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연합 '온콘' 2014 기획 시리즈_생각을 바꾼 그녀들 세상을 바꾼 그녀들_시즌2] 한국염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




“50년 운동의 원동력은 ‘거룩한 분노’”



1996년 남편과 민중교회 통해 이주노동자 운동 시작
한국의 이주여성 인권운동 개척자로 제도화 기틀 마련
“집착하지 않고 내가 시대적 사명을 다했는가 질문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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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염 대표는 자신의 정체성을 '종교여성운동가'라며 '다시 태어나도 또 여성운동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날 이 땅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이 누구인가?”


자그마치 50년. 반세기 동안 삶의 모퉁이 모퉁이에서 그는 질문했다. “오늘날 이 땅에서 가장 고통받는 사람이 누구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 발걸음의 이정표가 됐고, 길이 됐고, 역사가 됐다. 20여년 전에 남편과 함께 서울 창신동에서 민중교회를 섬기기 시작했을 때도 그는 같은 질문을 했고, 그 답은 ‘이주노동자’였다. 그렇게 이주노동자 운동에 뛰어든 한국염(68)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는 이후 ‘이주여성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한국의 이주여성 인권운동을 이끌어 왔다.
“1996년에 성남에 있는 양말 공장에서 일하다 도망쳐 나온 중국 한족 출신 이주노동자 8명을 만난 것이 시작이었지. 임금체불과 성추행을 겪다 도망 나온 노동자 8명 중에 7명이 여성이었어요. 그렇게 남편이 사역하던 청암교회에서 서울이주노동자센터를 만들었고, 나는 낮에는 여신학자협의회에서 일하고 밤에는 이주여성노동자들 상담을 했지요.”
한 대표는 “이주노동자 운동에 투신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이들이라 소위 민주화 개념은 있었으나 젠더의식은 굉장히 약했다”며 여성을 위한 시설과 인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가장 절박했던 것은 이주여성노동자들을 위한 쉼터였다. 당시 이주여성노동자를 위한 쉼터가 전무한 상태인데다 기존의 쉼터들도 열악한 처지라 남성들이 입소하면 여성들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여신학자협의회에서 일하고 있던 한 대표는 독일의 세계기독위원회에 편지를 써 이주여성노동자 쉼터 마련을 위한 기금 3천만 원을 요청했고, 2년만에야 돈이 도착했다. 하지만 2년 동안 건물 한 층을 임대할 수 있는 전세금은 3천만 원에서 5천만 원으로 훌쩍 올라버려 모자란 돈 2천만 원은 따로 모금을 해야만 했다. 우여곡절 끝에 2001년 ‘외국인여성노동자의 집’이라고 이름붙인 쉼터를 마련했고, 그렇게 이주여성을 위한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 쉼터를 마련할 때 외국인 여성들을 위한 공간이라고 하니 아무도 집을 안 발려 주는 거에요. 부동산에서는 ‘그러지 말고 그냥 집을 하나 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순전히 배짱으로 건물을 매입하고 돈을 모아 해마다 한 층씩 전세 들어 있는 사람들을 내보냈죠. 건물 한 채를 온전히 마련하는데 7년 쯤 걸린 것 같아요.”
15년 전 이주여성노동자를 대상으로 시작한 쉼터는 2003년 ‘이주여성인권센터’로 이름을 바꾸고 결혼이주여성들을 위한 활동으로 무게중심을 옮기게 된다.
“쉼터에서 다양한 이주여성을 만났어요. 결혼이주여성과 성매매로 유입된 여성도 만나게 됐어요. 실제로 만나보니 성매매로 유입된 이주여성들의 인권문제가 가장 심각했는데 그들을 위해서는 이미 활동하고 있는 두레방이나 새움터같은 전문가들이 있었어요. 결혼이주여성들을 만나면서는 이들이 24시간 창살 없는 감옥에서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이주여성노동자들은 퇴근하면 그래도 사생활이 있는데 폭력 피해를 당하는 결혼이주여성들은 그럴 수도 없는 거에요. 그들의 상황이 너무 참혹해서 활동의 중심을 결혼이주여성으로 옮기고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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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염 대표는 여성운동 후배들에게 '마음을 비우고 사는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민중과 더불어 살기 위해 학위 포기


45여년 전 한국에서 여자는 목사가 될 수 없던 시절 한국염 대표는 ‘여자 목사’가 되고자 신학대학교에 입학했다. 성직자의 길을 택한 데는 어린 시절 죽을 고비를 넘나들었던 개인적 체험도 한 몫을 했다. 한국전쟁 이후 스칸디나비아 반도 3국이 운영하던 지금의 국립중앙의료원의 전신이었던 병원에서 한 대표처럼 위독한 환자가 들어와 살아나간 게 처음이었단다. 주변 사람들 모두 죽는다고 했던 13살짜리 소녀는 그렇게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그 경험은 그를 자연스레 신학교로 이끌었다.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에 한국에 여자 목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신학교에 갔어요. 그 때만 해도 나는 여자들이 똑똑하지 못해서 목사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했지, 제도 때문인 걸 몰랐어요. 그런데 입학하고 보니 여자는 목사가 못된다는 거야. 학교를 그만둬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던 중에 우리 학교에 여자 교수가 있는 걸 보고는 ‘목사가 못되면 교수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남았죠.”
1969년 한신대학교에 입학한 한 대표는 대학시절 기장여신도회에서 여성목사 안수를 위해 교단과 싸운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자진해서 찾아다녔다. 해당 교단에서 여성목사 안수제는 1975년 세계여성의 해를 한 해 앞둔 1974년 통과됐다. 한국염 대표의 여성운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한 대표는 대학원 졸업 후 기독교 잡지에서 기자로 활동하다 여신도회 전국연합회에서 기독교 여성운동을 시작했다. 기독교신문 기자였던 남편 최의팔 목사는 주요 일간지에서 싣지 않았던 ‘인혁당 사건’을 신문에 실었다가 안기부에 의해 해고를 당했다. 그 후 한 대표 부부는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건너갔고, 여성신학으로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한 대표는 체류 3년 만에 학위를 포기하고 귀국했다.
“독일 가기 전 민중신학을 하시던 교수님들의 삶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그분들을 존경하지만, 교수라는 위치 때문에 민중처럼 살지는 못하시더라고요. 민중 지향성을 갖고는 있지만 민중과 더불어 사는 삶은 안되는 거에요. 내가 공부를 더 해야하나 고민할 때 그 생각이 나면서 나도 교수가 되면 그렇게 살게 될 것 같아 학위를 접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50년 운동을 돌아볼 때 가장 잘 한 일 중의 하나가 학위를 포기한 것이에요. 기득권 자리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었어요.”


