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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되는 의료민영화] ④ 우려스러운 의약품 정책의 친기업적 방향
의약품 정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안전성·유효성이 검증된 제품을 적절한 가격에 공급하는 것이다. 이런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 환자는 안전하지 않거나 효과 없는 의약품을 값비싼 가격에 복용해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 그런데 이 기본원칙이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부터 ‘제약산업 육성’과 ‘바이오헬스 산업 강화’라는 구호 하에 서서히 무너져왔다. 국민들은 생명과 안전을 기업의 먹거리로 팔아넘기는 이 정부들에 분노했고 촛불을 들었다.
문제는 문재인 정부도 이런 규제를 원상 복귀시키기는커녕 이전 정부들의 정책을 답습하려는 방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심지어 이전보다 안전장치를 더 해제하려는 움직임조차도 있어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민주당 보건복지위원회 간사 기동민 의원이 정부정책방향에 따라 발의한 ‘공중보건 위기대응 의약품 및 혁신신약 개발지원법’이 대표적이다. 주된 내용은 ‘혁신신약’의 규제를 완화하는 것이다. 핵심은 ‘조건부 허가’다. 임상시험은 1상, 2상, 3상 순서로 진행되는데 3상 시험 없이 의약품을 통과시키자는 것이다. 3상 시험은 환자군 다수를 대상으로 약의 안전성·유효성을 확증하는 절차다. 기업 입장에서는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고 통과하기 어려운 절차이지만, 약을 복용해야 하는 환자 입장에선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이 뿐만 아니라 제약기업을 위해 허가과정을 간소화하는 많은 내용들이 담겨 있다.
규제를 완화해준다는 ‘혁신신약’이란 대체 뭘까? 이름만 들어선 정말 혁신적 약인가 싶지만 실제로는 ‘혁신형 제약기업’이 개발하는 약이고, 복지부 장관이 지정하기만 하면 혁신형 제약기업이 된다. 현재 무려 41개사가 인증을 받았고 이들 기업이 차지하는 시장점유율이 50%를 넘어선다. 사실상 주요 제약기업들 모두에게 임상 3상을 면제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혁신신약’이란 말장난에 불과하다. 의약품의 ‘혁신성’이란 안전과 효과의 월등한 향상을 말하는데, 점쟁이가 아니고서야 임상시험도 다 거치지 않은 약이 안전하고 효과가 있는지 알 방법이 있는가?
이 법안은 박근혜 정부에서 추진됐던 정책과 매우 유사한데, 이들의 공통된 주장은 의약품을 신속하게 허가해주어야 국민건강권이 향상된다는 것이고 국내 제약기업의 투자의욕이 향상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거의 경험은 정 반대의 역사를 증명한 바 있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의약품의 안전성을 확보해야 국민건강권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탈리도마이드’ 사건이 대표적이다. 임산부의 입덧치료제로 각광받았으나 유럽에서 8000만 명의 기형아 출산을 일으켰고, 이 약 허가에 신중했던 미국만이 자국민의 희생을 막을 수 있었다. 2000년대에 관절염치료제 ‘바이옥스’는 펩시콜라보다도 많은 1억6000만달러를 쏟아부으며 획기적 신약이라고 광고됐지만, 다른 치료제에 비해 심장병 사망을 5배나 높인다는 것이 밝혀졌다. 비만치료제로 각광받던 시부트라민(‘리덕틸’)도 심혈관질환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역시 퇴출되었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최근 국내에서 3상 조건부 허가를 통해 도입된 폐암치료제 올리타정도 임상시험 중 치명적인 부작용이 밝혀지면서 개발·판매가 중단되었다.
연구에 따르면 초기 임상단계(임상1상)에 진입한 약물이 모든 단계를 거쳐서 제품으로 출시할 확률은 10%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대한 질병에 쓰인다는 이유로 초기임상단계만을 거쳐 허가를 내주는 행위가 과연 환자의 건강을 위한 것일까? 허가 기간이 단축되면 부작용이 늘어난다는 보고도 있다. 허가기간이 매 10개월 단축될 때마다 심각한 부작용은 18.1% 증가하고, 신속심사로 허가 받은 약은 심각한 부작용으로 인한 시장퇴출 가능성이 6.92배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미 희귀질환이나 암 같은 중대한 질환은 조건부허가를 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허가기간을 단축하고 조건부 허가를 더 광범위하게 허용하는 것은 의약품 관리 기본원칙을 망각하는 행위이며 중대질환 환자의 접근성 향상이라는 미명하에 정작 환자들의 건강에 위해를 가하는 짓이다. 충분한 심사를 할 수 있는 시간과 인력, 재정의 뒷받침 없이 허가 단축에만 무게중심을 두는 것은 국민건강은 도외시 한 체 제약기업에게만 이익을 주겠다는 행위이다.
최근 전 세계 의약품 시장에서 10대 의약품 중에 8개가 바이오의약품인데 ‘혁신성장’이란 명목으로 이 분야에 대한 규제완화 흐름도 강력하다. ‘첨단재생의료 및 첨단바이오의약품에 관한 법’이라는 이름으로 조건부허가를 포함한 의약품 허가규제 완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지난 8월에는 삼성 이재용 회장이 김동연 당시 경제부총리를 만나 오리지널 바이오의약품 약가인하를 막아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국내 기업 가격경쟁력을 위해 환자 의료비를 높이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황당하게도 부총리는 고려해보겠다고 답했다. 약값을 결정하는 곳은 보건복지부인데 경제부총리가 이에 화답한 것도 매우 부적절했다. 이미 박근혜 정부 때 바이오의약품에 대해서는 10% 이상씩 가격을 인상해주는 조치가 있었다. 이것도 모자라 삼성바이오에피스 사장은 다른 나라는 약값을 민간에서 자율적으로 결정한다는 사실도 아닌 이야기를 하면서 규제를 완화해달라고 했다. 그래야 투자의욕이 높아진다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면서.
우리나라는 지금도 효과가 입증되지 않았거나 효과 대비 비용이 너무 비싼 약의 경우에도 보험 적용을 해주고, 제약기업들을 위해 약가를 우대하는 등 제약기업의 이해관계에 치우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오히려 규제를 강화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혁신성장이라는 기조 하에 의약품 분야에서 펼치는 규제완화 흐름은 박근혜 정부가 추진하던 의료민영화와 정확히 닮아 있다. 혁신으로 가장해 기업의 이윤은 늘리지만 국민의 건강권은 도외시하는 행위이다. 정부와 여당은 과거에 자신들이 반대한 의료민영화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한번 살펴보기 바란다. 지금 자신들이 하고 있는 정책들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을 깨달을 것이다. 정부는 의약품 규제완화와 의료민영화 정책들을 철회하고 환자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 의약품의 공적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진정으로 국민의 건강권을 향상시키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