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지 아버지가 후회하는 일은 두가지다. 결혼하고 18년이 다 되도록 가족여행 한번 못 간 일, 미지의 마지막 모습을 직접 보지 못한 일. 둘 다 회복 불가능하다. 미지 아버지 유해종 씨를 처음 만난 건 세월호 버스를 타고 조치원으로 서명 받으러 갔을 때였다. 조치원역 앞에서 서명을 받는데 인근 가겟집 주인이 불러 갔더니 대뜸 “1년에 사고로 천 명, 이천 명이 죽는데 삼백 명 죽은 걸 가지고 왜 이렇게 난리냐? 당신들 때문에 가게 안 되는 거 안 보이냐? 나라를 거덜낼 거냐?”고 했다. 길거리 서명을 숱하게 받아봤지만 이처럼 원색적인 비난은 처음이었다.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얘기하는 거 아니라고 소리 지르고 나니 내 눈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때 “너무 상처 받지 말아요, 다니다 보면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더라구요” 하며 어깨를 토닥이셨던 분, 미지 아버지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후 미지 아버지는 국회에서, 광화문에서, 세월호 사건의 진실을 알리는 곳이면 어디서든 볼 수 있었다.

5월 15일, 사고 난 지 한달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 못 올라온 사람들이 스물두명이었어요.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혹시나 마지막까지 남는 사람이 자기일까봐 다들 공포에 떨었어요. 미지는 5월 16일, 한달만에 나왔어요. 미지가 하도 안 나오니까 아무개 엄마하고 나하고 군청에 들어갔어요. 날마다 9시에 군청에서 회의를 했거든요, 대책회의를. 그 자리에 들어가서 해수부장관 붙잡고 욕도 해가며 엄청나게 싸웠죠. “왜 거기는 안 들어가느냐” 그러면 해수부장관이 해경 국장 보고 “분명히 들어가서 오늘은 작업해라” 명령을 딱 내리거든.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그렇게 하는줄 알았지, 근데 바지선을 타고 가서 보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거야. 그러면 찾아가서 또 싸우고 멱살 잡고 때려죽인다고 난동을 부렸지. 왜 작업을 안 하냐고 하면 거긴 무너질까봐 위험해서 들어갈 수 없다고 해. 무너진다고 안 들어가면 나머지 애들 어떻게 찾을 거냐고 항의하면 그제서야 통로를 다시 개설하는 식이었어. 그렇게 며칠을 항의하고 찾아가니까 창문을 절단했던 거고 그렇게 해서 들어가는 도중에 미지가 올라왔거든. 전전날인가 바람이 좀 많이 불었어. 바람 때문에 파도가 치면 물결이 왔다갔다 하면서 쌓여 있던 것들이 움직이잖아, 그때 눌려 있던 애들이 올라올 수 있다는 거지. 우리 딸 있는 데도 원래 수십번을 찾았어요. 얘도 아마 어딘가에 눌려 있다가 물결에 쓸리면서 올라온 거 같아. SP1(객실이름)에 들어 있는 게 아니고 SP2(객실이름)에 눌려 있다가 올라온 것 같아요. 체육관에서 한 사람 한 사람 줄어가는데 그 마음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 초조하고 내 딸이 유실됐나, 인원이 줄어드니까 머릿속이 온통 다 그런 생각밖에 안나. 막상 내 딸이 나왔는데 나머지 유가족들을 못 보겠더라구. 여기 누구 엄마, 여긴 누구네, 여긴 선생 그 다음에 나, 이렇게 넷이 다 같이 모여 있었어. 그중 나만 나왔어. 생각해봐. 다 안 나온 중에 나만 나왔다니까. 그날 미지 데리고 오는데 그간 동고동락했던 사람들 얼굴을 볼 수가 없더라구. 미안하고 죄스럽고. 지금도 다 안 나왔어. 그 사람들이 어깨 툭툭 치면서 축하한다고 그래. 근데 거기서 축하한다는 인사를 받을 수 있냐고, 그 상황에서.

