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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 화성시민학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고, 언론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않았다. 보도해야 할 것은 하지 않고,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리기에 급급했다. 밝혀야 할 것들은 많았으나, 언론의 관심은 그곳에 머무르지 않았다. 세월호 가족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다고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가겠다고 밝혔다. 화성여성회 서부지부에서 가족대책위를 모셨다. 화성시민들과 함께, 유가족에게 직접 세월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마련한 자리였다. 12월 2일 오전 10시 반, 화성시민학교에서 진행했다. 가족대책위에서 두 분이 화성에 오셨다. 자신을 2학년 3반 예은이 엄마, 2학년 3반 윤민이 엄마라고 소개했다. 두 분은 회의실에 들어서자마자 울먹였다. 벽에 미리 붙여 놓은, 윤민이와 예은이의 초상화 때문이었다. 윤민이 엄마가 입을 열었다.

“제 딸이네요. 감사합니다.”

영상을 틀었다. 참사 200일을 앞두고 만들었던 영상이었다. 두 엄마는 울었다. 차마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영상을 보던 다른 ‘엄마’들도 울었다.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아픔은, 엄마이기에 느낄 수 있는 것이었다. 훌쩍이는 소리가 회의실에 가득했다. 윤민이 엄마가 먼저 입을 열었다. 뒤이어 예은이 엄마도 말을 했다. 두 분 모두 눈물이 가득했다. 오늘 간담회에 참여한 이들은 ‘4.16 약속지킴이’에 서약했다. 예은이 엄마가 노란리본배지를 달아줬다. 윤민이 엄마가 말했다. 다음 번에 화성여성회 서부지부에서 간담회를 진행하면, 예은이 엄마와 윤민이 엄마 외의 분들이 찾아올 것이라고 했다. 다른 가족들의 이야기도 더 많은 분들이 모여서 귀 기울여 들어주기를 당부했다.

죽어서 아이들 앞에 섰을 때, 부끄럽지 않은 엄마이고 싶어서 포기하지 않을 거라 말했다.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먹먹했다. 2014년 마지막 달이 왔고 이제 2015년이 될 테지만, 윤민이와 예은이의 시계는 4월 16일에 멈춰 있다. 단원고 2학년 3반의 학생 신분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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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명구 기자(뉴스Q)

윤민이 엄마

우리 가족은 일곱 식구에요. 윤민이 위로 언니들이 둘 있어요. 딸만 셋이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살아요. 윤민이와 둘째는 다섯 살 터울이에요. 윤민이는 귀한 딸이었어요. 학교에서는 얌전하고 소극적이라고 했는데, 집에서는 막내딸다운 모습을 많이 보였어요. 저는 직장을 다니고 있어요. 수학여행 가던 그 날에는 제가 윤민이랑 친구 한 명을 차로 실어다 줬어요. 캐리어 끌고 버스 타고 가기에는 좀 힘들 거 같았거든요. 그러고 나서, 저는 출근을 했지요. 그게 윤민이를 살아서 본 마지막 모습이었어요. 윤민이랑은 계속 카톡을 했어요. 윤민이는 배 멀미가 나서 어지럽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도착하면 엄마한테 전화 좀 하라고 했었어요. 4월 16일, 아침 조회하고 있는데 이웃집 엄마한테 전화가 온 거에요. 속보가 떴다고. 배가 침몰하고 있다고 그러는 거에요. 저는 바로 윤민이랑 통화를 했어요. 윤민이가 “엄마, 배가 기울었어. 구명조끼 입고 복도에 나와서 줄 맞춰 앉아 있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 이제 다들 구조하려고 하나 보다 생각했어요. 설마 그 큰 배가 다 가라앉을 때까지 아무도 구조하지 않을 줄은 몰랐죠. 그래서 윤민이한테 “배에서 나오면 바로 연락해. 엄마 걱정하니까.”라고 했어요. 얼마 안 있으니까 문자가 오는 거에요. ‘단원고 180명 구조’,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 문자만 세 번이나 왔어요. 그래서 저는, ‘구조됐구나’, 이렇게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이웃집 엄마가 진도로 내려간다는 거에요. 불안해서. 저보고 같이 갈 건지 물어보는 거에요. 애기 아빠랑 통화하고 저도 일단 조퇴하고 학교로 갔어요. 학부모들이 학교로 모이고 있었어요. 학교는 아수라장이었어요. 진도로 출발하려고 버스가 계속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학교에서 진도로 버스 5대가 출발했고, 저는 네 번째 버스에 올랐어요. 이미 그 때는 윤민이랑 연락이 안 되는 상황이었어요. ‘애들 구조해서 근처에 가까운 섬에 실어다 놨나 보다. 바닷물에 빠진데다가 섬이니까 핸드폰이 연결이 안 되나 보다.’ 저는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죠. 옆자리 엄마는 딸이랑 계속 통화했어요. 그 딸은 이미 진도실내체육관에 나와 있는 상황이었던 거죠. 그 딸이랑 옆자리 엄마가 계속 중계를 해 줬어요. 그러니까 더더욱 그렇게 생각했던 거죠. 해경이랑 어선들이 계속 데리고 나오고 있고, 윤민이도 어느 섬에 들어가 있겠거니. 그렇게요.

