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소개]
평양남북협상의 인상
최성복 조선일보 특파원
이번 호에 소개할 자료는 신천지 1948년 4·5월 합병호에 실린 최성복(崔成福) 기자의 「평양남북협상의 인상」이다. 최성복 기자는 4월 19일 김구 선생의 북행길을 동행하여 5월 6일 서울 귀환 때까지 남북협상의 긴박했던 순간들을 밀착 취재했다. 4월 23일 대표자 연석회의(최종일) 회의 장면, 25일 연석회의를 경축하는 군중대회, 황해제철소 참관, 김구 선생과의 단독 면담, 김일성 위원장의 남북협상 관련 기자회견, 5.1절군중기념대회 등 당시의 역사적인 주요 장면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 편집자
최성복 특파원은, 김구 선생이 남북협상을 위해 평양으로 간 사실을 동행 취재해 기사를 송고했다.(조선일보 1948. 4. 21일자 기사) 사진은 38선상의 김구 선생과 아들 김신(오른쪽), 비서 선우진(왼쪽)
평양 가는 도중
김구(金九) 씨가 4월 19일 오후 4시 반경에 홀연히 경교장을 떠나 자가용으로 여현(礪峴) 3·8선 경계선을 넘은 때는 벌써 그날 아침부터 평양에서는 남북 제(諸)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가 막 열리고
있었다. 기자가 아차 뒤졌구나하고 부랴부랴 김구 씨의 뒤를 따라 나선 것이 겨우 그 이튿날인 20일 저녁 황혼이 내리기 시작한 무렵에 어구인 같은 행로로 3·8선을 넘었던 것이다. 여현서 알아봤더니 김구
씨는 이미 자가용으로 평양에 들어섰으리라 했고 회의는 한창일 것이라고 들어 매우 초조하였다. 이번 협상은 왜 그런지 김구 씨에게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양 싶어서 될 수 있는 대로 씨의 꽁무니를 꼭 따르려 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한편으로 마음이 놓이는 것은 그날 아침에 나보다 먼저 대여 왔다는 조소앙(趙素昻) 조완구(趙琬九) 엄항섭(嚴恒燮) 제씨 등 요인측에 들 만한 인사들이 아직 못 가고 “어서 가야겠는데…
” 서두르고 있었고 정작 트럭을 타려고 나와 보니 신문기자며 우익측 정당사회단체 사람들이 한 70여 명 웅성거리고 있었다. 왜들 못 갔느냐 물었으나 “통 알 수가 없다”고 역정을 내고만 있었다. 아무튼 이렇게 한물커니 몰려서 요인급들은 지프(소련군이 사용하던 것)에 타고 나머지는 트럭에 분승하였다. 이리하여 김일성(金日成) 장군과 스탈린 씨 초상을 옥내외에서 흔히 볼 수 있었고 마을 요처마다 기관 정문마다 세워놓은 아치 판상(板狀)을 무슨 각(角)기둥으로 럭비 골문처럼 세워 대개 붉은빛 간혹 시퍼런 빛 페인트로 진하게 칠한 아치 그 기둥 안팎에 혹은 벽마다 삐라나 포스터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찬양하는 여러 표어이며 단정단선(單政單選) 반대의 갖은 표어를 여백이 없다시피 써붙인 특이한 환경에 이국조(異國調)를 맛보면서 여현을 떠났다.
