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역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독립운동가 약산 김원봉 선생(1898~1958)은 가장 뜨겁게 재조명되고 있는 인물이다. MBC에서는 김원봉 선생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라는 드라마까지 방영 중이다.
약산에 대한 열기가 처음은 아니다. 이미 지난 2015년 개봉한 영화 에서 배우 조승우가 연기한 김원봉 선생은 짧은 등장에도 “나 밀양 사람 김원봉이오”라는 대사와 함께 깊은 인상을 남겼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야당 당 대표 시절이었던 당시 에 등장한 김원봉 선생을 언급하면서 “광복 70주년을 맞아 약산 김원봉 선생에게 마음속으로나마 최고급의 독립유공자 훈장을 달아드리고, 술 한 잔 바치고 싶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남기기도 했다.
약산은 누구보다 일제와 치열하게 싸웠다. 일제 정보기관은 약산과 의열단을 이렇게 기록했다. “재중국 한인 독립운동자들은 거의 전부가 의열단원인 것 같지만 또 일면으로 보면 김원봉 1인의 의열단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요컨대 의열단이란 김원봉이란 인물을 중심으로 기약하지 않고 모인 죽음을 무릅쓰는 불평배의 집합단체다. 진상을 아는 자는 단장 김원봉 1인뿐이다.”
일제는 의열단을 끔찍이 무서워했다. 조선 내에서는 강도들이 재물을 빼앗으면서 의열단을 사칭하기도 하고, 경찰이 좀도둑을 잡았다가 “나는 의열단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놀라 도망가기도 했다고 한다. 일본 외무대신은 “김원봉을 체포하면 즉각 나가사키 형무소로 이송할 것이며, 소요경비는 외무성에게 직접 지출할 것”이라는 요지의 훈령을 상해 총영사관에 하달하기도 했다. 약산은 행적을 감추기 위해 평상시 거처를 일정하게 두지 않고 매일 잠자는 장소를 바꿨다. 본명 외에도 최림, 진국빈, 이충, 김세량, 왕세덕, 암일, 왕석, 운봉, 김국빈, 진충, 김약삼 등 수많은 이름을 가명 혹은 암호명으로 쓰기도 했다.
일제는 약산에게 김구 선생보다도 높은 최고 현상금을 걸었는데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320억 원이나 됐다고 한다. 하지만 약산이 월북해 북한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훈장은 받지 못했다. 2005년 이후 사회주의 운동가라도 서훈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 몽양 여운형 선생 등 54명이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았지만 약산은 그때도 제외됐다. “남과 북 모두에게서 버림받은 비운의 독립운동가”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최근 들어 약산에 대한 서훈 논란도 다시 불거졌다. 지난 2월 국가보훈처 자문기구인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에서 김원봉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하도록 보훈처에 권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의 불씨가 지펴졌다. 자유한국당 측은 “북한 정권수립에 직접 기여한 사람도 보훈 대상자가 되면 김일성도 훈장을 줘야 한다”며 반대의 뜻을 밝혔다. 김원봉 선생이 “뼛속까지 북한 공산주의자”이며 “6·25 전쟁 남침을 주도하고 국토를 폐허로 만든 자”이니 만큼 국가 영웅으로 치켜세우고 기리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김원봉 선생의 공적이 뚜렷한 만큼 서훈을 미룰 이유가 없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약산이 월북할 수밖에 없었던 현대사의 비극을 함께 봐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내 항일운동에서 김구 선생과 양대 산맥을 이뤘다고 평가받는 걸출한 독립운동가 김원봉 선생조차 서훈 논란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 자체가 서글픈 것도 사실이다. 해방 후 한반도에서 벌어졌던 어긋난 흐름이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고도 볼 수 있다.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
김원봉 선생은 1898년 8월 경남 밀양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역관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30여 마지기의 농사를 짓는 중농이었다고 한다. 약산은 어렸을 때부터 항일의식이 강했다고 전해진다. 1910년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는 훗날 뜻을 함께 펼쳤던 윤세주 등 마을 친구들과 눈물을 흘리며 복수를 맹세하기도 했다고 한다. 밀양공립보통학교에 다녔던 1911년에는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행사를 위해 학교가 준비했던 일장기를 화장실에 처박아버리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약산은 학교를 자퇴해야 했다.