진도 내려가니까 상황이 심각했어요. 애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던 거죠. 더구나 진짜, 아무 것도 없었어요. 구급차 이런 것도 없고요, 의료진도 없어요. 하얀 천막도 안 쳐져 있어요. 상황판에는 생존자 아이들 명단이 적히고 있어요. 먼저 내려간 그 이웃집 엄마, 그 엄마가 찬호 엄만데요. 그 엄마가 그러는 거에요. “찬호하고, 윤민이가 없어.” 저도 막 여기 저기 물었어요. 그랬더니 ‘기다려요’ 이 말뿐이에요. 배가 계속 들어오고 있으니까 기다려라. 생존한 아이들이 버스로 들어오고 있었어요. 아이들한테 물었어요. 최윤민 아냐고. 모른대요. 버스에서 혹시 2학년 3반 있냐고 물으니까, 한 명이 손을 들어요. 그런데 윤민이는 못 봤대요. 그러던 와중에 더 이상 들어올 배가 없다는 소식이 들렸어요. 엄마들 울고 불고, 쓰러지기 시작했어요. 부모들이 팽목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팽목항에 엄마들이 있었던 거에요. 팽목항 와 보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팽목항에서도 아무 것도 안 보여요. 바지선으로 두 시간 들어가야 현장이에요. 엄마들은 그냥 모포 두르고 바다만 쳐다 보고 있는 거에요. 멍하게. 그 앞에 어선만 왔다 갔다 하고 있어요. 팽목항에 있는 사람들은 세 종류였어요. 좀비처럼 멍하게 있는 사람들은 유가족이었고요,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은 기자들이었어요. 마지막 한 종류는 등산복을 입고 있었어요. 사복 경찰들. 쫙 깔려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벌써 그렇게 깔려서 유가족들 모여서 얘기하면 옆에 다가와서 힐끗 듣고 가고 그랬어요. 대체, 사복경찰들은 어떻게 벌써, 또 그렇게 많이 와서 있었는지 아직도 의문이에요. 영화 <다이빙 벨> 있잖아요. 그거 저는 별로 감동이 없었어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문제가 될 일이 뭐 있지? 이거 별 거 아닌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미 다 제 눈으로 본 거니까요. 그런데 보신 분들은 놀라웠나 봐요. 언론이 국민의 눈과 귀를 막고 있었구나, 깨달으신대요. 또 세월호에 감춰진 뭔가가 더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생각들도 드시나 봐요. 거기에는 유가족 이야기가 많이 담겨 있는 건 아니에요. 언론과 기자의 시각으로 다루고 있는 거라 그런 건가 봐요. 그렇지만, 다큐의 역할은 충분히 했다고 봐요.

