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쓴 조선사상사

지난번에 보내주신 「뜻으로 본 서학사」는 실로 21세기에 걸맞은 조선사상사의 신지형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서구적 ‘실학’이나 중국적 ‘리기’(주리-주기)와 같은 20세기적 주술에서 벗어나서, 지구적 관점에서 우리 자신을 조망하는 새로운 ‘눈’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17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한국사상사의 흐름을 서학의 수용(이익)과 북학의 흡수(홍대용), 그리고 기학의 탄생(최한기)과 동학의 부활(장일순)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하는 안목은 과연 유라시아 100개국을 견문한 개벽학자가 아니고서야 감히 생각할 수 없는 발상입니다.

그래서인지 마치 자기 이야기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선생님 자신이 지구학과 미래학과 회통학으로서의 개벽학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사상사의 동서융합적인 흐름을 포착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바로 이런 관점이야말로 제가 지향하는 한국학의 새로운 방향에 다름 아닙니다. 국수주의나 사대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서 세계사적 관점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인식 틀을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 번 편지는 『한국사』 교과서를 쓰시는 현장의 선생님들, 교수님들이 반드시 참고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개벽으로 본 서학사

성호 이익, 담헌 홍대용, 다산 정약용, 혜강 최한기, 이들의 공통점은 물질개벽의 도래를 감지하고, 유교적 화이관을 탈피했으며, 서양의 종교와 과학을 적극 수용하여 동서융합의 지구학을 지향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최제우의 ‘다시개벽’이나 최시형의 ‘후천개벽’은 이런 흐름을 망라한 시대적 ‘화두’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 지구적 화두를 강증산과 박중빈과 장일순과 오늘의 우리가 잇고 있는 것이고요. 그래서 선생님이 말씀하신 ‘뜻’이란 ‘개벽의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때의 ‘개벽’이란 자각과 각성, 그리고 융합과 회통을 의미합니다. “주체적 자각에서 비롯된 동서 회통”이라는 의미에서의 개벽입니다. 그래서 “뜻으로 본 서학사”는 달리 말하면 “개벽으로 본 서학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개벽’의 눈이 특히나 빛났던 대목은 “내 마음을 하늘같이 내 기운을 하늘같이”라는 천도교 사상을 “천주와 천하의 대화 속에서 천도의 득의가 발로”한 것으로 파악한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천주를 서학으로, 천하를 유학으로, 그리고 천도를 천학으로 치환시켜 보면, 동학(천도교)의 위치를 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이런 성격의 천학(天學)이야말로 한국적 개벽을 가능하게 한 사상적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서로 다른 사상들을 가능한 한 배제하지 않고 포함시키고 회통시키며 융합시키려는 성향이 한국인의 ‘하늘지향성’이고, 이런 지향성을 학문적으로 표현한 것이 제가 말하는 천학이며, 동학은 그 천학적 경향이 최초로 체계화되어 ‘천도’의 형태로 드러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의적 천인공화

그런데 이런 융합과 회통의 관점에서 공공과 공화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면, 천인공공이나 천인공화에 대한 중의적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서로 전통이 ‘다른’ 하늘과 인간 사이의 공공 내지는 공화라는 의미로도 천인공공과 천인공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정약용의 기독유학은 유학적 성인[人] 개념 위에서 서학적 천주[天] 관념을 수용했다고 할 수 있는데, 양자의 융합이야말로 서학의 천(天)과 유학의 인(人)이 함께 한다는 의미에서의 ‘천인공화’ 내지는 ‘천인공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늘과 인간의 공화라는 본래적인 의미에다, ‘상이한’ 하늘과 인간의 공화라는 새로운 의미가 추가되는 것입니다.