다행히 밀양 읍내에 있는 동화중학에서 약산의 항일의식을 높게 사서 편입을 허용했다. 동화중학 전홍표 교장은 민족의식이 투철한 인물이었고, 김원봉 선생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 시절 약산은 친구들과 체력을 단련하면서 교장 선생님이 가져다준 책을 읽으며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이를 주시하고 있던 일제는 동화중학에 대해 재단이 부실하다는 이유로 폐쇄령을 내렸다. 약산은 부모님과 친구들에게 부탁해 80원이라는 거금을 마련해 교장에게 전달했지만 학교를 살리지는 못했다.
학교가 폐쇄되자 약산은 1년여 동안 집 근처의 표충사라는 절에 머물렀다. 표충사는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운 사명대사를 기리는 사찰로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이후 약산은 서울로 상경해 중앙학교 2학년으로 편입했다. 중앙학교에서는 이명건, 김두봉이라는 동지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목숨을 바쳐 조국 독립을 쟁취하자고 결의하면서 김원봉은 ‘산처럼(若山·약산)’, 김두전은 ‘물처럼(若水·약수)’, 이명건은 ‘별처럼(如星·여성)’ 살자고 다짐하면서 호를 지었다. 김원봉이라는 본명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호칭인 ‘김약산’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생겼다. 이 시절 약산은 전국을 무전여행 다니며 새로운 동지들을 만났고 무장투쟁의 뜻을 굳혀 갔다.
1918년 9월 약산은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김약수, 이여성과 함께 중국으로 떠났다. 이후 약산은 해방 뒤까지 한 번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세 사람은 우선 난징의 금릉대학에 입학해 공부했다. 여기서 약산은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 의도는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달랐다. 약산은 대표를 파견해 일제 지배의 부당함을 만국에 알리겠다는 목표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승전국들의 파티인 강화회의에서 연합국의 일원인 일본의 이해관계에 엇갈리는 결론은 나오지 않으리라 봤다. 대신 약산은 대표를 파견해 일본 대표를 암살하려고 했다. 암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약산의 사상적 배경이 일찌감치 의열 투쟁으로 기울어 있었다는 점을 알게 되는 대목이다.
1919년 3·1 운동을 계기로 김약수, 이여성 두 사람의 동지는 국내로 다시 돌아갔다. 약산은 중국에 남기로 결심했다. 약산은 만주 유하현의 신흥무관학교를 방문했다. 신흥무관학교는 수많은 애국지사들을 배출한 무장투쟁의 본거지였지만 그곳에서 약산은 오히려 무장투쟁의 한계를 절감했다. 독립군은 봉오동, 청산리 등에서 빛나는 전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일본의 무차별 토벌로 우리 동포들의 희생도 컸다. 남의 나라에서 군대를 양성해 일본에 대항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약산은 같은 폭력 투쟁의 방식이지만 무장부대를 육성하는 대신 관공서를 파괴하고 고관대작들을 암살하는 의열 투쟁을 벌여나가야겠다고 결심한다. 약산은 뒤에 의열단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쟁취하는 것이지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선 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구자가 되어 민중을 각성시켜야 한다.”
약산은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의열 투쟁의 동지들을 모으고 폭탄제조법과 총기류 사용법 등을 배웠다. 마침내 1919년 11월 약산을 비롯한 윤세주, 이성우, 곽경 등 13명은 의열단을 창단한다. 이들은 공약 10조와 구축왜노, 광복조국, 타파계급, 평균지권의 4대 이상을 채택한다. 의열단은 마땅히 죽여야 할 ‘7가살’로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적, 친일파 거두, 적의 밀정, 반민족적 토호열신(악덕 지방 유지)을 선정했다. 또 5가지의 파괴 대상을 조선총독부, 동양척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외적 중요 기관으로 정했다.