윤민이는 8일째 되는 날 나왔어요. 그런데 진짜, 정부라는 곳이 조직적이거나 체계적이지 않았어요. 시체가 나오면, 성별이랑 인상착의를 적어요. 예를 들면 여자, 긴 머리에 아디다스 운동화, 이렇게요. 유가족들이 우리 애다 싶으면 가는 거에요. 그런데 8일째 되는 날, 133번 최윤민. 이렇게 뜨는 거에요. 애가 구명조끼 안에 학생증을 걸고 나왔대요. 그래서 ‘최윤민’이라고 뜬 거였대요. 10시 30분에 윤민이를 봤어요. 윤민이는 깨끗했어요. 상처도 없고. 이게, 첫 날에는 건진 모습 그대로 보여주고 애도 맨 바닥에 놓고 그랬어요. 엄마 아빠는 진도에 있는데 목포 병원으로 실어나르고 막 이랬거든요. 내 아이 같으면 목포까지 가서 보고 와야 했던 거죠. 근데 이게 복잡하니까 바꿨어요. 장례지도사가 정돈된 모습으로 보여주고, 맨 바닥이 아니라 테이블 놓고 이렇게 바뀌었죠. 아, 진짜 그 날 생각하면 눈물 나요. 8일 째 되던 날에는 윤민이 혼자 여자애인 거에요. 남자애들 쭉 있고, 한쪽 구석에 윤민이 혼자 있는데. 얼마나 외로웠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파요. 우리나라는 진짜 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어요. 저는 8일 동안 애가 나오기를 기다린 거잖아요. 애가 나왔으니까 내 아이 빨리 데리고 가서 장례 치러주고 싶은데, 절차가 되게 복잡해요. 하루 이상 걸리는 거에요. 의사 불러다가 사망 판정도 해야 하고, DNA 확인 절차도 거쳐야 해요. 엄마들 DNA랑 제일 비슷하다 그래서 엄마들 250명 DNA를 다 넘겨줬었거든요. 하나 하나 대조해 봐야하는 거죠. 이건 이해해요. 애들이 눈 뜨고 있는 거랑 눈 감고 있는 거랑 다른가 봐요. 애들이 세 번이나 바뀐 적이 있었다고 하니까요. 가장 큰 문제가 날림이라는 거에요. 우왕좌왕해요. 이쪽에서는 저쪽으로 넘기고, 저쪽에서는 이쪽으로 밀어버리고. 아이는 공중에 떠 있는 거에요. 시간은 가고, 그러니까 애 몸이 막 변질돼요. 물 속에서 나온 아이를 냉동고에 넣었어요. 운구차도 준비 안 돼 있고, 장례식장도 없고, 완전 엉망이었어요. 뭘 해 놓은 건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저는 윤민이 빨리 안산으로 옮겨야겠다 싶었어요. 구급차에 얼음 깔고 안산으로 올라왔어요. DNA 결과 나올 때까지 염하지 않고 화장 하지 않겠다고 각서 쓰고서요. 물에서 나온 날 올라 온 아이는 윤민이 뿐이래요. 억지 쓰면서 올라온 거죠. 그날 올라온 윤민이도 상온에 노출되고 이래서 많이 변색됐어요. 친척들이 마지막 윤민이 얼굴은 못 보게 하더라고요. 푸르게 바뀌어가지고. 저는 8일 만에 탈출했잖아요. 근데 지금은 8일 동안 내려가 있었다는 게 잘 생각이 안 나요. 순간이었던 거 같아요.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였을 거에요. 4월 16일 이후로 다들.

윤민이 찾고 난 이후로 두 번 기뻤어요. 찬호 찾았을 때랑, 지연이 나왔을 때요. 그 이웃집 엄마가 찬호 엄마라고 했잖아요. 내려가 있던 8일 동안 진짜 서로 의지하고 그랬어요. 윤민이 찾고 올라가면서 찬호 엄마랑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찬호 나오면 꼭 연락 달라고 그랬어요. 찬호 보러 오겠다고. 올라와서는 진짜 전화를 못하겠더라고요. ‘찬호 나왔어?’ 이 말을. 그래서 문자만 보냈어요. 힘내라고. 찬호 곧 나올 수 있을 거라고. 지연이 나왔을 때도 진짜 기뻤어요. 윤민이랑 같은 반이었던 데다가, 번호순이다보니까 윤민이랑 같은 방까지 썼었거든요. 지연이가 2학년 3반 마지막이었어요. 애들을 안산으로 데리고 온다는 것만으로도 제가 다 진짜 기뻤어요. 상황판에 <여자, 아디다스 트레이닝복, 교정기, 긴 머리, 귀 뚫음.> 이렇게 뜨면 엄마들이 “악!” 소리치면서 뛰어가요. 사고 일어나고 며칠 동안은 우리 애 아니었으면 그랬어요. 엄마들 다요. 그러다가 나중에는 ‘와 진짜 좋겠다, 다행이다’ 이렇게 바뀌었어요. 윤민이 휴대폰을 복원시켰더니 10시까지 기록이 남아 있더라고요. 음, 사람들이 에어포켓 이런 얘기들 했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래요. 죽어서 나올 것이라면, 3-4일을 깜깜한 물속에서 버티다가 죽는 것 보다는 한 번에 빨리 깔끔하게 죽는 것이 아이들한테 더 좋았던 것이 아닐까. 마치 고문당하다 죽은 거잖아요. 저는 세월호 참사 일어나고 나서 어둡고 좁은 곳 못 가요. 엄마들 다 그래요. 그래도 애들 찾은 집들은 나아요. 아직 다 못 찾았잖아요. 실종자 9명인데요. 그 집은 장례식도 못 치르죠. 포기가 되겠어요? 인양하자고 해도 안 된다고 포기 못했죠. 그런데 잠수부들이 자꾸 사고가 나니까. 그 분들이 한 발 물러난 거죠. 그런데 이제와서 인양 안 한대요. 그냥 두재요. 처음에 자기 책임이라던 대통령도 이제 막 발을 빼요. 저는 되게 보수적인 사람이었어요. 나랑 내 가족만 잘 지키면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었어요. 투표 열심히 하고 그러면 되는 건 줄 알았어요. 뒤통수를 맞고 나서 깨달았아요. 이 사람들이 우리를 살리려는 사람들이 아니구나, 하는 걸요. 어쩌다보니, 정부의 반대편에 서 있게 됐어요. 저희 아버님 국가유공자에요. 국회, 청와대 이렇게 다니는 거 보셨죠. 큰 딸은 세월호 관련해서 열심히 페북에 글을 남기고 있어요. 할아버지가 딸한테 그랬대요. 이제 잊어라, 포기해라. 보수적인 분이다 보니 24살짜리 여자애가 그러는 게 걱정되신 모양이에요. 그랬더니 생전 안 그랬던 애가 할아버지한테 대들었대요. ‘뭐라도 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 보겠다, 그래도 안 바뀐다면 이 땅을 버리겠다.’ 이랬대요.