평양으로 가려니 했으나 새로 1시경 남천에 들어서서 여관에 머문 채 이틀 동안 외출도 못 하고 부질없는 불안과 초조 속에서 지냈다. 조소앙 씨 등 요인들은 그 이튿날로 평양행 했다는 둥 홍명희(洪命憙) 씨 일행은 딴 행로를 잡아 벌써 입양(入壤)했다는 둥 뒤미처 김박사(김규식을 말함-편집자) 일행 수명이 이곳 남천을 통과해 갔다는둥 이런 뉴스도 방안에서 잘 먹고 뒹굴면서 들었다. 투숙하는 동안에 내무서원(사법관) 몇 사람이 번갈아 찾아와서는 “매우 불편하시겠으나 예상 인원이 훨씬 초과해서 갑자
기 준비를 하느라고 더디는 모양이니 양해하시고 조만간 평양행은 틀림없습니다”라고 정중하게 위안인사를 하는 한편, 소위 단체의 사정이며 직업 내력 같은 것을 한 사람 한 사람 정중하게 캐묻고 적곤 하였다. 이러다가는 회의를 보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그 점만이 안타까웠다. 드디어 23일 새벽 3시쯤 해서 내무서원이 찾아와 “동무들 가십시다” 하는 소리에 선잠을 깼다. 어떻게 반가운지… 그러나 분숙(分宿)했던 70여 명 중 반수만은 다음 차로 가라고 지명하여 내 옆에서 자던 무슨 우익청년단
체 대표인 듯한 이북인 한 사람은 그만 낙심해 “아마 우린 못 가게 생겼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 후에 들었는데 이 예언대로 그 반수는 종내 못 가고 남천서 돌아오고만 모양이었다. 이렇듯 당국측 사정에 따라 사람을 가려서 추려낸 듯한 우리 선발 일행은 깨끗이 치운 특별열차 2등실에 올라 흔들리면서 철도 연변에 전개되는 농촌풍경―유난히 눈에 띠는 새 지붕이며 신축가옥 그리고 가지런하게 도린 수숫대 울타리, 파종이거의 끝나간 것 같은 밭이랑 등에 어딘지 모르게 정돈감을 느끼면서 이윽고 평양역에 다다라 대기했던 버스로 제가끔 일류여관에 행장을 풀었다. 조반을 들고 있노라니까 내무서원인 듯한 눈초리 매서운 양복신사가 들어오더니 곧 회의에 참석하도록 대표증을 교부할 터이니 신임장을 보여달라고 하였다. 공교롭게도 신임장을 남천 내무서에서 걷어간 채 그럭저럭 못 받아가지고 와 꺼림칙하던 참이라 중언부언 사정을 말했으나 언하(言下)에 “아니 되오” 하고 거절하였다. 굳이 사정사정해서 간신히 신임을 얻어 순국문으로 된 ‘대표증’을 받고 안심했다. 동숙한 모사 기자도 얻으려다가 단체대표의 신임장 없이는 어떤 사람이고 안 드린다고 하는 바람에 “그럼 신문기자는 모처럼 왔다가 낮잠만 자구 가란 말이오. 회의 보도는 어떻게 하려구 하는 거요” 건드려 봤으나 “ 이번 회의는 신문기자 회의가 아니오. 여기 기자들도 일절 못 들어가오. 보도는 서기국에서 내주는 대로 하면 될 거요” 하고 딱 끊고 나가버렸다.
연석회의
남조선에서 이른바 남북협상회의를 거기서는 남북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라고 불렀다. 이 회의가 벌써 19일부터 열리고 있어 이날 23일은 맨 끝장날인 것을 평양 가서 ‘대표증’을 교부받으면서야 알았다. 늦었으나 마지막 날이나마 참견(參見)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알았다. 그럭저럭 하는 동안에 오전 회의는 벌써 지나고 부득이 오후 1시부터 속개되는 최종회의에 가기로 되었다. 마침 조반상을 물리러 온 보이가 신문을 한 아름 가져다주기에 뉴스에 한참 굶주렸던 터라 와락 펼치고 눈을 꼬챙이로 들여
다보았다. 4, 5종 모두 기관지인데 하얀 대형용지가 부러웠다. 체재와 내용이 모두 한결 같아서 <민주조선>이란 한자 섞인 신문 한 장만 읽었다. 다행히 19일 첫날 회의부터 그날그날 정경이 대강대강 보도되었고 대표자들의 인사와 김일성 장군의 엄청난 생산 숫자며 농민의 신축가옥과 농구(農具) 숫자 그리고 학교 학생수로 본 교육향상 등 북조선 정세보고에 대하여, 박헌영(朴憲永) 씨의 남조선정세보고가 전 페이지를 메우고 있어 회의상황을 대략 짐작케 하였다. 무엇보다도 이 회의의 정경을 마치 내가 본 듯이 추인상(追印象)을 새기려고 애썼다. 지면을 통해본 이 인상을 오후 최종회의에서 직접 체험한 인상으로 회의 전일(全日)의 정경을 정확성 있게 그려보려니 했기 때문이다.
1948년 4월 22일 모란봉극장에서 개최된 남북협상회의에서 축사를 하는 김구 선생
이윽고 버스로 회의장을 향하였다. 회의장으로 된 ‘모란봉극장’은 전차길편 모란봉 어구 왜정 때 평양신사가 서있던 언덕에 근자에 단 70여일 걸려서 새로 지었다는 백악관으로 목재 시멘트 콘크리트에 하얀 회칠을 하여 얼핏 보아 그리스 신전을 연상케 하는, 곡선의 소박하나 퍽아담스런 작은 건물이었다.
