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과 혼란 속에서 기록의 포지션을 정하다

2014년 11월 23일. 버스를 타고 시청앞 농성장을 지나 기억저장소로 출근하였습니다. 카톡에서는 농성장을 열린 광장으로 만들자는 제안이 있었고, 200일 넘는 동안 안산지역 시민운동의 흔적이 짙게 밴 농성장은 늦가을의 낙엽과 함께 어우러지고 있었습니다.

4월 16일. 한미현씨와 함께 점심을 먹으며 그로부터 세월호 참사 첫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후 인터넷으로 계속 모니터링 하다 오후 4시경 단원고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제야 사고의 입체적 상황을 알게 되었고, 그 후 모든 일정을 접고 참사 관련 소식에만 귀 기울였습니다.

사고 소식을 들은 아내는 전 직장 동료 유병화씨의 소식을 듣고 진도로 내려갔으며, 저와 함께했던 동료들도 진도로 내려갔습니다. 마땅하게 무얼 할 수 없었던 저는 몇몇 사람들과 전화 통화를 하였고, 마이금 안산시민대책위 공동대표의 제안에 따라 김은호 목사의 주도하에 단원고에서 촛불기도회를 할 수 있도록 소식을 전했습니다. 그날 밤 70여명이 모인 가운데 기도회가 시작 되었고, 참석자들의 제안에 따라 긴급회의를 다음날 단원고에서 4시경에 갖기로 했지요.

4월 17일. 아침 9시경 실무 회의를 하기 전 두 명의 친구를 만났는데 그들은 촛불을 이어가는 방식과 관련 저와는 생각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저는 촛불 기도회에서 제안한 방식으로 논의하고 풀었으면 하였는데, 친구들은 그간 안산시민운동의 블록으로 촛불을 고민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촛불에서 저의 역할은 제안자로서의 역할로 기억되었고, 저 또한 4월 23일 이후 촛불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 고민하지 않고 참여만하다 본격적으로 ‘나는 어떤 도움이 될까’를 고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록, 두려움의 시작

눈을 뜨면 416가족들은 아이가 없는 세상이 슬프다고 합니다. 제가 그런 고통을 느낀다면 거짓입니다. 다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제가 두려운 것은 지금의 기록수집 정리와 서비스의 실패 여부입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고 정리되지 못한 여러 것들을 보면서 ‘저게 사라지면 어쩌나’하는 고민과 수집된 기록물들을 ‘어떻게 정리해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지?’, 이런 상황이 매일 저를 누릅니다.

처음 기록을 하기로 결심하고 4월 23일 경 알고 지내던 김진열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상의를 드렸고, 그 후 홍영의 교수님에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김 감독도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다 정일건 감독과 함께한 자리에서 결심을 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출발한 영상 기록단은 한신대 안병우 교수님을 만나게 되면서 영상기록에서 기록 수집 정리까지 보폭을 넓혔고 그 후 사진, 르포기록, 만화기록 등이 결합됐습니다.

김순천 작가도 선뜻 결심을 하지 못하였고 그 외에도 많은 분들이 우리가 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을 가시지 못한 채 서로 위로도 하고 싫은 말도 했습니다. 당시 겪은 부담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는 이영남 교수님이 쓰러진 것으로 가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위원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저는 세월호 가족대책위를 찾아가게 됩니다.

가족대책위 분들은 반기는 반면 저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는 만큼 열심히 답변 하였지만 그 분들이 진도에서 겪었던 혼란과 저의 미성숙한 답변으로 몇 차례 같은 상황이 반복 되었고, 5월 말경부터 조금씩 마음을 열어 주어 그때부터 가족대책위에서 기록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진도에 계신 김익한 교수님과 전화 통화를 자주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많은 현안들을 논의하며 배웠습니다.