진짜 포기가 안 돼요. 어떤 분들은 그래요. 청해진해운한테 가서 그러지 왜 청와대한테 그러냐고. 사고였다고. 그러면 저는 이렇게 얘기해요. 오래된 배 증축하고 과적했던 거 청해진 해운이 잘못한 거 맞죠. 그런데 골든타임을 지키지 못한 건 해경이었다고. 해경이 애들을 단 한 명도 구하지 않았다고. 일말의 구조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고. 경비정 한 척, 헬기 세 대가 전부였어요. 한 명도 구조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한 명도 구조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위험하다고 나온 애들만 건져낸 거에요. 가만히 있으라고 했던 말 듣고 있었던 애들은 아예 안 구한 거고. 이제 와서 다들 발을 빼려고 하고 있어요. ‘배상’이 아니라 ‘보상’하는 거래요. 자기 책임이라 했던 대통령도 발을 빼고 있어요. 이상호 기자가 그러더라고요. 세 달 네 달 지나면 정부에서도 다른 이슈 같은 걸로 덮으려고 한다고요. 그런데 말이에요. 그 사람들이 간과한 건 이거 같아요. 자식 일이라는 거. 자식이 죽었는데 거기에 합의하고 포기할 부모가 없다는 거. 내 자식 문제, 내가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일이라는 거, 생각을 못한 거 같아요. 언론은 우리 일을 다뤄주지 않아요. 그래서 오늘처럼, 우리가 직접 다녀요.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얘기해요. 우리 아버님 같은 분들요. 나라를 상대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느냐고요. 그런데요, 우리 엄마들은 이기려고 싸우는 게 아니에요. 우리 죽고 나면 애들이랑 만나게 될 텐데, 그 때 ‘엄마는 그래도 최선을 다했다’라고, 말이라도 당당히 할 수 있어야죠. 그러고 싶어서 포기하지 않는 거에요. 싸워오면서, 몸도 지치고 정신도 지쳐요. 그런데 요즘요. 분향소로 김치가 그렇게 많이 와요. 얼마 전에는 춘천산골협동조합에서 김치 110 상자를 보내주셨어요. 제주 이런데서는 귤을 막 보내주세요. 진짜, 이런 생각이 들어요. 국가는 우리를 버렸는데 국민은 우리를 버리지 않았구나. 부산에 간담회가 잡혀서 갔더니, 간담회 시간 전에 영도다리도 구경시켜 주시고, 간담회 장소까지 데려다 주시고, 기다리셨다가 다시 역까지 데려다주시고 이런 분들도 계세요. 이런 분들 덕분에 힘을 많이 받아요. 간담회 하러 다니는 거 진짜 힘든데, 그러면서도 의지가 많이 돼요. 특별법 통과되고 이제 싸움 끝났다고 하는 분들 계세요. 그런데 저희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봐요. 1월 1일부터는 진상조사위원회 꾸려야 하거든요. 유가족이 추천하는 위원을 누구로 할지 투표해야 해요.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우리의 동력은 국민이라고 생각해요. 5년, 10년, 죽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테니까 끝까지 우리 손 놓지 말아주세요. 안전한 이 나라 만들어서, 이 땅에서 같이 살자고 하는 거에요. 모두 떠나지 않으려면 이 나라 바꿔서 살아야 해요. 국민의 힘, 보여줄 때라고 생각해요. 세월호는 이미 일어난 일이지만, 그래서 우리가 앞장설 테니 꼭 함께 해 주셨으면 해요.