정문 양편 벽에다 이곳 사회주력인 농민과 노동자 인테리 그리고 사무원이 각각 일하고 있는 모습 네 폭을 큼직하게 동색(銅色)으로 조각해놓았고 정문 아치 위에는 금빛 무궁화를 새겨 붙였다. 정원 내 동쪽에 설백일색(雪白一色)의 구락부 건물이 눈부셨고 맞은편에 국영식당 한가운데 그 앞 분수못이 맑아 푸른 하늘을 비추고 동녘 눈 아래로 휘영청 대동강 건너 저멀리 바라다 보이는 전원 춘색(春色)이 목가적이었다.
벌써 대표자들이 많이 모여 거닐고 있었는데 서울서 보기 드문 사람들이 흔히 보이고 우익측인 듯한 사람들끼리 옹기종기 모여서 김박사가 어제(22일) 들어왔지만 아마 오늘도 참석할까 말까 한다고 수군대고 있었다. 회의는 정각에 속개되어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단호(單戶)이나 700명가량이나 들어설 넓이로 벽 두루에 흰 바탕에 붉게 쓴 표어가 해뜻하게 걸렸고 정면 무대에 30명가량의 주석단석이 마련되어 배경에는 은색 조선지도모형을 중심으로 쌍 태극기를 엇걸고 녹색 월계수로 테를 둘렀을 뿐 양 장군
초상이나 붉은 기는 없었다. 별안간 박수가 일어나며 만장 총기립하기에 발돋음하여 앞을 바라보니 뚱뚱한 사람이 10여 명 거느리고 옆문으로 입장해 들어왔다. 일견해 김장군 이하 주석단인 줄 알았다. 김장군은 무대에 올라 맨 앞줄 중앙석 앞에 서더니 그냥 박수에 박수로 응하면서 자그마한 안경 노인 김두봉(金枓奉) 외 박헌영 허헌(許憲) 등 주석단 제씨가 각각 자기 자리에 들어설 때까지 기다려서 먼저 앉자 그제서야 일동은 박수를 그치고 착석하였다. 이것은 공적(公的) 모둠에서는 일상 행하는 예절인 듯싶었다. 홍명희 씨는 맨 앞줄 바른편 끝에 앉아 머리가 고작 빛났고 이극로(李克魯) 씨의 광대뼈 얼굴도 두드러져 보였으나 소위 ‘공동성명 7씨’란 이 두 분밖에 보이지 않았다. 37살이라고 들은 김장군은 투실투실한 적동색 얼굴에 올백 머리, 연한 자줏빛 국민복을 입었다. 이윽고 문학예술동맹원 일행이 플래카드를 들고 들어와 시를 낭송하여 경축의 뜻을 표하였다. 이날 사회자는 김두봉 씨로 오전에 뒤이어 대표자 몇 사람이 등단하여 토론(연설)하되 지상으로 본 다른 대표자들의 토론내용과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단선을 분쇄하여 양군을 철퇴시킨 후 통일적 민주정부를 우리끼리 세우자는 것, 미국의 대조선정책 이러한 한결같은 내용을 열을 토하여 외칠 때마다 우레 같은 박수가 터졌다.
이것은 모든 회의를 통해서 그 분위기의 초점인 것 같았다. 장내는 만원인데 모두 56단체 약 600여 명, 한독당 민련(民聯: 민족자주연맹-편집자) 그리고 그 산하 관계측 참석인원은 1할 내지 1할 반가량이라고 들었다. 모든 결정서가 일사천리로 통과될 때까지 조만식(曺晩植) 씨는 첫날부터 불참이거니와 양 김씨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김구씨는 그 전날인 22일 조소앙 엄항섭 씨 등과 주석단에 나와 앉았다가 잠깐 인사만 하고 퇴장하였는데 유달리 주목을 끌 만한 주장은 하지 않았고 “우리는 한 피를 가진 겨
레이니 갈라질 수 없다”는 말에 박수로 공명을 받았다는 말을 그 후에 들었다. 이리하여 본 연석회의는 시종 북조선측 주장이 강한 분위기 속에서 열광적으로 폐회하였던 것이다. 이 회의가 끝난 후에는 경축공연과 주요 기관을 관참(觀參)하는데 소일하였다.
요인들 합의가 될 때까지
양 김씨가 연석회의에 정식으로 참석치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 일부에서는 매우 궁금히 여겼다. 25일 연석회의를 경축하는 군중대회가 김일성 장군 광장(전 시청인 인민위원회 앞마당)에서 열렸을 때 양 김씨는 비로소 요인들과 함께 김장군의 사열 노대(露臺) 위에 주석단 일행과 나란히 나타났다.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노래를 옛 곡조로 인민군이 취주(吹奏)할 때마다 기립하여 경의를 표해가면서 끝까지 구경하고 있었다.
