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5월 15, 2015 - 12:11
부산참여자치시민연대Citizens' Solidarity for Participation and Self-Governance of Bu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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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참여자치시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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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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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5. 15.(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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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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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김형률 서거 10주기 추모 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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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률 서거 10주기 추모 문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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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시 : 2015년 5월 22일(금) 오후 7시-9시
* 장소 : 부산시청자미디어센터 (지하철 2호선 센텀시티역 4번 출구)
* 주관 : 김형률을 생각하는 사람들, 민주공원, 부산녹색당, 부산지하철노동조합, 부산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 아시아평화인권연대, 에너지정의행동, 평화박물관, 한국원폭2세환우회, 호랑이출판사, 부산참여자치시민연대, 녹색연합, 부산환경운동연합, 반핵부산대책위원회,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부산경남지부
한국원폭2세 환우회 김형률 초대 회장의 서거 10주기 추모 문화제를 알립니다. 2005년 5월 29일 만 서른다섯을 앞둔 나이로 생을 마감한 김형률 회장은 한국 인권운동의 새로운 장을 개척하신 분입니다. 선천성 면역글로블린결핍증이라는 지병을 앓던 그는생애의 마지막 몇 해 동안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인 핵폭탄 피해자 2세의 비참한 상황을 사회에 알리며 동분서주하다 기력을 소진하여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직 핵의 위험성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부재하던 시절에 그는 핵을 인간의 존엄성 자체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인식했던 선각자였습니다.
1. 한국인 핵폭탄 피해자란?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전체 원폭피해자 수는 대략 70만 명으로, 그 가운데 10% 가량인 7만여 명이 한국인이었다. 이들 희생자의 대부분은 경상남도 합천과 경기도 평택에서 건너간 사람들이다. 이들은 일제의 경제 수탈에 따른 경제적 곤궁으로 일자리를 구하러 일본으로 건너갔거나, 1940년대 이후 전시의 강제 부역으로 일본으로 끌려가서 어쩔 수 없이 원폭 현장에 있게 된 사람들이었다. 8.15 이후 이들 가운데 생존자의 대부분은 고국으로 귀향했으나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아무런 의료적, 경제적, 정신적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질병과 가난을 대물림하면서 살아왔다. ‘유일한 피폭 국가’임을 내세우는 일본도 한국 원폭피해자들을 철저히 도외시했다. 1965년 한일 간의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질 때 맺은 이른바 ‘청구권협정’으로 국가적 보상은 완료되었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주장이다. 한국 원폭피해자들은 피폭 후 20여 년이 지난 1967년에 와서야 비로소 사단법인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를 결성(1971년 ‘한국원폭피해자협회’로 개칭)하여 끈질긴 권리투쟁을 벌였으나 계속되는 세상의 무관심을 타파하지는 못했다.
김형률의 모친 이곡지도 이러한 경우였다. 이곡지는 피폭으로 부친을 잃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조부모의 고향인 합천으로 귀향했으며 1960년 결혼했다. 원자폭탄 피해자의 자녀들의 일부는 김형률의 경우와 같이 각종 유전병에 시달리고 있으며 각자의 병고를 오로지 개인적인 문제로만 여기도록 강요되어왔다.
1970년 7월 28일 부산에서 태어난 김형률은 2002년 3월 22일 한국청년연합회 대구지부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이 원폭후유증을 앓는 핵폭탄 피해자 2세임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때부터 김형률의 인권운동은 본격화되었고, 한국인 핵폭탄 피해자 문제를 세상에 알리는 데 온몸을 바쳤다. 이는 부산 지역을 넘어 한국 시민사회운동 전체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2. 행사의 배경과 취지
이번 추모 문화제는 고(故) 김형률 회장이 생전에 우리 사회에 제기한 문제를 그분의 서거 10주기를 맞아 되새겨보고자 하는 취지로 마련되었습니다. 김형률은 자신을 ‘원폭 2세 환우’로 규정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정체성은 한국 반핵 운동의 활로를 열었습니다. 김형률은 자신이 전개한 운동이 “스스로 인간된 권리를 되찾기 위한 인권회복 운동”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운동의 핵심은 원폭피해가 유전된다는 인식에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핵폭탄 피해자들이 원폭의 유전성 여부를 금기시해온 것은 피해자의 자녀들이 혹여 받을지 모를 사회적 차별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오랜 억압을 타파한 것이 바로 부산 시민 김형률의 위업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지병을 개인적 운명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원폭피해자 인권의 문제로 인식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픔이 역사적 상흔임을 몸소 체득하고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사회와 국가가 나서야한다는 점을 부단히 역설했습니다. 원폭유전병과 사회적 차별에 시달리는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현실을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김형률의 노력은 2000년대 한국사회에서 뒤늦게 꽃핀 소수자의 인권회복 운동의 일환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사회적 기본권 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생명권’을 쟁취하기 위한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역사적 가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김형률의 활동은 ‘탈핵’이라는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직면한 우리에게 분명한 원칙을 제시해줍니다. 비록 그는 시대적 제약으로 인해 핵발전소 문제에 천착하지는 못했지만, 만약 그가 현시점에 살아있다면, 분명 우리에게 사안의 핵심은 ‘인권’임을 역설했을 것입니다. 핵무기이던, 핵발전소이던 간에, 핵의 군사적 혹은 ‘평화적(?)’ 이용이든 간에, 핵은 인간의 생명과는 결코 공존할 수 없다는 점이야말로 그가 우리 사회에 던진 메시지입니다.
3. 행사의 내용
▢ 1부 - 북콘서트
◾추모영상 ‘아들의 이름으로’(박일헌 감독)
◾아오야기 준이치(코리아문고 대표) 김형률 유고집 ‘나는 반핵인권에 목숨을 걸었다’ 출판기념 북콘서트
- 진행 : 박광주(부산대 교수), 전진성(부산교대 교수)
▢ 2부 - ‘김형률 세계를 말하다’ 토크콘서트
◾추모공연 가수 이지상
◾고 김형률 회장 부친 김봉대님의 NPT(Non-Proliferation Treaty 핵확산금지조약) 대회(지난 4월말 미국 뉴욕에서 열림) 참가 보고 및 대담
- 진행 : 정희준(동아대 교수)
보고 및 대담 : 김봉대(한국원폭2세환우회 고문), 한홍구(성공회대 교수)
▢ 행사 순서 및 진행 시간
◾19:00~19:05 인사말
◾19:05~19:15 추모영상 상영(아들의 이름으로)
◾19:15~19:50 북콘서트(아오야기 준이치)
◾19:50~20:00 휴식
◾20:00~20:20 추모공연(이지상)
◾20:20~21:00 김형률 세계를 말하다(김봉대)
4. 추모문화제 다음날 10주기 추모식 - 민주공원에서
추모 문화제가 열리는 다음날인 5월 23일(토요일)에는 민주공원 공연홀에서 오전 11시부터 약 1시간 반 예정으로, 김형률추모사업회(회장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주관하는 ‘김형률 10주기 추모식’이 거행됩니다. 시민에게 열려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