캐빈 콜리

이런 의미로 천인공화를 이해하면, 동학의 등장도 “서학의 천주와 유학의 성인을 공화하는 과정에서 발현된 새로운 천인공화로서의 천도/천학”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늘과 인간이 함께 하는 것이 천인공화인데, 동학의 경우에는 서양의 하늘과 중국의 성인을 공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인간의 새로운 공화”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야말로 정약용의 동서융합과의 차이로, 상제유학(김형효)이나 기독유학(캐빈 콜리)이 기존의 성인과 기존의 천주의 융합이었다고 한다면, 최제우나 최시형의 경우에는 새로운 인간(天人)과 새로운 하늘(人天)을 탄생시켜서 양자를 새롭게 공화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을 정리해보면, 조선왕조실록에서의 천인공공이 한반도나 동아시아라는 하늘 안에서의 “하늘과 인간의 상호 협력”이었다고 한다면, 서학을 만난 이후로는 하늘의 범위가 서양의 하늘까지 포함하는 천인공공으로 확장되고, 이렇게 공공의 범위와 대상을 끊임없이 확장하는 행위가 바로 ‘하늘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늘한다’는 ‘공공한다’의 다른 말로 볼 수 있고, 이 때의 공공의 대상은 인식 가능한 세계 전체에 해당되는데, 서학의 등장으로 세계가 넓어진 이상 이 미지의 세계까지 ‘포함’하는 새로운 하늘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저는 이런 경향과 지향을 상징하는 말이 한국의 ‘하늘’ 관념이자 천도교의 ‘하늘한다’라고 생각합니다. 천학은 이러한 경향과 지향을 총칭하는 학문적 개념이고요.

 

천인상여와 천인개벽

지난번 편지에서 “천인공공(『실록』)에서 천인공화(천도교)로의 전개”에 크게 공감해 주신 것은, 이런 흐름이 선생님이 지향하시는 ‘성속합작’의 세계관과 잘 부합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실록의 천인공공과 천도교의 천인공화 사이에는 ‘천인개벽’이라는 커다란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천인관계 자체가 개벽되고 있는 것입니다. 개벽종교의 개벽성은 성속합작과 천인공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데에도 있는데, 동학의 천인상여와 증산교의 신인합발이 그것입니다. 해월 최시형은 이 세계는 “하늘과 인간이 서로 함께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천인상여(天人相與)라고 하였고, 증산교에서 말하는 신인합발(神人合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최시형이 “사람이 하늘이고(人是天) 하늘이 사람이다(天是人)”라고 한 것도 천인상여적 천인관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법설의 의미를 “사람은 하늘처럼 존귀한 존재이고 하늘은 사람처럼 살아있는 존재이다”라고 이해하면, 결국 “사람도 하늘과 함께 할 수 있는 존재이고 하늘도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존재이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는 성리학적 세계관에 짓눌려서 간헐적으로 또는 소극적으로 표현되어 왔던 천인공공 사상이 동학에 이르러 전면적으로 그리고 보다 적극적인 형태로 부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시형의 천인상여는 “하늘과 인간이 함께 세상을 개벽한다”는 의미에서의 천인개벽이라고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종래의 천인관을 개벽했다는 의미에서의 천인개벽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하늘과 인간이 공화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 것입니다. 그 방식은 보다 역동적이고 훨씬 협력적인, 새로운 형태의 천인공화입니다.

이러한 천인상여적 천인관(天人觀)은 중국철학사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중국철학은 노자식으로 말하면, 기본적으로 “사람이 하늘을 본 받는다”는 인법천(人法天)적 천인관이 지배적입니다. 하늘은 인간 행위의 궁극적 규범이자 절대적 표준으로 여겨지고 있고, 그런 의미에서 가치의 중심으로 자리매김되고 있지, 인간과 협력하는 동반자로는 설정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중국철학에서의 天(천)은, 우리가 생각하는 하늘 그 자체를 말하기보다는, 도(道)로 해석된 하늘, 즉 천도(天道)를 가리킨다는 중국적 사상풍토가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중국사상은 기본적으로 천학(天學)이라기보다는 도학(道學)이라고 생각합니다.