독일에서 돌아온 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 운동에도 결합한 한국염 대표는 수 년 째 정대협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1차 아시아연대회의의 실무책임자이기도 했던 그는 1996년부터 실행위원을 시작하는 등 20여년 간 정대협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정대협 운동은 성, 계급, 인종 문제가 다 녹아들어 있는 거에요. 당시 한국에서 힘없는 사람들이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갔거든. 거기에 계급 문제가 있고, 일본 제국에 의해 희생당한 것이니 제국주의 문제가 있고, 여성이 겪는 성폭력 문제이면서 민족과 인종 갈등까지도 포함된 문제이지요.”
한 대표는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미군 위안부’나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게 성폭행 당한 베트남 피해 여성들에 대해서도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이 일본처럼 국가가 모집을 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군이 베트남 피점령지 여성에 가한 폭력에 대해서는 당연히 사죄를 해야지요. 정대협 운동이 자국의 여성에만 국한하지 않고 전시 하 체제 여성 문제로 끌어안고 가는 것에 대해 의미부여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 민족이기 때문에 한국인에만 집착한다면 그것이 진짜 민족주의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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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8일 세계여성의날 기념 제31회 한국여성대회 '퍼플워킹'에 이주여성들과 함께 참여한 한국염 대표. 앞줄 소녀상 왼쪽 의자에 앉아있는 한 대표.>


“앞으로도 이주여성인권센터가 내딛는 걸음이 곧 길이 되길”


한국염 대표가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와 함께 활동한 지 15년, 정부가 이주여성을 위한 지원사업을 시작한 지 10년이 흘렀다. 한국사회에서 이주여성들의 인권문제가 여전히 심각한 수준이지만 지난 10년간 가정폭력방지법 개정, 이주여성 쉼터 마련, 콜센터 개설 등 이주여성의 인권을 위한 제도화 작업은 계속 진행되어 왔다. 이 과정에서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와 한 대표의 활동이 큰 부분을 차지했음은 물론이다.  
“어쨌든 제도는 좀 나아졌지요. 초창기에는 결혼이주여성들을 전업주부로 상정하고 입국시키기 때문에 이혼하면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야 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법무부에 체류법 변경을 요구해서 일반인은 5년이 지나야 영주권이나 국적을 신청할 수 있는데 결혼이주여성은 2년 만에 신청할 수 있게 바뀌었어요. 이혼 시 혼인 파탄의 책임이 당사자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 입증되면 체류할 수 있게 됐죠. 또 초창기에는 결혼이주여성들이 취업을 못했어요. 친정집에 돈 보내는 문제로 남편과 갈등이 생기고 여성들의 자존심이 다치니까 일자리를 줘서 여성들이 떳떳하게 자기가 번 돈을 고향에 보내게 하자고 설득했죠. 그렇게 결혼이주여성들의 취업권이 열리게 됐습니다. 누군가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가 내딛은 걸음이 곧 길이 됐다’고 얘기를 하는데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자신의 정체성을 ‘종교여성운동가’라고 말하는 한국염 대표는 “다시 태어나도 또 여성운동을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평생 낮은 곳에서 힘들지 않으셨냐’는 필자의 질문에 그는 “나 이름 많아. 명예도 있고. 상도 여러개 탔어”라며 소리내어 웃었다.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없이 살았어. 사람들이 나보고 어떻게 생활했냐고 물어보는데 하루 세끼 밥 먹고 살았어요. 결국 집착을 안하면 쉬운 것 같아요. 우리 센터도 돈이 없어 언제까지 버티겠나 생각하다가도 이거 오래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도 내 욕심이다, 시대적 사명을 다하면 접는 거지 뭐. 문제는 내가 시대적 사명을 다했느냐 하는 질문이에요.”  


글/사진 : 김수희 여성연합 활동가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는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이주여성의 인권과 복지를 위해서 활동하고 있는 비영리민간단체로

외국인이주여성의 인권보호와 권익신장,
모성보호와 육아지원을 통한 이주여성과 자녀들의 생명존중,
성인지적 관점에서 이주여성을 위한 교육과 문화활동을 통한 한국사회의 적응지원,
국경을 넘는 연대를 통하여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듦으로서
평등하고 평화로운 지구촌 사회를 실현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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