우린 미지가 어떻게 죽었는지 몰랐어. 근데 친구 한명이 유난히 많이 울더라고. 그리고 미지 책상에 “미지야 너무 보고 싶다, 너한테 너무 많이 미안해” 이렇게 적어놨어. 우리는 그 아이가 왜 그렇게 통곡했을까 궁금해서 좀 만나고 싶었어요. 근데 2학년 1반 생존학생이 안산법정에서 증언을 했대요. “반장 때문에 살았다, 반장이 선장 역할 다 했다. 반장이 지금 우왕좌왕하지 말고 조금 있다가 나가자. 지금 문을 못 여니까 물이 좀 찬 다음에 나가자,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나가자” 이랬다는 거야. 미지는 아마 위에 있다가 다시 배 밑으로 들어간 것 같아. 밑에서 한 사람씩 올리고. 근데 그 아이가 올라가려고 하는데 물에 쓸렸대요. 그래서 걔도 죽는구나 생각했는데 마침 봉을 잡고 있어 간신이 살았대. 자기까지만 살고 밑에 있는 애들은 쓸려 들어가버리고. 걔가 올라와서 해경한테 울면서 저 밑에 우리 친구들 많으니까 구해달라고 했는데 안 들어가더래요. 미지는 맨 밑에서 걔까지 올려주고 물에 쓸려서 소식이 없었던 거지. 저도 생존자 말이 없으면 우리 딸이 그랬는지 몰랐을 거야. 그게 언론에 엄청 떴어. 2학년 1반 반장은 반장 역할 다하느라 살아나오지 못했다고. 아마 포털사이트 들어가면 지금도 있을 거야. 우리 딸이 거기서 뭐 반장이라는 책임 때문에 그랬던지는 몰라도 걔가 평소에 남을 많이 끌어안는 성격이야. 자기보다 못한 사람 이렇게 지켜주고 끌어가는 성격이거든. 대안학교 졸업하고 일반 고등학교 진학해 2학년 되더니 ‘반장 나가면 어떻겠냐’고 물어서 미지 엄마가 그냥 원하면 하라고 했대. 미지 엄마는 애들의 증언 듣고는 너무 괴로워했어. 분명히 사고 당일도 아이들 챙기느라 자기를 돌보지 못했을 거라고. “지는 못 나왔으면서, 지는 좀 살아나와야지, 반장만 아니었으면 살아 나왔을 텐데” 하면서 많이 자책했어. 미지 엄마한테는 “미지 같은 성격은 반장 안했어도 그 책임은 다 했을 거다. 그러니까 당신은 애를 잘 기른 거다” 그렇게 위로를 해주긴 했는데 잘 모르겠네. 책임감 있는 사람이 훌륭하다는 건 아는데 미지가 그렇게 가고나니 잘 모르겠어. 훌륭한 게 뭔지.

처음 후지TV 기자가 인터뷰하자고 연락했을 때는 안 하려고 했어요. 산 애들은 그렇게 한다지만 죽었는데 인터뷰 하면 뭐하나. 그리고 지난 기억들 다시 떠오르는 거 싫었거든. 그런데 기자란 분이 “생존학생들이 하는 말이 반장이 선장 역할을 다 했다 걔 때문에 살았다 그래갖고 학생들이 너무 많이 울더라” 그러더라구. 어차피 딸은 죽어서 살아오지 않지만 그런 일은 세상에 널리 알리는 게 괜찮지 않겠나 싶어 인터뷰에 응하게 됐지. 일본 입장에선 이웃나라 일 일 뿐이고 자기네하고는 아무런 관련도 없잖아. 그런데 그 사람들은 열과 성의를 다해서 보도해주더라구. 우리나라 같이 이런 게 아니야. 해설위원하고 기자들이 진지하게 대화를 많이 하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며 솔직한 말을 다 하더라구. 우리나라는 감추기에만 급급한데… 방송 만든 거 봤는데 사실 자꾸만 그때 상황을 상상하게 되니까 우리들(유가족) 입장에선 정말 괴롭긴 하데. 아, 못 보겠더라고. 나도 그러려니 생각을 하고서 보기 시작했는데 속에서 울화가 치밀고 미치겠더구만. 저놈의 새끼들이 나가라고 했으면 다 살고 지금도 막 웃으면서 대화했을 텐데 그렇게 없어졌다고 생각하니까. 지금도 집에 가 있으면 10시 반만 되면 꼭 문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애. ‘아빠 다녀왔습니다’ 이렇게. 그 시간되면 쳐다봐. 우리 집안에 아주 고명딸인데. 애기였을 때부터 크면서 속을 안 썩였어. 애기였을 때는 너무 편하게 잘 있었고 학교생활도 사춘기도 심하게 한 게 없어. 생을 짧게 살고 간 게 그게…

미지가 나하고 농담을 잘해. 생전에 나랑 팔짱 끼고 드러누워서 “아빠, 이다음에 내가 아빠 비행기 태워줄게” 했어. 그 말 많이 하잖아. 딸 낳으면 비행기 탄다고. 한 200번(시신 수습 순서) 전까지는 앰뷸런스 타고 올라왔을 거야. 그뒤부터는 훼손이 많이 돼서 바로바로 올라가야 되니까 헬리콥터를 타고 간 거야. 근데 미지가 나왔는데 그 생각이 딱 나는 거야. 헬리콥터를 딱 탔는데. 아유, 이 자식이 죽으면서까지 비행기를 태워주는구나. 내가 왜 연관을 거기다 지었는지, 그러면 안 되는 건데, 그때 딱 그 생각이 나더라니까. 봐봐, 먼저 나왔으면 앰뷸런스 타고 올라왔을 건데 늦게 올라와갖고 헬리콥터 탄 거, 그것도 비행기잖아. 그죠? 그때 울음이 나더라고. 헬리콥터로 올라오는 동안 내내 관 옆에서 울었어. 와, 이 자식이 죽으면서까지도 약속을 지키려고 그랬을까.

* 기록 및 재구성: 정미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