 

퇴계와 지봉의 천학

동학에서와 같은 새로운 형태의 천인공화론이 가능해지려면 무엇보다도 ‘천’이 활동하고 살아있어야 합니다. 동학에서 “하늘을 모시고 기른다”고 하듯이 살아있는 하늘이어야 합니다. 이런 하늘관의 단초는 이미 조선성리학에 배태되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퇴계 이황(1501~1570)의 ‘활리’나 ‘상제’ 관념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퇴계는 “내가 리를 궁구하면 리가 나에게 다가온다”고 하는 획기적인 리도설(理到說)을 제창하면서, ‘리’는 결코 죽어있는 사물(死物)이 아니라는 독자적인 활리론(活理論. 이상정)을 제시했습니다. 리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성리학의 역사에서는 하나의 개벽과도 같은 사건입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곳에서는 ‘리’를 ‘상제’(하늘님)이라고도 바꿔 말하면서, “리는 있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상제로부터 잠시도 떠날 수 없다”(上帝之不可須臾離也. 『이자수어』「궁격」)라고까지 했습니다. 리를 상제와 등치시킴으로써 동학에서와 같은 “사사천(事事天), 물물천(物物天)”적 세계관을 예시한 것입니다. 나아가서 사리(死理)에서 활리(活理)로 전환시킴으로써 동학에서와 같은 ‘살아있는 하늘’의 단초도 열리게 되었습니다.

퇴계의 이러한 하늘관은 서양문물을 처음 소개한 실학자로 알려져 있는 지봉 이수광(1563~1629)에게서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무실론」이라는 상소문에서 그는 “리가 있는 곳은 하늘이 있는 곳입니다”(理之所在, 天之所在也) “사사물물 중에서 하늘과 관계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事事物物, 無一不係於天)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동학에서 “만물이 하늘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연상시킵니다. 최시형은 만물 안에 깃들여 있는 우주적 생명력을 ‘하늘’이라고 하고, 그 살아있는 하늘을 먹음으로써 인간은 살아간다고 하는 천인상여적 천인관을 제창했는데, 이러한 천인관은 일찍이 만물에서 하늘을 찾고자 한 조선의 천학적 전통 위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실학시대의 개벽론


한국학으로서의 원불교(류병덕)

개벽은 이러한 천학의 전통에서 발현된 세계관입니다. 천인이 상여(相與)하고 상의(相依)하는 차원에서 열리는 새로운 세계가 개벽이기 때문입니다. 서구적 혁명이 인간 세계의 영역이라면, 한국의 개벽은 하늘과 인간과 만물이 함께 하는 차원입니다. 인간이 하늘을 본받아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천지인이 함께 공공하는 것이 개벽입니다. 그 개벽의 조짐이, 선생님의 「뜻으로 본 서학사」에 의하면, 이미 조선후기 실학시대에 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조선왕조실록에는 ‘개벽’의 용례가 전부 92번이나 나오고 있는데, 이중 가장 많은 시기가 영조로, 무려 19차례나 보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부터는 하나의 개벽(開闢)이다. 지난 습성을 버리고 다 같이 협력하여 … 후손을 영원히 보존하고 영명(永命)을 이어가도록 하라. 신령은 어디든 오가고 천신(天神)과 지기(地祇)는 환하게 보고 있으니, 각자 마음에 새겨 널리 알림에 어김이 없도록 하여라.”(『영조실록』 13년(1737) 8월 28일)

여기에서 ‘개벽’은 당파를 나누어 싸우던 과거의 나에서 새로운 나로의 탈바꿈, 거듭남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에는 ‘하늘’의 역할도 강조되고 있습니다. 물론 동학에서와 같이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활동하는 하늘’이라기보다는 저 높은 곳에서 ‘굽어보는 하늘’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여기에서 하늘의 성격이 감시에서 협력으로 뒤바뀌고, 개벽의 대상이 당파에서 문명으로 확장되면, 최제우의 ‘다시 개벽’이 되겠지요.


류병덕의 원불교실학론

종래의 실학 담론은 조선후기 사상사에서 서구적 개화의 단초를 찾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의 실학론은 한국적 개벽의 실마리를 찾는 작업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원불교의 제2대 리더인 정산 송규는 원불교를 ‘실천 실학’이라고 하였고, 이것을 받아서 원불교학자 여산 류병덕은 ‘원불교실학론’을 제창했습니다. 원불교라는 개벽학을 실학의 전개과정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조선후기 실학 안에 이미 개벽적 요소가 함장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 또한 “개벽으로 본 실학사”라는 새로운 과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늘학회의 출범


하늘학회(1)