남조선 대표자들 중에는 양 김씨의 이러한 동정에 대해서도 관심이 깊은 듯이 “아 김구 씨가 나왔군, 김박사도 있어” 하고 중얼거렸다. 황해제철소(이전에 겸이포, 지금은 송림으로 개칭)를 참관하였을 때 일이다. 현재 7할 내년에는 100% 이상 부흥할 계획 도중에 있다는 지배인 설명과 안내로 본시 용광로 셋이던 것을 하나만 1년간에 조선노동자의 손으로 복구시켜 시뻘건 쇳물이 쏟아져 나오는 장관이며 철판 연판 레일 유산(硫酸) 타르 등 20여 종 공업제품을 생산해 내고 있는 그 옛날 비굴했던 표정이 꺼진 듯한 노동자들의 꾸준한 모습을 보며 돌아다니면서도 양 김씨의 동향이 궁금해서 마침 그 측근자인 모씨를 붙들고 캐어 물어보았다. 그의 말에 의하면 결정서에 서명은 하지 않았으나 연석회의 이후 남북요인들끼리 비공식회의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절망이 아니라는 것과 양 김씨가 매우 원기 있는 태도라는 것을 알았다. 노동자들의 학습소요 문화오락기관인 노동회관이라는 당당한 건물 안에 안내되어 노동자들의 취주악을 듣고 잘 대접받은 후 다시 귀로열차에 올라 떠나올 때 창밖 노동자숙사 앞마당에
서 그 가족들이 차내 일행을 보고 손을 흔들며 그 중 어떤 노파는 덩실덩실 춤을 추며 좋아하였다. 한바탕 웃고 나서 나는 그 측근자에게 기분 좋아하는 틈을 타서 양 김씨에 대한 지상 질문 몇 가지를 부탁하였다. 양 김씨의 특별호텔이란 곳이 그때까지는 알수 없었고 그보다도 방문 회견할 겨를이 없을 것만 같아서였다.
하루는 자유시간을 틈타서 우선 요인 모씨를 방문했다. 간접으로 양 김씨의 동정을 살피고 겸해서 그 숙소를 알아낼 요량이었다. 모씨는 이렇게 말하였다.
“순서가 바뀌지요. 요인끼리 먼저 이야기하고 그 후에 대표자회의를 열자는 것이었거든요.
” 하였다. 그리고 “선생님, 북조선 인상은” 하고 물었더니 “박물관 가 봤소? 스탈린 동상이 있습니다 그려. 김구 선생도 스탈린 초상을 메고 다니는 건 좀 언짢다고 북조선 기자들에게 말했노라구 합디다. 황해도제철소 같은 것을 본다치면 우리들 손으로 그만큼 씩씩하게 기계를 돌리고 생산을 해내니 남조선서는 보지 못하던 일이라 적이 기쁩니다만은 이봐요(소리를 낮추면서) 그 생산품이 어디로 가고 어떻게 처리되는지는 알 바 아니거든” 하고 끽끽 숨을 죽여서 웃었다. 또한 요인 모씨가 “여기 와서 표면만 봐선 안돼. 길 가는 사람도 붙들어 물어보고” 더 이야기하려는 참에 옆에 요인이 눈을 꿈쩍하면서 ‘쉬’ 하
였다. 마침 소제부 여인이 하나 걸레를 들고 들어왔다. 마룻바닥을 훔치는 동안 잠잠하더니 여사환이 다시 나간 뒤에 ‘쉬’한 요인이 낄낄 웃으면서 “말조심하는 게 예의야” 하였다. 나는 인사를 하고 일어나 거리에 나섰다. 그 길로 양 김씨 숙소를 찾아갔다. 전차를 처음 타고 승객들의 질서 있는 거동이며 즐비한 상점에 그 전과 다름없는 양 상품이 풍성한 것을 보았고 소위 이 층이 쌀배급을 못 받아 불평이라는 소시민층이거니 하며 그 전날 이발관엘 들렀을 때 이발사가 “점심 한 그릇에 25원인데 한 사람 깎고 15원 받으니
수지맞갔소. 이 수입으로 시장 쌀 소두 1말을 2백 7, 80원에 사먹으라니. 막 죽갔수다” 하던 불평소리가 문득 떠올랐다.
