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소개]

경향신문사는 해방 후 두 번째로 맞이하는 3·1절을 하루 앞둔 1947년 2월 28일자에 3·1운동 특집기사를 내보냈는데 그 중 하나가 김구 선생의 기미년 조선탈출과 관련한 비화다. 당시 43세의 김구 선생은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하고 주변 지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황해도 안악에서 신의주를 지나 중국 안동현에서 이륭양행의 상선에 승선, 우여곡절 끝에 상해로 탈출하였다. 김구 선생을 취재하여 탈출비화를 소개한 기자가 누군지 기사에 언급되지 않아 확인할 수 없다.- 편집부

경향신문 1947년 2월 28일자, <기미년 김구선생 조선탈출비화>

 

비록 어떠한 이유를 내세운다 할지라도 민족의 슬픔을 한 몸에 지니고, 일생동안 조선과 더불어 짓밟히며 지나온 이에 대한 간절한 경애의 정을 차마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기미년 3월 초승 조선 천지가 비통한 민족의 함성으로 뒤덮이었을 때 날카로운 왜정 관헌의 눈을 피하여 조국해방의 크나큰 뜻을 품고 표연히 고국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한 한 사람의 지사가 있었으니 그는 3·1운동 직후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한 김구 선생이었다. 겨레들 사이에 혹시 선생의 이야기를 할 때 선생이 중국으로 망명한 후의 일은 누구나 흔히 알고 있으되 망명을 하던 때 조선 탈출의 기막힌 고초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때마침 해방 이후 두 번째 맞이하는 3·1기념일을 당하여 선생에게서 직접 들은 바로써 아직 공표되지 않은 한 토막 비화를 감히 세상에 소개한다.

탈출 기회 규시(窺視)

기미년 2월 하순 아직도 남은 추위가 봄바람에 섞여 옷깃으로 스며드는 때에 황해도 신천군 동산리 들판에는 17년 언도를 받은 감옥으로부터 가출옥한 당년 43세의 김구 선생이 수많은 농군들과 섞여 괭이를 들고 논보를 닦으며 온종일 농군들의 일을 지휘하는데 원체 일에만 정성을 바치는 듯한 선생의 태도에 저윽히 안심을 한 모양으로 감시를 하던 경관은 저녁때가 되자 일즉이 읍내로 들어가버렸다.
선생은 감옥에서 나온 후에 자당(慈堂)과 부인과 영식(令息)까지 전부 네 식구가 해주로부터 안악읍으로 이사하여 1년 동안 휴양하다가 농촌운동을 표방하고 동산리에서 다시 농군들과 1년 동안을 지냈으나 사실은 어느 때나 우리를 벗어나려는 범처럼 민족해방의 웅지를 품고 멀리 해외로 탈출하기만을 은근히 꾀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시망을 뚫고

그러나 위험인물로 생각하여 한때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삼간초옥(三間草屋)선생의 거처에는 날마다 한 사람의 무장경관이 출장하여 밤낮으로 엄중한 감시를 하고 있으며 아무리 기회를 노려도 좀처럼 좋은 기회가 오지를 않았던 것이다. 감시하던 경관이 읍으로 사라지자 처음으로 불의(不意)에 찾아온 이 기회를 타서 선생은 농군들에게 읍내에 잠깐 다녀올 터이니 그동안 일을 하여 놓으라 이르고 마치 참말로 잠깐 나들이라도 가듯이 두루마기에 중절모를 쓰고 발에는 짚신을 신은 채 가족의 목 빼인 전송도 받는 둥 마는 둥 총총히 집을 나섰으니 이 길이 바로 30년 동안 고국을 등진 장구한 나그네의 길이었다.

열차 내의 요행

논틀밭틀로 사람을 피하며 밤이 된 후에 사리원읍으로 들어간 선생은 그 고장에 사는 의사 김우범(金禹範) 씨의 호의를 입어 내실에서 조심조심 하룻밤을 지샌 후 밝는 날 새벽차로 신의주로 향하였다.
선생의 품에는 숨은 유지들의 온정으로 얽힌 노자 500원을 수건에 싸서 지니었을 뿐이다. 선생은 3등 차간 한 구석에 웅숭그리고 앉아 있는데 때마침 3월 초승이라 차가 서는 곳마다 천지를 뒤흔드는 만세소리와 사포끈(?)을 턱에 건 일인 관헌들이 눈이 벌개서 날뛰는 꼴이 차창 밖으로 내다보인다. 차에서 하룻밤을 무사히 지나고 이튿날 아침 신의주역에 내려 만세사건으로 승객들을 이잡듯이 수색하는 경관에게 수건에 싼 돈 500원을 내어놓고 “의주로 재목을 사러왔다”고 감쪽같이 속여 넘긴 후에 아슬아슬하게 경계망을 돌파하여 성내로 들어가니 의주에서는 이미 만세운동을 한바탕 치르고 난 끝이라 주막에서 밥을 사먹으며 듣노라니 간밤에 주모자 22명이 체포되었다는 것이었다.

목적지 상해로

요기를 한 후 선생은 곧 중국사람 인력거를 빌려 타고 안동현으로 건너가서 이곳에서는 당시에 이륭양행(怡隆洋行)을 경영하던 영국 아일랜드 사람 조지 루이스 쇼(George Lewis Shaw, 1880~1943)라는 이의 호의를 입어 그의 집에서 일주일을 묻다가 상해로 가는 그의 상선을 타고 일행 15명이 안동현
을 떠났다. 원래 조지라는 사람은 조선사람에 대하여 뜨거운 동정을 품고 있어서 하나씩 둘씩 왜국 관헌의 눈을 피해 압록강을 건너오는 조선의 지사들을 무조건 하고 집에 들여 보호하였던 것이다.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와준 조지 루이스 쇼

 

그때 김구 선생과 함께 상선을 타고 상해로 간 사람들은 선생까지 전부 15명이었으나 지금은 선생의 기억에서 사라진 이가 태반으로 생각나는 사람만 적으면 다음과 같다. 선우혁(鮮于爀) 송병조(宋秉祚) 장덕로(張德櫓) 이원익(李元益) 김병조(金秉祚) 조상섭(趙尙燮)…이 15명 조선의 지사들이 이륭양행 창고로부터 비밀리에 상선에 오를 때 주인 조지 씨는 일일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작별하고 선장에게는 “이 15명은 조선의 독립투사들이니 각별히 조심하라”고 재삼 부탁하였다.
상선을 타고 고향을 떠난 지 보름 만에 상해 프랑스 조계에 상륙하니 검붉은 황포강 너머로 멀리 고국의 하늘을 바라보며 김구 선생의 눈에는 한순간 감격의 눈물이 어리었다.
그 후로 조지 씨에게는 임시정부로터 감사하는 특별 훈장을 수여하였다.(1963년 한국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