의열투쟁은 오늘날 말하는 ‘테러’와는 의미가 다르다. “천하의 정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한다”는 의열단 공약 제1조에서도 드러나듯 사적 이익이나 집단 논리가 아닌 국권회복과 보편적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방식이었다. 4대 이상 중 ‘평균지권’에서도 보여주듯 의열단은 단순한 독립만이 아니라 토지개혁을 포함한 사회개혁을 지향했음을 알 수 있다. 훗날 개정된 1926년의 의열단 20개조 강령에서도 소수가 다수를 착취하는 경제제도를 소멸시키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절대 자유권을 주장하며 남녀평등을 명문화하고 있다.
의열단은 대표자를 의백(義伯)으로 지칭했는데, 단원 간의 관계를 의형제로 여기면서 대표자를 ‘맏형’으로 부르겠다는 의미다. 약산은 의백으로 선출돼 단장의 임무를 맡았다. 의열단 창단 주역이 약산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고모부 황상규이며 초대 의백도 황상규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약산이 의열단 창단을 발의하고 주도적으로 참여한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약산은 의열단 운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소련 공산당과 코민테른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 계열뿐만 아니라 국민당과도 교류했다. 일제를 타도하기 위해서라면 이념과 노선은 중요하지 않았다. 약산은 공산당 계열로부터 여러 차례 합류 권유를 받았지만 응하지 않고 다만 협력은 계속했다. 임시정부와도 거리를 뒀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약산에게 “부분적인 모험행동을 피하고 적응 시기에 대대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도산과 약산은 각별한 사이였지만 이는 갈등의 요인이 되기도 했다. 약산은 임시정부의 활동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파벌주의에도 염증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약산은 아나키즘에 심취했고 러시아 작가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를 좋아했다. 님 웨일스가 쓴 의 주인공 김산(장지락)은 약산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고전적인 유형의 테러리스트로 냉정하고 두려움을 모르는 개인주의적인 사람이었다. 언제나 조용했고 육체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거의 말이 없었고 웃는 법이 없었으며 도서관에서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그는 투르게네프의 소설 을 좋아했으며 톨스토이의 글을 모조리 읽었다.”
아나키즘은 어떤 지배에도 반대하고 민중의 직접적인 행동에 의한 사회혁명으로 개인의 절대 자유가 보장되는 평등사회를 지향한다는 이념이다. 약산이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것은, 아나키즘을 독립운동 이론으로 수용하고 이회영 등과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한 유자명을 만난 영향이 컸다고 한다. 유자명을 통해 신채호 선생을 소개받았고 이는 신채호 선생이 ‘조선혁명선언’(의열단 선언)을 쓰게 되는 계기가 된다.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휴수하야, 부절하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야,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박삭지 못하는, 이상적인 조선을 건설할지니라.”(조선혁명선언 중)
창단 이후 의열단원들은 치열한 활동을 전개했다. 1920년에는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9월),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12월)이 결행됐고, 1921년에는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9월)이 있었다. 1922년에는 김익상·오성륜·이종암 등의 일본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 저격미수(3월), 1923년에는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후 교전(1월), 1926년에는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및 식산은행 폭탄투척(12월) 등이 벌어지는 등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다. 1924년에는 의열단원 김지섭이 도쿄의 일왕 궁성 앞에 폭탄을 투척하기도 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일본이 신처럼 받드는 왕궁을 공격했다는 점에서 일제를 충격에 빠뜨렸다. 사건에 가담한 의열단원들은 극적으로 탈출하기도 했지만, 끝까지 싸우다 자결하기도 하고 검거돼 옥사하거나 사형당하기도 했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멋진 친구들이었다. 의열단원들은 언제나 멋진 스포츠형의 양복을 입었고 머리를 잘 손질했다. 어떤 경우에도 결벽스러울 정도로 아주 깨끗하게 차려입었다.” 김산은 의열단원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죽음을 늘 목전에 둔 단원들의 모습은 청교도적이었다. 거사는 곧 죽음을 의미했지만 의열단원들은 서로 먼저 가겠다고 나서 제비를 뽑아야 할 정도였다.