전차를 내려서 상수리 특별호텔을 곧 찾았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여니 마침 김구 씨는 몸이 편치 않았던지 침대에서 이불을 제끼며 넌지시 일어나 앉았다. 이것은 여담이지만 단 둘이 마주 앉아서 이야기해보기는 이때가 처음이었는데 축 늘어져 덮인 세모눈을 슴벅슴벅하면서 뜸직뜸직 한 마디씩 할 때마다 널따란 입술이 너웃거리는 그 모습에서 순간 ‘오래 묵은 호랑이’가 턱 앉아있는 것 같은 강한 인상을 받았다. 어떤 압력을 헤치면서 나는 이렇게 물었다.
1. 왜 모든 결정서가 통과되던 연석회의에 나오지 않았으며 또 모든 결정서에 당대표자로 하여금 서명을 시켰으니 선생과 연석회의와는 관련이 없는가.
2. 어떠한 공적 의사표시가 있을 듯한데 김박사와의 공동성명은 언제쯤인가.
이에 대해서 씨는 신중한 태도로 이렇게 말하였다.
몸도 고달프고 대표자가 참석했으니 그런 것이지 별다른 이유는 없다. 당대표가 서명한 만큼 결정서의 근본 취지엔 나도 찬동한다. 다만 순서가 바뀌어서 요인끼리 회담이 먼저 있었어야 했는데… 나는 이 요인회의에 본의가 있었다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요인회담과 연석회의는 전연 관련이 없지는 않다. 장차 요인회담이 있을 터인즉 그 후에야 무슨 공적 의사를 말하겠다.
다시 묻기를
3. 요인회의에서 가장 난색이 예상되는 것은 선생이 서울 출발 직후에 성명한바 미소 양군철퇴에 있어 협조적 평등적 외교원칙으로 추진시키자는 점인데 이번 연석회의의 공기로 미루어 보아 그 외교원칙이 미약해질 염려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
했더니
그렇지요. 나도 그 점이 우려되오. 아무튼 나는 남조선 단정 단선도 반대려니와 북조선의 그것도 반대이고 한 번에 안 되면 몇 번이고 이야기해볼 작정이요.
하였다. 그리고 ‘어제 북조선기자단과 회견하고 인상담을 말했다는데 뭣이라 했소’ 물었더니 엊그제 혼자서 서평양 밖 20리가량 농촌부락을 거닐어 보았다. 물론 내가 간다는 것을 농민들이 알았을 리 없었다. 모두 주위를 깨끗이 거두어 있고 전등도 들어오고 더구나 지붕이 십중팔구는 하얗게 새로 이엉을 해넣은 것이라든지 마음이 괴롭거나 생활에 그리 쪼들리지 않은 모양 같았다. 만경대를 가봤는데 혁명투사들 유가족학원은 1억원이나 들여서 잘 지어 놓으면서 김장군 생가라고 들려서 그 조부란 팔순노인을 만나 봤더니 옛 그대로인 초가집에 장판도 없이 노전을 깐 채 물레도 그냥 있고 값나가는 가구래야 라디오 1대 정도인 것을 보고 김장군의 공사별(公私別)을 저윽히 짐작했다. 다만 군중대회에서 김장군 초상은 괜치 않겠지만 스탈린 씨 초상을 메고 다니면서 만세만세 하는 것은 남조선에서 트루먼 씨 초상을
메고 다니는 일이 없으니만큼 좀 안됐더라고 말했소.
하였다. 그리고 김일성 장군에 대한 인상을 물었더니 서울서는 행패를 부린다는 등 여러 말이 많았으나 정작 마주보니 젊은 사람이 건실해 뵈였고 장차 과연 위대한 영도자가 될른지는 모르나 퍽 진취성이 있어 보입디다.
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이왕이면 그 옆방 김박사도 만나볼까 했으나 오후의 예정인 탁아소와 김일성대학에 참관시간이 촉박하였고 양 김씨의 의향도 대강 짐작되는 양 싶어 여관으로 돌아왔다. 3살부터 18살까지의 아이 50명가량을 매일 아침 7시부터 저녁 5시까지 맡아 봐주는 탁아소를 들려서 거의 무료로 먹이는 과즙으로 혈색 좋은 아이들이 깨끗한 침대에서 천사 같이 낮잠들을 자는 것을 보고 가난한 근로부부들의 편익을 예상하였는데 딴 여관에서 참관 왔던 모기자로부터 오늘 저녁 7시에 김일성 장군의 기자단 회견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과연 김일성 장군의 남북요인협상에 관한 의향이 어떠한 것인가 이 기회에 엿볼 수 있을 듯해서 기대를 크게 가졌다.