마지막으로 최근에 제가 쓴 「하늘론」을 하나 소개하면서 이번 서신을 마치고자 합니다. 지난 5월 17일에 서강대학교에서 ‘하늘학회’(가칭) 창립 준비모임이 있었습니다. 하늘학회는 ‘하늘학’(天學)을 정립하기 위해 모인 종교연구자들의 모임입니다. 1년 전부터 동학 텍스트를 강독하는 공부모임으로 시작되었는데, 마침내 학회의 창립까지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 멤버는 서강대학교 신학대학원장이신 김용해 신부님을 비롯해서 손원영 목사님, 김용한 전도사님, 천도교 연구자 정혜정 교수님, 천도교인이신 모시는사람들의 박길수 대표님, 퇴계학 연구자인 이원진 박사님, 법학자인 황치연 교수님 등입니다. 모두의 공통 관심은 동학이지만 각자의 종교는 다 다릅니다.

저는 원불교 연구자를 대표해서 참석하고 있는데, 이날 준비모임을 위해서 간단한 「취지문」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선생님은 아쉽게도 다른 일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셨는데, 제가 쓴 취지문을 공유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고자 합니다. 그럼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새로운 하늘을 찾아서

오늘날 한국사회는 길을 잃고 방황하는 난파선을 연상시킨다. 지난 1세기 동안 매진해온 서구적 근대화가 암초에 부딪혀 갈 길을 못 찾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19세기 말에 중국이라는 세계관의 붕괴로 인해 조선인들이 갈 곳을 모르고 갈팡질팡했던 경험과 유사하다. 그 절대 절명의 순간에 동학이라는 자생적 사상이 탄생했듯이, 다시 한 번 그 창조적 작업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립과 갈등, 실망과 방황은 하나같이 서구화를 모델로 한 식민화(일제강점기)-산업화(경제개발기)-민주화(시민운동기) 과정에서 빚어진 남북분단, 좌우대립, 빈부격차, 상호불신, 이기주의의 산물에 다름 아니다. 그 사이에서 사회적 약자인 청년들은 절망하고 여성들은 분노하며 노인들은 방황하고 있다. 상호간의 신뢰가 바닥에 떨어지고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해 막대한 사회적 비용과 감정의 소비를 지불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하늘’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서구화와 근대화를 넘어서고 산업화와 민주화를 대신하는 새로운 가치를 찾아서 서로의 지혜를 모으기 위해서이다. 100년 전에 이 땅의 종교인들이 자유와 독립이라는 공통가치를 위해 한자리에 모였듯이, 오늘 우리는 21세기 한국의 공통가치를 모색하기 위해 다시 모인 것이다.

전통적으로 ‘하늘’은 한국인들의 경건성과 포용성, 평등성과 주체성, 역동성과 예술성을 상징하는 핵심가치였다. 고대 부족국가의 제천행사에서 시작하여, 삼국유사의 단군신화를 거쳐, 동학의 인내천에 이르기까지 하늘은 언제나 우리를 한데 모으고 상승시키는 가치의 중심이었다. 우리는 이 잊혀진 기억을 복원시키고 망각된 역사를 회복시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고자 한다. 전통을 살리고 근대를 되찾아 새로운 미래를 열고자 한다.


하늘학회(2)

하늘학회는 한국종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21세기에 필요한 새로운 인간관•세계관•가치관을 자생적으로 만들기 위해 결성된 모임이다. 150년 전의 다산 정약용, 혜강 최한기, 수운 최제우가 유학과 서학의 융합을 꾀하면서 기학과 천학을 제창했듯이, 이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한국학을 모색하기 위해 각 분야의 한국학자들이 모인 것이다. 잊혀진 우리의 사상자원을 재발굴하고 새로운 현대사상을 재해석하여, 우리 실정에 맞는 한국학을 정립하기 위해서이다. 근현대 한국사상의 텍스트를 자생적‧자주적‧자각적 근대의 관점에서 다시 읽고, 그 성과를 연구서와 학술발표의 형태로 공개하여, 한국사회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도덕과 미래적 가치를 체계적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부디 우리의 작은 몸짓이 한국학과 지구학의 새 길을 여는 돌파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