사회주의보다는 민족주의에 방점
1926년에 이르러 약산의 의열투쟁은 전환점을 맞는다. 당시 중국국민당을 이끌면서 중국혁명을 지휘하던 쑨원을 만나 그들이 세운 황포군관학교 입교 제안을 받았다. 약산은 지금까지 의열 투쟁이 일정 성과를 거뒀지만 한 단계 도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입교 결정을 내렸다. 이곳에서 의열단원 등 수많은 조선 청년들이 투사로 거듭났다. 황포군관학교는 장제스가 교장으로 있었지만, 소련 공산당의 지원으로 만들어진 국공합작의 결과물이었다. 저우언라이 등이 교관으로 있었고 일부 단원들은 공산주의의 세례를 받기도 했다. 이곳에서 약산은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을 아우르는 두터운 인맥을 쌓을 수 있었다.
약산은 교육을 받으면서 김성숙, 김산 등과 함께 유오한국혁명동지회(조선혁명청년동맹)을 조직했다. 의열단의 거사는 충격 효과를 주긴 했지만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았고, 기대했던 것만큼 민중을 각성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당시 촉발된 노동·농민·청년 운동 등의 대중운동이 민중을 조직하고 의식화하는데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의열단 역시 이에 맞춰 조선민족혁명당으로 조직을 개편했다.
약산은 일본이라는 공통적의 적과 싸우기 위해서 중국의 성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중국혁명과 북벌에 참여했다. 그러나 장제스가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주의자 축출에 나서면서 국공합작은 붕괴됐다.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 과정에서 수많은 조선 청년들이 피를 흘렸다. 특히 광저우 봉기에서는 조선 혁명 세력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200여명이 희생됐다. 약산도 오늘날 중국 공산당이 창군기념일로 기념하는 난창 봉기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 무렵 약산은 독립운동의 바탕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접목하는데 기울어 있었다.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이나 상해의 민족주의 우파들의 소극적인 항일 노선에 실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투쟁이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전개된 것도 한몫했다. 약산은 1929년 조선공산당재건동맹 결성에 참여했고, 1930년에는 레닌주의정치학교를 열었다. 이는 뒤에 약산이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히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일제의 만주 침략은 다시 한 번 전환의 계기가 됐다. 약산은 다시 중국 국민당의 ‘삼민주의역행사’를 통해 장제스의 지원을 이끌어내 난징 교외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개설할 수 있었다. 삼민주의역행사는 공산당을 탄압하고 당 내부의 반대파를 숙청하는 극우조직이었다. 약산은 필요하면 공산주의자는 물론 극우단체와도 손잡는 것을 꺼리지 않았던 셈이다.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는 수많은 독립투사들을 길러냈다. 이육사 시인도 이 학교 출신이다.
필요에 따라 공산당과 국민당을 오가는 ‘변신’을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약산에게 목표는 일제 타도와 조국 독립 단 하나였다. 그는 장제스를 암살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장제스의 속셈은 우리를 이용해 보자는 거요. 그렇다면 우리도 맞장기를 두어서 안 될 게 뭐 있소? 염불에는 맘이 없고 젯밥에만 맘이 있어서 안 될 게 뭐란 말이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유리한 조건이면 어떤 거나 다 이용해야 하지 않겠소?”
약산은 노동자·농민을 중심으로 한 혁명을 주장했고 민족해방이 달성되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전개해야 한다고 본 점에서는 사회주의자들과 인식이 같았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이 배척하던 지주, 소시민, 보수 민족주의자 등도 끌어들여야 한다는 점에서는 인식이 달랐다. ‘사회주의’보다는 ‘민족주의’에 방점을 두고 있었고, 어떤 사상이나 집단이든 실용적으로 접근한다는 자세를 취했다.
1935년에는 의열단과 조선혁명당, 한국독립당, 신한독립당, 대한독립당 등 5개 단체가 이념을 넘어 뭉치기로 결정하고 민족혁명당을 창립했다. 민족혁명당은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적극 참여했다. 1938년에는 중국군의 관할에 둔다는 조건으로 지원을 받아 조선의용대를 창설했고, 중국군과 함께 항일전에 참가했다. 약산은 의용대 총대장을 맡았다. 200여명의 소수 인원이었지만 최정예로 구성됐고, 국제정규전에 독립군이 처음 참가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의용대는 주로 일본군에 대한 심리작전 등에 투입돼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조선의용대를 국민당보다는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고 싶어했던 중국 공산당은 김원봉을 제외한 의용대원들을 연안으로 파견해달라고 요청한다. 김원봉 역시 가고 싶어했지만 공산당은 김원봉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를 거부한다. 의용대원들은 항일 전쟁에 소극적인 국민당군 보다는 공산당 쪽으로 가길 원했고 약산은 1940년 결국 의용대의 주력을 보내는 아픔을 겪는다. 약산은 이후 임시정부에 참여했고 잔류한 조선의용대는 1942년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됐다. 약산은 광복군부사령관 및 제1지대장을 맡게 됐다. 의정원 의원에도 선출됐다.
