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이 어머니는 “나가서 한 일도 없는 사람이 유가족 구술 작업에 함께해도 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결국 첫 인터뷰 직후 자기가 이 작업에 끼는 건 옳지 않은 것 같다며 고사하는 전화를 걸어왔다. 딸의 이야기를 책으로 남기고픈 욕심이 왜 없었을까. 그런데도 어머니는 앞장서서 일하셨던 분들의 이야기가 먼저 담겨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인터뷰 내내 자기의 고통이나 딸에 대한 사랑을 드러내어 이야기하기보다 ‘다른 부모님들도 다 그랬을 거다’ ‘사고 난 아이들이 다 그렇다’라는 말을 잊지 않고 덧붙이곤 하던 그의 마음이 새삼 느껴졌다. 길채원의 어머니, 허영무는 그런 사람이었다. 간신히 다른 유가족의 설득으로 어머니는 마음을 되잡았고, 그렇게 그와 그의 딸 채원이의 이야기가 이 책의 한 자락에 담겼다. 그의 이야기는 통곡이 아니라 흐느낌조차 새어나오기 힘든 억눌린 슬픔에 가까웠다. 부모로서, 신앙인으로서, 시민으로서 끝도 보이지 않는 고통과 혼란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철이 지났다며 부랴부랴 짐을 싸는 이들이 보여준 애도의 깊이가, 잊지 않겠다던 약속의 호흡이 얼마나 얄팍한 것이었나 돌아보게 된다. 슬픔 속에서도 어머니는 한걸음씩 내딛고 있는 중이다. 그에게는 슬픔을 멈추지 않을 권리가 있다.

수학여행 가던 날 애를 학교 앞에 내려주었을 때, 그때 왜 아무런 느낌이 없었을까. 왜 아무런 불길한 느낌을 갖지 못했을까. 그 전날 애 아빠가 꿈을 꿨어요. 꿈에 어머니, 아버지가 보였는데 배추밭 농사가 엄청 잘됐대요. 배추가 어떻게 이렇게 예쁘게 잘 컸나 그랬는데 돌아서고 나니까 배추가 몽땅 죽어버렸대요. 아침에 그 이야기를 하면서 애 아빠가 불길해하더라고요. 그때 우리집 문제는 내가 아픈 거밖에 없으니까 ‘아니야, 여보. 이제 좋은 일 생기려고 그래. 잊어버려’, 그렇게 애 아빠를 다독여 보냈어요. 그 다음날 사고가 났어요.

오전 10시가 될 때까지 뉴스를 틀어놓지 않아서 몰랐어요. 애들 작은고모가 전화 와서 사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실감이 안 났어요. 영화를 봐도, 자동차 내비게이션만 봐도 너무 발달한 세상이잖아요. 우리 애는 구조가 돼서 보트에 타 있거나 섬에 가 있다고 생각했지, 그 많은 사람들이 나오지도 못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신호는 가는데 안 받더라고요. 혹시라도 밧데리가 닳으면 안 되니까 문자만 몇개 넣어놓고 연락도 안 했어요. 애 아빠도 담담하게 반응했어요. 설마 이럴 줄 몰랐으니까. 12시쯤 애 아빠가 집에 와서 단원고에서 문자가 왔다고, 다 구조됐다더라 하대요. 그럴 거라고 믿고 안심했어요. 학교에서 그랬어요. 애들 올라오는 버스가 준비되어 있으니까 길이 엇갈리지 않게 기다리시라고. 혹시라도 가보고 싶은 분들은 버스 대절했으니까 내려가시자고. 애 아빠는 자기 차로 가고. 부평 사시던 채원이 고모도 진도로 달려 내려가고. 그게 시작이에요.