농민 노동자의 자손들 전체의 약 8할이 국비로 공부하고 있다는 김일성대학 임시교사를 참관하고 특히 이공학 방면에 주력하여 모든 설비를 하루바삐 완성하기에 힘쓰고 있는 인상과 얼굴들이 모두 순박해 보이는 남녀 학생들이 선생이 부족한데도 맹휴(盟休)할 꿈도 안 꾸고 마음 편히 공부에 골몰하는 듯한 인상을 받으며 기림리 밖 농민들의 애국미 헌납분 약 1억원으로 10개월 준공을 목표하여 건평 7천 평의 대건물을 공사중인 신축 김일성대학을 보러 갔을 때 또한 모기자로부터 방금 개회중인 인민회의(국회) 특별회의에서 한창 토의되는 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이 많이 수정되어간다는 말을 듣고 귀를 쫑긋하였다. 특히 “수도를 서울에 둔다”고만 하고 그 단서조항이었던 “임시수도를 평양에 둔다”를 삭제하였다는 말에 당국측의 남조선요인측 통일노선에 대한 고려의 용의를 짐작케 하는 듯하였다.
그날 밤 헌법초안통과회의를 마치고서 김장군은 예상대로 자기 방(위원장실)에서 기자단 회견을 하였다. 질문에 대한 답변 중 남북협상에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내용으로 1. 3상(三相) 결정은 이미 과거사요 후견이 필요치 않은 만큼 북조선 건설은 순전히 조선사람 손으로 토지개혁, 인민경제계획 등 민주적 개혁을 단행하여 이만큼 되었음에 비추어 오늘에 있어서는 양군은 이 이상 더 주둔할 근거가 없어졌다는 것 2. 양군 철퇴를 요구하되 평화적 외교(양 김씨의 원칙)로 할 것, 3. 인민군은 좀 더 신성한 목적에 있으니 진공 상태에 대한 불안은 절대 기우라는 것을 불일(不日) 남북요인공동성명으로도 보장하였다는 것, 4. 우리의 노선은 소위 반대세력이 비난하는 독재적 공산주의가 아니라 조선의 현실에 비추어 인민에 기초를 두고 인민의 노력을 원칙으로 완전 발휘케 하여 전체 인민의 균등 행복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노선이란 것 등을 양 김씨가 제안한 5대 원칙과 근사한 표현으로 말한 것이었다. 어떤 노기자는 회견을 끝마치고 북도에 나오면서 “이제 김장군의 언명은 순정에서 우러나오는 듯 했는데, 그것이 그대로만 간다면 장래야 어떠한 복선이 불쑥 튀어나오든지 간에 이번 양 김씨와의 합의는 거의 결정적이 아닐까” 하고 소감을 말했다.
남북요인공동성명서
5.1절기념대회를 내일로 앞둔 4월 30일 아침, 동숙했던 한독당 모 요인과 목욕탕에서 만나 오늘은 남조선측 양 김씨와 북조선측 김일성 김두봉 양씨의 소위 4김씨 간에 그동안 양측 대변인인 남측 권태양(權泰陽) 씨와 북측 주영하 씨(朱寧河: 인민위원회 수뇌부이며 이번 회의 준비위원장) 사이에 비공식으로 5대 원칙을 중심으로 상호 토의해오던 그 끝말을 보게 되리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오늘 오후 4시경에 4김씨가 정식 최종회담을 하되 그 장소가 어딘지는 모른다고 하였다. 이것을 알아내려고 나는 전부터 신임하던 친척이요 이곳 문화계 중진인 모씨를 기어코 찾아보려니 하고 자유시간을 얻어가지고 문학예술동맹 사무소를 찾았다. 그 전 기생학교 자리였는데 요행 있었다.
내의(來意)를 말하자마자 “정신 있느냐. 내가 그런 것을 알리도 없고 알아볼 필요도 없다”고 자기 일만도 바빠 죽을 지경이라고 핀잔을 주었다. 그 대신 이곳 의류난(衣類難)은 현저하나 명년이면 경제계획에 의하여 금년 식량사정과 같이 완화되리라는 것, 문화인들은 노동자와 같은 대우로 2급 배급쌀 5합에 동맹일을 보면 평균 매달 1, 2천원 고정급이 있고 원고료가 1장 70원이니 생활 걱정은 없고 동시에 모리(謀利)라도 해서 (할 수도 없지만) 돈이나 벌까 하는 잡념은 생길 여지가 없이 창작에 주력할 마음의 여유가 있다고 자랑하였다. 자유 여하에 대해서 물었더니 “맨 처음에는 창작하는 데도 부자유스러웠지만 이곳 사람들이 정신생활의 강령으로 삼고 있는 소위 철저한 자기비판으로 상호토론을 맹렬히 계속하노라면 필경에는 ‘이 노선이 절대 올바르다’는 결론에 누구나 도달함으로 그 다음부터는 위에서 지시하는 명령에 하등 부자유를 느끼지 않는다”
고 하였고 창작도 노선과 그 정신만 잊지 않으면 어떤 테마이건 자유라고 타일렀다.