그동안 임시정부는 김원봉 등 의열단 세력을 ‘모험주의’라고 비판했고, 약산은 임시정부를 유명무실한 조직으로 여겼던 것을 감안하면 큰 결단이었다. 하지만 그의 입지는 임시정부 내에서 점점 더 좁아졌다. 1944년에는 임시정부 군무부장이 됐지만 광복군은 그의 지휘를 따르지 않았다.
1945년 광복을 맞아 환국 과정에서 약산은 서로 가겠다고 다투는 임시정부 요인들 틈에서 제2진으로 가겠다고 양보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해방 정국에서 큰 손해였다. 실제 임시정부 내에서 2인자 역할을 했던 그의 존재는 해방 정국에서 거의 가려졌다. 중국인 비서 사마로는 김원봉을 이렇게 평가했다고 한다. “그는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손해를 보는 일을 했다. 연안으로 조선의용대를 보낸 것도,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도 개인으로서는 손해 보는 일이었지만 그는 묵묵히 대의를 위해 감수했다. 사선을 넘으며, 수많은 동지를 잃어가며 항일전선에서 싸웠지만 그는 귀국하면서 동포들에게 “해외에서 자유스럽게 지내온 우리들은 오히려 편안했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약산은 환국 후 일관되게 주요 정치세력의 연대를 추진했다. 약산은 신탁통치안에 대한 찬반 논쟁이 격화되는 와중에 우익 편향으로 치닫던 임시정부에서 탈퇴하고 좌익 계열의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했다. 좌우합작·통일정부 수립을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럼에도 조선공산당 등 좌익세력에 매몰되지는 않았다. 1947년에는 민족혁명당의 당명을 인민공화당으로 고치고 당 대표직을 맡았다. 여운형 선생 암살 사건이 벌어지자 장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미군정이 좌익 세력 소탕에 나서면서 약산에게도 검거령이 떨어졌다. 1947년에는 포고령 위반으로 검거돼 군사법정에 선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의 지시로 악질 친일 경찰 출신인 노덕술에게 잡히고 만 것이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붙잡아 고문을 가했던 노덕술에게 수모와 고문을 당한 김원봉은 3일 밤낮을 울었다고 전해진다.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놈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악질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다니, 이럴 수가 있소.”
결국 약산은 1948년 4월 월북했다. 거듭되는 테러 위협으로 목숨까지 위태로웠고, 또 다시 그에 대한 미군정의 검거 위협이 계속되고 있었다. 미군정 치하에서 중간·좌파 세력은 설 자리가 없어졌다. 그의 동지들인 조선의용대 출신 연안파도 북한에 있었다. 해방 후 6개월 동안 약산을 지켜보았던 황용주 전 MBC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또 그는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러나 북행한 것은 좌우합작이 실패한 데 대한 실망에다 자기를 따르던 단원들이 거의 북쪽으로 돌아서버린 점에 따른 동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월북한 약산은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했고, 장관급인 국가검열상에 취임했다. 월북의 대가는 컸다. 6·25 전쟁 와중에 약산의 형제들 중 4명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죽임을 당했고 아버지도 유폐되었다가 굶어 죽었다. 약산의 최후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6·25 이후 김일성 유일체제로 가는 길에서 많은 인물들이 숙청됐고 김원봉 역시 이를 피해갈 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약산은 1958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고 노력훈장을 받은 것으로 나오지만 그 이후 약산의 이름은 공식 문서에서 사라졌다. 명예롭게 은퇴했다, 장제스의 스파이로 몰려 감옥에 갇혔다가 자살했다는 등의 설이 제기되지만 정확한 그의 최후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에 나온 러시아 문서에 따르면 약산은 1958년 간첩죄로 숙청당한 김달현 사건에 연루돼 ‘반국가적 및 반혁명적 책동의 죄’를 받아 체포됐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권한을 박탈당했다고 한다. 약산이 김일성 유일체제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은 게 근본 이유였다. 약산은 체포 직전 남한으로 도주하고자 온갖 방법을 시도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약산이 심각한 처벌을 받았다기보다 해임 뒤 평양 근교 시골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불가능을 모르는 강인함, 그 속의 부드러움
약산은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가능을 위해 투쟁한 강인한 인물이었다. “자기 친구들에게는 지극히 점잖고 친절했지만, (적에게는) 지독히 잔인하기도 했다.”(김산) 일제는 약산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우유부단한 것 같으나 성질이 극히 사납고 또 치밀하여 오안부적(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음)의 기백을 가졌고, 행동도 극히 경묘하여 신출귀몰한 특기를 가졌다.”