그때 8차 항암치료 중이라 정말 힘들었어요. 다시 하자고 하면 못할 거 같은데. 제가 팽목항에 가려고 하니까 애 아빠가 내려오지 말래요. 나까지 어떻게 되면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잖아요. 작은애도 있고. 미리 소식을 안 사람들은 학교에 가 있었더라고요. 학교 가서 난리 치고 했다는데 저는 집안에서 숨어 있던 꼴이 된 거죠. 저희 성당 신자들이 소식 듣고 집으로 달려와 묵주기도를 계속 해주고 있는데도 우리 애가 살아 있다는 느낌, 기도가 되고 있다는 느낌이 없었어요. 그러다 첫 시신으로 나온 애가 있었잖아요? 걔가 너무 안 된 거예요. 그러다가 점점 더 느낌이 안 좋더라고요. 애 아빠도 팽목항 내려가는 동안 전화 받는 목소리가 점점 더 안 좋아지고. 뭔가 사고가 크게 났구나 싶었어요. 저녁 무렵이 되니까 티비를 도저히 보고 있을 수가 없더라고요. 채원이 방 침대에 누워 채원이 액자사진 끌어안고 계속 울다가 잠이 든 것 같은데 이틀 후에 정신을 차려보니 동네병원에 있더라고요. 제가 계속 일어나질 못하니까 남동생이 입원을 시켰대요. 저는 그때 일이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요. 17일에 침대에서 일어나서 핸드폰도 만지작거리고 그랬다는데 누가 다녀갔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 기억이 없어요. 그러고 일주일 동안 병원에 있었어요.

그냥 4월 16일 이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그날 이후 모든 시간이 꿈 같아요. 채원이가 간 다음에는 순간순간이 다 새롭고 처음이니까. 그 처음을 시작하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제일 힘든 게 주말이에요. 식구들이 다 함께 있으면 사람이 하나 빠진 상황을 어쩌질 못하겠는 거예요. 어디다 화를 내야 하는지 모르겠고. 이번 추석 때도 죽는 줄 알았어요. 식구들 셋이 아무데도 못 가고 우리들끼리 있는데 정말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거예요. 그때 폭발할 것 같더라고요. 아직도 실감 안 나요. 우리 애가 어떻게 됐다는 게. 걔랑 많이 다니던 동네를 다시 가게 되거나 예전엔 넷이 타던 차를 걔 없이 탔을 때나 뭐든지 그 생경한 첫 느낌. 그 아이랑 함께했던 공간과 시간을, 아이 없이 모두 다 새로 시작해야 하는 거더라고요.

사람들이 나보고 속에 있는 얘기를 하라고, 혼자 있으면 안 된다고 얘기를 하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관계가 만들어지는 게 너무 피곤해요. 나 자체로도 힘들고 가족끼리 있는 것도 너무 힘들고… 트라우마라는 뜻이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공포감이 떠나질 않아요. 나가서 사람들 만나면 웃으면서 얘기하기도 하는데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 두려움이란… 내일 일이 너무 무서워요. 작은애가 하다못해 자전거를 타고 나가도 너무 무섭고. 내가 알던 국가라는 게 이런 건지도 몰랐고. 내가 이렇게까지 세상을 모르고 살았구나. 영화 속 세상만 앞서가지, 진도에서 일어난 일은 정말 미개한 수준이고. 내가 그 속에 껴 있는 것도 너무 힘들고…

감정을 느낄 수가 없어요. 누가 아프거나 다쳤다고 하면 마음이 아파야 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멍해요. 그러고 조금 뒤로 물러나서 생각하면 ‘아, 이건 아픈 거구나. 아파해야 하는 거구나’라고 머리로 생각하고 그때서야 감정을 개입시키더라고요. 얼마 전에 저희 성당 자매분이 교통사고가 .났어요. 다행히 많이 안 다쳤다 해도 사고가 크게 났는데, 그 얘기를 듣고 놀라야 하는데 놀라는 게 아니야. 그 상황이 그냥 언어로서 내 귀에 들어오지 감정으로 전달이 안 돼요. ‘어머,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이러면서 하나하나씩 단계를 밟듯이 감정을 느끼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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