민족문화 건설에 대해서는 마침 옆에 앉았던 성악가 모씨가 흥분해서 “대체 남조선에서는 때가 어느 때라고 춘희 따위를 공연하곤 우쭐해하는 거요. 우리는 견우직녀를 벌써 정통적으로 가극화시켰고 요즘은 춘향이를 창작했소. 한 번 가 봐요” 하고 나를 꾸중하다시피 대들었다. 문득 인민군 연주회에서 향토색 짙은 신가요와 신무용(아리랑 도라지타령 개성난봉가 농군춤 등) 이 형식과 내용도 다 창의성을 엿볼 수 있는 듯이 느낀 생각이 났다. 이렇듯이 이날은 끝끝내 요인회담이 어디서 열렸는지 모르고 초조히 지냈고 다만 밤 9시에 모란봉구락부 회의실에서 4김씨를 위주로 한 남북요인 그리고 각 정당사회단체 대표자들이 일당(一堂)에 모여 공동성명서에 일제히 서명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동숙 요인에게 다짐해 봤더니 틀림없이 그실 요인공동성명서가 모든 대표자 간에 통과되어 밤 방송으로 발표됨으로써 5.1절을 장식하였다고 확인하였다. 이로서 이번 남북협상은 일단락지은 듯하여 공동성명서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 이튿날은 5.1절 군중기념대회가 평양역 광장에서 벌어졌다.
이 대회에서 공동성명이 발표되려니 하고 회장으로 향하던 도중 새벽부터 동원되어 나오는 군중으로 길목마다 가두마다 문자 그대로 꽉 메워져 있어 일행 버스도 가다 멈추고 길이 트일 때까지 잠시 기다렸는데 뒤를 따라오던 소련군 장교가 탄 지프가 보안대원에게 스톱을 당하고 서로 뭐라고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보안대원은 절대 안 된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도로 가라고 하는 양 같고 소련군 병사는 짓궂게 그러나 온순한 태도로 뭐라고 대꾸하고 있다.
안내자(民戰 사무원)에게 왜 그러느냐 물었더니 통행증이 없어서 도로 쫓는 것이라 했다.
주둔군인데 통행증이 그리 필요한가 다시 물으니 “소련군이라도 인민위원회 정권 지배를 받기 때문에 절대 아니 되오. 같은 동무이긴 하나 우리 행정권과 혼동할 수는 없소” 하였다. 그 말에 10일 전 3.8선을 넘을 때 신임장을 조사하는 소련군 병졸에게 무궁화 담배를 1개 주었더니 선뜻 받아 물고 뻑뻑 피우는 그 소박하고 비위 상하는 우월감도 없어 보이는 첫 인상이 머리를 스친다. 이날 행렬은 생전 처음 보는 장관이었다. 인민군의 위세란 당당하였고 각계각층 하여튼 이곳 사회층으로 빠진 곳이란 없어 보였다. 특히 중국사람들이 농민은 곡괭이를 메고 낭자들은 청복(靑服)을 입고 모택동(毛澤東) 씨 초상을 받들고 사열대를 지나가며 “김일성 장군 만세 만세” 하는 모양은 인상적이었다.
양 김씨와 요인들도 전원 출석하였는데 내 옆에 서서 이 행렬이 다 지나기까지 4시간 동안을 비를 맞으며 바라보던 요인 모씨는 “이곳 사회는 아예 새 사람 새 시대로 일신했군 그래. 지나가는 얼굴을 보아하니 죄다 20세 전후인 청소년이오 장년층이래야 농민과 노동자 그 역시 새 정신을 불어넣은 새 사람들이 상하 일속(一束)으로 그 강력한 조직체를 가지고 절대 옳다는 길로 마악 밀고나가니 좋건 언짢건 어떠한 건설이 하나 되어질 수밖에. 이런 씩씩한 사회적 힘이란 남조선에서 도저히 느낄 수 없는걸…” 하고 입을 쩝쩝 다시었다. 이 대회에서 공동성명서는 공표되지 않았고 여관에 돌아와 신문을 보니 거기 기재되어 있었다. 이것만 있으면 이젠 볼 장을 다 봤거니 하고 짐을 싸며 그 공동성명서를 가위로 도려내 간직하였다.
