 때문입니다. 덜 것은 덜어내고 보탤 것은 덧붙여서 “다시 한살림”을 술이창작(述而創作) 하는데 일조해 보고 싶었습니다. “무궁한 그 이치를 무궁히 살펴내면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 아닌가”라는 수운의 주체론을 Life 3.0 시대의 존재론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인류세를 개벽세로 전변시키는 주문이자 주술로 업데이트 시켜주길 바랬던 것입니다.

제가 보건대 30년 전 선언의 가장 큰 약점은 3장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소제목이 입니다. 기계와 생명의 대비를 구구절절 이어가고 있습니다. 기계문명과 생명문명을 물과 기름처럼 나누고 만리장성을 쌓아두었습니다. 낡은 발상입니다. 수긍하기 어려운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아니 많습니다. 트랜스휴먼, 인간과 기계는 이미 합성물이 되고 있습니다. 사피엔스와 사이보그의 경계가 나날이 흐릿해지고 있습니다. 수정과 교정으로 수습될 차원이 아닙니다. 전면 개정판이 요청되는 시점입니다.

다시 1989년을 복기해 봅니다. 동서이념대결을 상징하던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해입니다. 그 하나 된 지구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문명사적 획기가 있었으니, 바로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이 발진한 해가 바로 1989년입니다. 태평양 동쪽 아메리카에서 발신한 “www”와 유라시아의 동쪽 한국에서 발원한 한살림은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구석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월드와이드웹을 통하여 천지인은 비로소 전면적으로 묶이고 엮이고 갈마드는 초연결망 생태계, 한살림 지구로 진화해가기 때문입니다. 축(Axis)의 시대에서 망(網)의 시대로 진화함으로써 비로소 무극대도를 온 천하에 펼쳐볼 적기가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당장 자동차부터 더 이상 기계가 아닙니다. 자동에 자율을 얹혀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도로상태만이 아니라 기후상태까지 지상과 천상을 아울러 사유하게 됩니다. 자율차 뿐이겠습니까. 기차와 배, 비행기 등 모든 모빌리티 수단은 죄다 인공지능을 탑재하여 인간의 이성을 능가하는 역량을 발휘할 시기가 10년 안쪽으로 열립니다. 정착해서 살아가는 집부터 이동할 때 활용하는 교통수단까지 사람이 살아가는 시공간 전체가 인간과 실시간으로 전 지구적으로 피드백을 주고받는 신세기와 신세계가 곧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일순부터 일생까지 천지인은 숙명처럼 연결되고 결합하게 됩니다. 고로 이미 생명이 아닌 존재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미물은 물론이요 철물과 폐물까지 알고리즘을 장착하여 나름의 ‘진화’를 수행하게 됩니다. 만인과 만물이 공진화하는 천지공사(天地公事)의 후천개벽이 리얼한 세계에서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웃나라 중국에서 400조를 쏟아 부어 만들고자 하는 슝안(雄安)신구는 말 그대로 유기체처럼 “살아 숨쉬는” 지혜도시로 디자인했습니다. 당헌에 ‘생태문명건설’을 삽입한 세계 최대의 정치집단인 중국공산당이 한살림선언의 사상을 실천해보고자 전력투구 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바로 지난해 세계 자본가들의 아성이라고 할 수 있는 다보스포럼에서도 “생물학적 세기”(Biological Century)를 선포했습니다. 생태와 생명이 도처에서 모두의 화두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함에도 여전히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가 보/혁으로 갈리어 죽기살기로 다투는 한국의 작금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너 죽고 나 살자는 ‘적폐 청산’이라는 적폐를 30년째 돌림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도 살고 나도 살며 만인과 만물을 함께 살리는 모두살림 한살림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다시금 술이 아니라 작이 관건입니다. 한살림선언을 다시 쓰는 것만으로도 충분치 못합니다. 선언은 어디까지나 다짐이고 새김일 뿐입니다. 종이 위에서야 뭔들 허풍을 떨지 못하겠습니까. 과 이 갈라지는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도 생각합니다. 19세기의 은 20세기에 실제 시험하고 실험해 보았습니다.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고 평하겠습니다. 허나 20세기의 은 정작 한국 땅에서조차 온전히 시도해 보지 못했습니다. 생협의 성공만으로는 미진합니다. 한살림나라에 도전해 보아야 했습니다. 문명론은 탁월한데 견주어 국가론과 정치론은 어쩐지 부족하고 소략합니다. 30주년을 맞이하여 장차 한 살림의 방향을 ‘마음살림’에 두었다는 방침에 저는 솔직히 맥이 탁 풀렸습니다. 나라살림을 책임져 보겠다는 호연지기가 좀체 발휘되지 못하는 점이 두고두고 아쉽습니다. 기상이 모자라고 기백이 떨어집니다. 언제까지 19세기형 산업사회에 기초한 좌/우 세력들에게 나라를 맡겨두어야 하는지 안타깝습니다. 정녕 정치개벽 없이 문명전환이 가능할 리 만무합니다. 나라가 너무 크고 멀다면 한살림의 고향 원주만이라도 “살림도시”로 만들어보자는 포부라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조선은 500년 유학국가였습니다. 20세기 지난 백년의 절반은 식민지요 나머지 절반은 남북으로 갈리어 북은 척사파 국가요, 남은 개화파 국가가 되었습니다. 통일은 응당 좌/우와 보/혁의 이데올로기 통합이 아닐 것입니다. 좌/우를 나누었던 19세기형 산업문명을 넘어서는 신문명창조와 긴밀히 결부될 것입니다. 하여 제4차산업혁명도 정명이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차라리 제1차 디지털혁명이 합당합니다. 오프라인에 온라인이 결합됨으로써 전례가 없던 디지털 신대륙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에 부응하는 다른 100년과 새로운 500년을 준비하는 원대하고 웅대한 비전이 절실합니다. 기왕의 산업화와 민주화세대로는 어림도 없는 문명사적 과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2019년을 기점으로 개벽파를 선언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겠습니다. 원주의 하늘도시와 익산의 개벽도시와 영월의 신문명도시와 세종의 묘를 모시고 있는 여주의 한글도시, 전주의 동학도시 등등이 촘촘히 묶이고 엮여서 만들어가는 네트워크 국가, 하늘나라 동학국가를 상상해 봅니다. 상상이 사상을 추동하고 일상을 고무합니다. 생명을 생각하는 생활이 최상의 생산수단으로 전변합니다. 생명과 생각과 생활과 생산이 선순환하는 디지털/글로벌 한살림 운동으로 궁궁(弓弓)의 그물망(www)을 그려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마지막 글 한 편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저 나름으로 다음 100년, 새로운 500년을 준비하는 30년 프로젝트의 청사진을 밝히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으려고 합니다. 메아리마저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개벽의 상두소리를 계속 들려주시기를 곡진하게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