예은이 엄마

다들 마찬가지에요. 4월 16일의 상황이 지워진 게 아니에요. 예은이가 없다는 게, 매 순간 슬퍼요. 간담회를 다니다보면 놀라요. 청소년들이 많이 찾아와요. 그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더 잘 알아요. 무엇을 잘못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요. 어떤 아이는 친한 친구 일곱 명을 잃었대요. 어른으로서 미안한 마음 뿐이에요. 대구에서 그랬어요. ‘내가 열심히 살고, 꿈을 꾸고 있는 것이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릴 수가 있구나’. 한 학생이 이번 일로 깨달았대요. 학생들 대부분이 자기들이 세월호 안에 있었던 것처럼 느껴요. 내가 저 친구들처럼 될 수도 있었다라고요.

예은이는 다람쥐 같은 아이였어요. 잠도 아끼고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위해 노력하는 아이였어요. 예은이는 음악 하고 싶어했어요. 타고 난 건 아니었는데요. 끊임없이 노력하는 아이였어요. 저는 몇 번이나 제지했어요. 그래도 예은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포기할 줄 몰랐어요. 수학여행 전날에도 학원에 갔었어요. 저는 여행가려면 피곤하니까 가지 말라고 했었거든요. 그래도 학원 안 빼 먹고 다녀와서는 짐 싸고 준비하고 했어요. 아마 1시가 다 돼서 잤을 거에요. 저는 예은이한테 네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했었어요. 세월호가 침몰하고 그 차가운 물 속에서, 예은이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파요. 꿈이 한 순간에 꺼져버리는 그 순간에, 예은이가 후회했을까봐서요.

아이들이 세월호를 느끼고 아파하고 있음을, 어른들은 책임져야 해요. 우리가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왔던 이유는, “우리는 안 돼.”, “해 볼만큼 하지 않았어?” 이 두 가지 때문이라고 봐요. 저도 가끔 ‘이렇게까지 해야할까?’ 생각이 들어요. 그럴 때마다 간담회에서 만난 청소년들을 떠올려요. 그럼, 답이 나와요.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파편처럼 세월호를 간직하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꼭 해야 해요. 이번에 못하면 죽어야 해요. 어른으로서 자격이 없어요. 아이 낳지 말아야 해요. 이 안전하지 못한 나라에서는 아이 낳는 것도 죄가 될 수 있어요.

저는 불평하는 거 싫어하는 사람이었어요. 내 탓이다, 나만 잘하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쪽이었어요. 그리고, 부정적인 말보다는 긍정적인 말을 하는 걸 좋아했어요. 그런데 세월호 참사가 저를 바꿨어요. 이번에 못 바꾸면 진짜 다 같이 죽어야 해요. 세월호 참사는 참사가 아니라 ‘사고’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맞아요. 사고에요. 그런데요. 구하지 않았잖아요. 구하지 않은 건 참사에요. 외신들이 취재하면서 가장 많이 했던 말이 뭔지 아세요? Mistery에요. 시간은 충분했어요. 해경이 갔어요. 구하지 않았어요. 어선들은 바삐 구하고 있는데 오히려 해경이 철수해요. 왜 그랬던 걸까요? 애들 갑판으로 다들 나오게 해서 뛰어내리라고 했으면 될 일이었어요. 주변에 어선들이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세월호 선장은 왜 주변 어선들과는 교신 안 하고 해경하고만 했을까요? 시간이 흐를수록, 증거가 자꾸 없어졌어요. 자꾸만 의심하게 돼요. CCTV, 그 CCTV들 사고 나기 얼마 전에 일순간 꺼져버리잖아요. ‘주희’라는 아이였는데요, 그 아이가 다섯 명 살아있다고 페북으로 했잖아요. 사고 해역에서 보낸 걸로까지 떴어요. 경찰은 아니라고 했어요. 그 다섯 명, 페북에서 말했던 그 자리, 같은 자리에서 다섯 명 같이 나왔어요. 확인절차도 안 거치고 그저 의혹으로 치부해 버렸던 것들이 있어요. 운항궤적도 조작했어요. 왜 교감 선생님은 먼저 조사해서 자살하게 만들고, 다른 배는 모두 출항금지 시켰으면서 세월호만 출항시켰는지 아직도 의문이에요. 아이들이 바다에서 사고를 당했잖아요. 근데 왜 산 중턱의 진도실내체육관으로 데려갔을까요. 거기에는 천막도 없고, 의료진도 없고, 구급차도 없고, 아무 것도 없었어요. 진짜 사복경찰만. 사복경찰만 진을 치고 있었어요. 국정원 직원 말로는 1,000명 이상 나와 있었대요. 구조 인력이 단 한 명도 없었던 것과는 너무 차이가 나는 거죠. 정치인들은 우리가 무슨 거지인 줄 알아요. 우리는 그저 진상조사를 요구했을 뿐인데요.