열심히 하는 것 보다 잘 하는 게 중요하다는 깨우침

5월 4일부터 시작된 세월호 특별법 서명운동은 진상규명 특별법제정 천만 서명운동으로 5월말부터 본격화되면서 7월 중순에 350만명의 국민들이 서명에 동참해 1차분을 국회에 제출하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에 맞추어 서명용지를 어떻게 기록으로 남길까? 하는 심성보 교수의 제안에 따라 발 빠르게 서명용지를 세는 방법, 서명박스를 의미 있게 하는 것, 가족과 시민이 국회에 입성할 때 무게 있게 입성하는 방법 등을 논의하며 5일 밤낮을 작업하였습니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그날의 흔적이 다양한 사람에게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서울 시청광장에서 ‘있지 말아요 416’ 사진전, 광화문 ‘미공개 영상 공개 TV’, ‘하늘로 간 수학여행’ 사진전을 기획 진행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후 저는 416TV 활동을 마지막으로 8월 말경 안산으로 중심축을 옮겼습니다. 그 이유는 기록에 충실하기 위한 것이 가장 컸고, 합동분향소를 어떻게 활성화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뒤따랐으며 또 한편으로는 생활을 유지하는데 여러 문제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후로 진도에 내려가 ‘기억하라 이 바다’ 사진전을 하였으며, 다시 안산으로 돌아와 ‘안산시민 고맙습니다’ 1박2일 행사를 지원하였지만 이 모든 것이 다 잘 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고통과 희망의 심장 고잔동에서 시작하는 기억공동체 운동

고잔동에 있으면 이런 저런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먼저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나게 되고, 세월호 가족을 돕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고잔동 주민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세월호를 잊으려는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고잔동은 416이후 고통과 희망의 심장입니다. 고통을 어쩔 수 없다면, 고통의 걸음으로 무엇을 만들어 낼 것인가란 질문이 9월부터 제가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고 고민입니다. 먼저 250명의 삶의 자취와 희망을 영원한 기억으로 고잔동에 남기기 위한 계획을 실행하려고 합니다. 두 번째로 부모님들의 통곡과 사랑을 느낄 수 있는 마을을 가꾸려 하고, 세 번째로 영원히 18살이 되어버린 친구들의 우정과 꿈이 있는 언덕을 만들려고 합니다.

즉, 고잔동이 생명의 마을이 되고, 안산은 청소년이 꿈꾸는 도시가 되며, 나아가 대한민국은 안전한 사회가 되는 기억공동체 운동을 하려는 것입니다.

처음 기록을 결심 하였을 때 5년에서 10년 정도 생각했고 그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잘 하게 하는 것도 능력이고 방법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3년에서 5년 정도 열심히 해 유가족들이 기록을 잘 관리할 수 있도록 지원하려고 합니다.

2015년 1월을 목표로 기억저장소 2호관 기획전도 하려고 합니다. 1월에 기획전을 하려면 12월중에 실내 공사 마무리, 큐레이터 선정, 참여 작가섭외, 250명 기록 수집 정리 등을 해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간단치 않습니다.

실내 공사는 김익한 교수님이 책임을 지고 있으니 어떤 식으로도 해낼 것이라 믿습니다. 250명 기록 수집정리는 권용찬 팀장이 해낼 것이고 그 밖에 것은 팀원들이 힘을 합해 풀어나가야 하겠지요! 목표 기한을 3~5년으로 정해 그런지 이전에 느꼈던 부담이 줄기는 했습니다. 3년 후면 유가족 스스로도 잘 해내리라 믿으니까요.

고잔동에서 기억 한다는 것은, 416 가족이 대한민국의 시민을 기억 한다는 것입니다. 어제 저녁 저의 가족 아들 연수, 딸 미르 셋이 나눴던 대화입니다. 참고로 저희 집은 교과서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연수가 물었습니다.

“아빠 지금의 미국을 누가 처음 발견 하였어?”
“미르가 대답해 볼래?”
“콜럼부스가 아니니까 아빠가 되묻는 거잖아”
“아빠 생각은 질문이 잘못 되었는데”
“왜”
“거기 사람이 살고 있었잖아!”
“어 그럼 유럽사람 중 제일 먼저 가본 사람이 누구인지로 바뀌어야 해?”
“그렇지”

기록은 누군가의 입장이 반드시 숨어있게 됩니다. 아메리카 대륙에 살았던 인디언의 기록이 남아 있다면 스페인, 영국, 프랑스 군인들이 어떤 살육을 하였는지, 왜 인디언들은 살육을 당했었는지 등을 명명백백하게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세월호 참사 기록에서 공공이 기록하는 것과 민간이 기록하는 것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민간기록이란 대원칙은 어떤 경우든, 그 상대가 누구든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416 세월호 기록은 가족과 시민이 기록하는 대한민국의 첫 번째 민간기록이 될 것입니다.

김종천 416 기억저장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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