1923년 중국 북경에서 의열단 활동을 했던 김성숙은 김원봉을 이렇게 회상한다. “김원봉은 굉장한 정열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만난 사람을 설복시키고 설득시켜 자기 동지로 만들겠다고 결심하면 며칠을 두고 싸워서라도 뜻을 이뤘지요. 그렇기 때문에 동지들이 죽는 곳에 뛰어들기를 겁내지 않았던 것 아닙니까? 그만큼 남으로 하여금 의욕을 내게 하는 사람이었지요. 그것이 김원봉의 가장 큰 능력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김원봉과 김구는 닮았습니다.”
그는 공산당을 끔찍이 싫어한 장제스와 중국 국민당에게서 지원을 받았지만, 중국 공산당과 함께 봉기에 참여하기도 했다.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기도 했지만, 그들의 방법론을 전부 따르지는 않았다. 그에게 오직 하나의 종교가 있었다면 민족해방이었다. 김성숙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자요, 애국자로 항일을 앞세운 투사였지 공산주의가 좋아 거기에서부터 출발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황용주 전 MBC 사장 역시 역산의 사상을 이렇게 전한다. “민주주의를 가미한 사회민주주의, 또 민족주의와 민주주의, 마르크시즘의 모든 장점을 조금씩 딴 것이 되어야 하며 민족혁명당은 앞으로 그렇게 나갈 것이라고 분명히 얘기했습니다.”
약산이 북한의 핵심 권력자였으며 6·25 전쟁에 책임이 있다고 보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약산은 북한 권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노동당 당원은 아니었다. 그는 북한에서도 군소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 인민공화당을 이끌고 있었다. 국가검열상이라는 직위는 우리의 감사원과 비슷한 곳으로 핵심 위치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나마도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직책이 바뀌었는데 점점 덜 중요한 위치로 밀려난 것으로 보인다.
약산이 북한 정권 수립에 기여한 것은 맞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약산은 사마로에게 보낸 서신에서 “북한은 그리 가고 싶지 않은 곳이지만 남한의 정세가 매우 나쁘고 심지어 나를 위협하여 살 수가 없어 시골로 거처를 옮겼다”고 했다. 합동통신 편집부장으로 남북협상회의를 취재했던 설국환은 평양의 약산 집을 방문해 “공산당 선전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차라리 은퇴하라”고 충고했지만 약산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러나 정치한다는 사람은 때로는 자기의 뜻대로 못할 때가 있는 것”이라는 심정을 피력했다고 한다.
남이든 북이든 약산에게 마땅한 자리는 없었다. 약산이나 몽양 같은 중도파가 설 자리가 없었다는 것이 해방 정국의 비극이고, 또 오늘날 대한민국의 비극이기도 하다. 약산의 서훈 논란은 그런 면에서 다시금 새겨볼만한 의미를 남긴다. 약산을 인터뷰해 을 쓴 소설가 박태원은 약산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결코 남의 위에 서려 하지 않는다. 다만 민중이 약산에게 그러기를 원하므로 한 걸음 앞설 뿐이다.”
■ 참고문헌
김삼웅,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의열단 ‘의백’ 김원봉은 뼛속까지 민족주의자였다
[김원봉 서훈 논란①] ‘뜨거운 인물’ 약산 김원봉…서훈할 것이냐 말 것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