이튿날 떠나기 전에 김구 씨를 두 번째 방문하고 “통일과업 단계가 하나씩 개척되어가니 기쁘고 자세한 말은 쉬 귀경하여 여러분께 말하겠다”는 감상 기사를 얻었다. 그리고 “김두봉 씨가 두 번이나 조만식 씨를 고려호텔로 찾아가 회의에 참석하기를 환영했으나 거절하였다는데 조씨를 만나봤는지요” 하고 물었더니 서서히 만나련다는 간단한 대답을 듣고 돌아왔다.
오후 2시 반 차로 평양을 떠나려고 정거장으로 나갈 때 첫날부터 일행의 안내자로 깍듯하게 돌봐주는 보안대원이 바래다주마고 따라나섰다. 역장실에서 차를 기다리는 동안 대원은 은근하고도 진지한 표정으로 “선생님. 이번에 이북에 왔던 감상은 어떻소. 솔직히 말해주시오” 하고 마지막 청인 듯이 물었다. 나는 이 청년(20세 전후)이 농가의 자제로 소학교밖에 못 나왔고 해방 후 민청(民靑)에 가입하여 그 단체 내 학습실에서 공부한 분수로는 놀랄 만하게 풍부한 상식과 사회주의이론을 가졌고 그보다도 순진한 점에 호감을 가졌었다. 가끔 내 방에 들어와 “선생님은 자꾸만 반동기자 반동기자 하고 겸손만 떨지 말고 여기 사회의 결점을 말해주시오” 하면서 2년 전 과도기의 혼란했던 사정이며 식량정책의 실패로 식량사정이 극도로 악화됐던 것이 작년 인민경제계획 수행 이래로 요즘은 윤택하게 된 경위와 그밖에 이북인이 다수 월남하는 이유로서 개인주의적 자유관념이 이곳 노선하에서는 배겨나기 곤란함에 따라 소시민으로 몰려 일반 배급을 못 받는 관계로 살기 거북해 그리 된다는 등 여러 각도로 숨기는 티 없이 터놓고 말해주는 그 소박함에 관념상으론 먼 거리를 느끼면서도 어딘지 인간적으로 우정을 느껴왔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내가 이번에 와서 견문한 내용은 한 관통(管筒)을 다녀본데 불과한 만큼 이북의 정체는 이렇다 하고 단언할게 못 됩니다. 못해도 6개월 이상은 실지로 살아봐야겠지요. 그러나 한 가지 어디를 가든 또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책임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앞서 이곳 선전국에서 남조선기자단을 초대했을 때 허정숙(許貞淑) 국장이 역시 노형이 묻듯이 내 소감을 묻기에 거기서 대답한 내용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하렵니다.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요즘에 와서 ‘아름다움’을 구하고 그것을 글로 그려보려는 희망에 겨우 삶의 보람을 느꼈으나 남조선에서는 자나깨나 어떻게 먹고 사나 하는 걱정이 앞을 막곤 해서 고민이 여간 아니었던터에 이번 여기를 와보니 어떤 문화인의 진실한 이야기도 듣고 이것저것 견문하는 동안에 어쩐지 내가 늘 걱정하던 ‘밥걱정’을 덜어주는 환경은 여기서 이루어져가고 있는 양 싶어 계획경제의 뚜렷한 성과에 매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도자층이 개인 영달에 눈이 뒤집히거나 일반 근로자가 ‘돈의 노예’가 된 듯한 사회적 부패성이 없이 모두 왜 그런지 진실 소박해 보이고 무엇을 하나 건설해놓고야 만다는 박력을 느낄 수 있어 매우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래 언뜻 생각에 여기 와서 살아볼까 하는 마음도 났으나 다시 생각해보건대 나같이 개인주의적 자유관념에 이미 푹 젖은 머리로서는 여간해 배겨나지 못할 것 같아서 다만 ‘밥걱정’ 때문에 역시 내 강토인 남조선을 떠나온다는 것은 자기를 모르는 비겁한 처신이라 마음먹었습니다. 내가 남조선에 가면 마음의 3·8선을 없애는데 도움이나마 되고자 이곳의 좋다고 생각되는 점과 나쁘다고 느껴지는 점을 우선 이번 와서 본 한도 내에서 친지들에게 이야기함으로써 남북통일과업에 이바지하는 보람이 있었으면 합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떠시오.
했더니 청년은 내 손을 잡으며 웃으며 “안녕히 가세요” 간단히 인사를 하고 돌아서 갔다. 나는 호주머니에 손을 넣어 공동성명서의 신문지 조각을 만져보면서 플랫폼으로 나갔다.(5월 6일 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