진상조사위원 투표를 해야 해요. 가족대책위 304명 중 2/3이 참석해서 2/3 이상이 찬성표를 던져야 해요. 걱정했어요. 2/3가 모일 수 있을까. 그런데요 300명이 참가하셨어요. 많은 부모들이 아직도 힘들어 해요. 부모가 아닌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옅어지는 모양이에요. 그런데 부모들은 안 그래요. 얼마 전에 눈이 내렸잖아요. 평생을 살면서, 그렇게 슬픈 눈은 처음 봤어요. 분향소도 쓸쓸했고요. 부모들 모두 숨죽였어요. 단원고는 벚꽃이 예쁘게 피어요. 아이들이 벚꽃 필 때 떠났는데, 어느 덧 눈이 내리는 계절이 왔어요. 이렇게 긴 시간이 흘렀는데, 아직 아무 것도 이뤄진 게 없어요. 지금도 우리를 떼어놓으려고 해요. 유가족이라면서 정치색을 띠고 있다, 이제 돈 받고 끝내라 이런 말들을 해요. 총회를 부결시키려고도 하고요. 부모들이 악다구니를 써도 우리 300여명의 입을 아무렇지 않게 막을 수 있는 정부에요. 꼭 국민 여러분들이 같이 해 주셔야 해요. 이 나라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야 해요. 힘 있는 사람들이 두려워 하는 것이 여론이고 국민의 눈이에요. 함께 해 주시기를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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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윤민이 엄마

요즘 들어서 달라진 건, 죽음을 보는 눈이에요. 죽음이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애들이 보기에 제가 좀 위험해 보이나 봐요. 제가 옷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요즘은 예쁜 옷을 보면 ‘됐어, 몇 번이나 입겠다고’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러다가 또 마음이 확 바뀌어서는 ‘얼마나 더 살겠다고’ 이러면서 사는 거에요. 그리고 요즘 부쩍 친구들이 보고 싶어요. 초등학교 동창들이 만든 산악회가 있는데요. 세월호 참사 터지고 한 번도 못 갔어요. 애들이 윤민이 나왔을 때 한 번 와 주긴 했었지만요. 한 번 쯤은 다시 얼굴을 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진짜, 죽음이 무섭지가 않아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런 거 같아요. 우리 윤민이,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태범이 아빠가 돌아가셨어요. 저는 그때, 이러면 안 되지만 이런 생각까지 했어요. ‘태범이 아빠 좋겠다. 태범이 만나겠네.’ 이런 생각이요.

다시 예은이 엄마

분향소에 애들 영정사진이 쫙 있어요. 현수막으로 보는 거랑 직접 보는 거랑 달라요. 사람들은 단원고 학생 중 한 명, 희생자들 중 한 명. 이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아니에요. 우리 가족에게는 우주였고요. 아이에게는 아이 나름의 인생이 있었어요. 저희도 평범한 사람이었어요. 이번 기회에 바꾸지 못하면 또 누군가, 저희처럼 아파야 하잖아요. 그런 건 원하지 않아요. 이런 일은, 저희로 끝내야 해요. 분향소에도 들러 주시고, 4.16 약속지킴이에도 함께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 사친촬영 : 뉴스Q 장명구 기자
■ 내용기록 : 사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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